5. 경주 분황사

불자에겐 성지순례지인 경주
원효 자취 서린 분황사 소중
알천 경계로 남·북 마을서는
부처님·현덕왕에 각각 기도해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모전석탑.

경주는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지다. 불자에게는 단순한 관광코스라기보다는 성지순례지다. 다양한 순례지 가운데 국립경주박물관, 황룡사지, 분황사로 이어지는 여정이 있다. 분황사는 넓은 황룡사지 옆에 숲과 담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사찰로 보이지만, 신라 최고(最古)의 사격을 갖춘 사찰 중 하나였다.

분황사(芬皇寺)는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하였다. 우리나라의 위대한 스승인 자장 스님(590?~658?)과 원효 스님(617~686)이 계셨던 절이다. 자장 스님이 643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스님을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원효 스님은 분황사와 관계가 매우 깊다. 학자들은 스님의 독창한 불교를 해동종, 분황종이라 하고 스님을 분황원효라 할 정도다. 스님은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스님은 신문왕 6년 70세로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 스님의 아들 설총은 원효 스님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 설총이 옆에서 예배하니, 스님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몸을 돌린 대로 있었다.

고려 숙종 6년(1101)에 숙종은 원효 스님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분황사에 비석을 세웠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언제인가 비석은 훼손되었고, 조선후기에 절 근처에서 비석 받침대만 발견되었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받침대 위쪽에 ‘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이것은 신라 화쟁국사의 비 자취다]을 새겨두었다. 자세히 봐야 글을 볼 수 있다.

분황사 창건 당시 세워진 모전석탑은 유명하다. 함정 문제로 시험에 자주 출제된다. 모전석탑(模塼石塔)은 말 그대로 벽돌[塼]을 모방[模]한 돌탑이라는 뜻이다. 벽돌로 만든 탑을 전탑(塼塔)이라 하고, 돌로 만든 탑을 석탑(石塔)이라 한다. 그런데 분황사 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탑이다. 흙으로 만든 벽돌이 아니고 돌로 만든 벽돌 모양이라 모전석탑이다.

〈삼국유사〉 등에 언급만 되고 지금은 없는 문화재도 있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그 가운데 하나다. 솔거가 황룡사에 그린 노송도(老松圖)는 유명하다. 노송을 너무도 잘 그려 새들이 착각하고 날아들다가 벽에 부딪혔다고 한다. 그런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도는 어떨까. 그리고 경덕왕 14년(755)에 모신 무게가 30만6700근(약 197톤)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도 궁금하다. 몽골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분황사의 문화재가 많이 유실되었다.

현재 분황사에는 모전석탑을 비롯하여 보광전, 약사여래상, 세 마리의 용이 물고기로 변했다는 삼룡변어정, 원효대사를 기리는 화쟁국가비석 받침, 당간지주 등이 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발견된 목 없는 불상들은 시대의 아픔을 전해준다. 이 불상들은 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다.

화쟁국사비석 받침.
화쟁국사비석 받침.

불교 향한 신라 자존심
분황사는 불교문화 강좌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찰이다. 앞서 언급한 모전석탑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찰의 위치 관련으로 등장한다. 우리나라 사찰은 산사(山寺)라고 할 만큼 대부분 산에 있다. 그러나 마을에도 많은 사찰이 있었다. 물론 산사의 절이 수행하기 적합하다는 이미지, 조선시대 불교 탄압 등의 이유로 오늘날에는 산에 절이 많지만.

경주 분황사는 마을에 자리한 사찰의 대표적인 예다. 마을 정도가 아니다. 신라의 도읍지 경주 도심이다. 단순히 도심 사찰이 아니라 신라의 자존심을 나타내는 사찰 가운데 하나다.

〈삼국유사〉 제3 흥법편 ‘아도기라(阿道基羅)’[아도 스님이 신라의 불교 기초를 닦다]에서 아도 스님에게 스님의 어머니는 말하였다. ‘서울(경주) 안에는 일곱 군데 절터가 있다. 천경림(天鏡林), 삼천(三川) 갈래, 용궁 남쪽, 용궁 북쪽, 사천(沙川) 끝, 신유림(神遊林), 서청전(請田)이다. 모두 앞 부처님 시대의 절터였다. 불법이 길이 전해질 땅이니 네가 그곳으로 가서 위대한 가르침을 전파하여라.’

아도 스님은 신라에 불교를 전해준 고구려 스님이다. ‘앞 부처님’은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불, 가섭불, 석가모니불 등 과거칠불(過去七佛)이다. 일곱 부처님은 경전에 등장하지만, 석가모니불을 제외하고는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분은 아니다. 그런데 경주에 있는 일곱 곳이 과거 일곱 부처님 시대의 절터라고 하니, 역사적인 사실은 더욱 아니다. 다른 나라보다는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의 자존심을 나타낸다. 신라 땅이 예로부터 부처님이 함께하였던 도량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문화의 우월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 또는 이 땅을 불국토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을 상징한다. 혹은 흥륜사 터인 천경림이 원래 신라 토속신앙의 성지였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분황사 터도 토속신앙의 제사 터로 추정한다. 여하튼 이 일곱 절터 가운데 용궁 북쪽에 자리한 사찰이 바로 분황사다.

분황사 당간지주.
분황사 당간지주.

부처님 가피로 홍수 막다
분황사는 경주 북천(北川) 남쪽에 위치한다. 알에서 나온 혁거세 거서간을 목욕시킨 강이라 하여 알천이라 한다. 이 강은 덕동호에서 시작하여 형산강으로 이어지며, 동에서 서로 경주 시내를 관통한다. 이 강에는 예로부터 홍수가 자주 일어났다. 특히 현재 분황사는 북천이 굽이치는 바깥쪽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상류에서 물이 넘치면 곧장 절로 몰아친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피로 홍수를 막기 위해 이곳에 분황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분황사의 위치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해진다.

알천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두 마을이 자리한다. 남쪽 분황사가 있는 동천 마을과 북쪽 헌덕왕릉이 있는 구황 마을이다. 매년 여름이면 알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 마을 사람은 홍수로 늘 불안하였다. 그래서 구황 마을 사람은 홍수의 피해를 막아달라고 부처님에게 기도를 드리고, 동천 마을 사람은 헌덕왕릉에 가서 기도하였다.

홍수 때마다 분황사 부처님은 구황 사람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물길을 북쪽으로 돌리려고 하였고, 동천의 헌덕왕 혼령은 물길을 남으로 돌리려고 하였다. 물길이 북쪽으로 흐를 때는 헌덕왕릉의 석상과 비석이 땀을 흘리고, 남쪽으로 치우쳐 흐를 때는 분황사 부처님이 땀을 흘렸다. 분황사 부처님과 헌덕왕의 혼령이 워낙 치열하게 다투니, 알천 냇물이 한때는 하늘로 치솟기도 했다.

그런데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 어찌 누구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가피를 주었겠는가. 어찌 헌덕왕 혼령과 치열하게 다투었겠는가. 한 해에는 남쪽 구황 마을이 더 큰 피해를 보고, 한 해에는 북쪽 동천 마을이 더 큰 피해를 보니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홍수의 피해를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을 이야기에 담았다고 본다.

홍수의 피해를 벗어나고자 여러 차례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 헌덕왕릉 근처 강가에 알천제방수개기(閼川堤防修改記)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숙종 33년인 1707년에 홍수를 예방하려고 알천 제방을 수리하고 부역한 내용을 세 개의 바위 면에 90여 자로 기록한 글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제방을 쌓아도 빈번이 홍수 피해를 보았다. 특히 북천 강변 가까이 자리한 헌덕왕릉은 피해가 심하였다. 이로 인해 무덤 주위의 석재는 거의 손실되었다. 분황사 모전석탑 앞에 있는 사자상이 원래 헌덕왕릉에 있었던 것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다. 오늘날에는 보문호와 덕동댐 건설로 홍수는 잦아들었다. 혹 경주를 자주 갔었다면 이번 순례길에는 알천남로 또는 알천북로를 따라 걸어보시라. 한가로운 여정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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