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호지, 견성성불로 가는 출발선”

큰 절에 가면 공부할 수 있단 말에
영어사전 들고 입산…3일 만에 출가
탄허, 월운 스님 등에게 경전 배워
자운율사에게 戒學 수학…계맥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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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공부 기본은 戒定慧 배우는 것
계율로 선정을, 선정은 지혜 이끌어
계율, 수행의 근본이자 부처님의 行”

태허 무관 대종사는… 1959년 출가해 1964년 향천사에서 보산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2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은사는 희섭 스님.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한 무관 스님은 지관 스님 전강제자로서 승가교육에 평생을 매진했다. 해인사승가대학장, 해인사 율원장과 율주, 총무원 총무부장, 중앙종회의원, 법계위원장 등을 두루 역임하고 전계대화상으로서 불법홍포와 종풍진작에 진력하고 있다.
태허 무관 대종사는… 1959년 출가해 1964년 향천사에서 보산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2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은사는 희섭 스님.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한 무관 스님은 지관 스님 전강제자로서 승가교육에 평생을 매진했다. 해인사승가대학장, 해인사 율원장과 율주, 총무원 총무부장, 중앙종회의원, 법계위원장 등을 두루 역임하고 전계대화상으로서 불법홍포와 종풍진작에 진력하고 있다.

해인총림 해인사가 한국불교의 종찰(宗刹)로 불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국난극복의 염원이 담긴 팔만대장경이 있어서이기도 하고 엄정한 가풍이 살아 있는 선원(禪院)이 있어서이기도 하며 치열한 공부가 이어지는 강원(講院)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율원(律院)이다. 당당하게 총림(叢林)을 지키는 하나의 기둥으로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해인율원이다. 

해인율원(海印律院)은 성철 스님과 함께 ‘봉암사 결사’를 주도했던 자운 스님의 원력으로 출발했다. 스님이 해인사에 ‘천화율원’을 열어 후학들을 지도했고 1968년에는 자운 스님의 원력을 이어 받은 일타 스님이 해인사 극락전에서 5명의 스님들에게 <사분율>을 강의하며 율원의 토대를 닦았다. 

마침내 1977년에 일타 스님을 율주로 현대 한국불교 최초의 총림율원인 해인율원을 설립한다. 그 후 수많은 수행자들이 해인율원에서 계율(戒律)을 연찬했고 전국의 사찰로 나아가 후학들을 키워냈다. 

해인율원의 가장 큰 자랑은 자운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자포살(自恣布薩)을 현대불교 최초로 발의하고 진행했다는 점이다. 자자포살은 지금도 한국불교 수행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의식이다. 자운 스님의 상좌이자 현대 한국불교의 대강백이었던 지관 스님이 총무원장을 하면서 종단 주요제도로 확립했다. 

선교율(禪敎律)이 부처님 가르침을 지탱하는 세 개의 축이듯이 해인총림은 율원이 가동되면서 총림으로서 완전체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유독 추웠던 겨울 안거의 해제를 앞두고 해인율원으로 향했다. 조계종 전계대화상 태허 무관 대종사가 주석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계대화상은 종단 계단의 설치, 운영, 수계식 등을 관장한다. 또한 당연직 계단위원장 소임을 맡으며 계단에 관한 주요 사항을 심의하고 결정하는 계단위원을 위촉한다. 

무관 스님은 2020년 12월부터 전계대화상을 맡고 있다. 1차 임기가 끝난 지난해 말 원로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다시 전계대화상에 추대돼 두 번째 임기를 수행하고 있다. 스님은 해인총림의 전계사(傳戒師)를 맡고 있기도 하다. 

戒와 律, 수행의 근본
오랜만에 들어선 율원은 여전히 꼿꼿했다. 기세등등하던 겨울 추위가 발붙일 생각도 못할 정도다. 당당하게 서 있는 ‘해인율원(海印律院)’ 현판 양옆으로 일타 스님의 글씨가 춤을 추고 있다. 

마승 비구의 위의를 익히고(習馬勝之威儀) 
우바리 존자의 궤범을 배운다(學婆離之軌範) 

마승 비구가 누구인가? 위의가 얼마나 단정했으면 사리불과 목건련이 그의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 귀의했을 정도였다. 우바리 존자는 부처님 10대 제자 중 지계제일(持戒第一)로 대중들의 존경을 받았던 수행자다. 해인율원의 가풍과 지향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글씨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율원 안쪽으로 더 나아갔다. 율원채인 극락전 주련 글씨를 보며 단단하게 마음을 붙잡는다. 

지금 이 몸으로부터 불신에 이르도록(自從今身至佛身)
굳게 계율을 지켜 범하지 아니하리니(堅持禁戒不毁犯) 
바라옵건데 제불께서 증명하소서(唯願諸佛作證明) 
신명을 버릴지언정 끝내 물러나지 않으리(寧捨身命終不退) 
제가 지난날 지은 죄업들(我昔所造罪惡業) 
하나같이 하염없는 탐진치로 말미암았네(皆由無始貪嗔癡)
종신토록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지은 죄(終身口意之所生) 
모두 제가 지금 다 참회합니다.(一切我今皆懺悔)  

석주 스님이 ‘율장입지게(律藏立志偈)’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다. 추상같은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율원 내 청백당에 위치한 무관 스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강사이자 대율사인 무관 스님의 방은 정말 말 그대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책이 가득했다. 

“부처님 성도 후 설립된 승가는 계율에 의해 기본이 성립됐습니다. 우바리 존자의 계율 암송으로 율장이 갖추어지고 중국 도선 율사에 의해 ‘사분율’ 중심의 계단과 전계가 이루어져 면면히 이어 온 율종은 1980년 법난 이후 조계종 단일계단을 자운 성우 대율사께서 설립하시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어요. 

불교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계정혜에서 계가 제일 먼저 나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계율에 의해서 선정이 생깁니다. 또 선정에 의해 지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계율은 몸을 단속하고 선정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 동시에 지혜가 나오도록 합니다. 계율이 수행의 근본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계가 양심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율은 헌법과 같은 것입니다. 제재가 가해집니다. 

계율은 계체(戒體), 계법(戒法), 계상(戒相), 계행(戒行)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계체는 계율의 근본입니다. 계법은 변하지 않는 법을 말하고 계상은 계율의 조목입니다. 계행은 계율을 행동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위의(威儀)는 예법에 맞게 위엄이 있는 엄숙한 태도나 몸가짐을 뜻합니다. 수행자들에게 중요한 위의는 계율 자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 수행의 근본인 계율이 중요한 것입니다. 계율은 부처님의 행입니다. 불행(佛行)이 곧 계율입니다.”

삼배를 올리기 무섭게 무관 스님은 계단의 역사와 계율의 의미, 계율의 체계 등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노트북을 펼칠 시간도 없이 시작된 말씀에 머리와 손과 발이 허공에서 허둥지둥 정신을 못 차렸다. 손님이 온다고 무관 스님이 미리 내려 보온병에 담아 두었던 따뜻한 차를 마시고 나서야 겨우 흩어졌던 마음을 모아낼 수 있었다.  

무관 스님이 정행당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무관 스님이 정행당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가 된다”

“지계와 함께 평소 수행 게을리 말고
3가지 장점 말하고 1가지 충고하라”
言事 바로 하는 것도 중요한 수행법

만행 납자에겐 “부처님 성지 순례를”
부처님의 생애 들여다보고 수행 점검
성지서 무엇을 실천할지 다짐해 보길


오대산과 가야산이 만나는 지점

무관 스님의 계율에 대한 관점은 확고했다. 부처님 수행이 계율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된 것처럼 사부대중의 정진 역시 확고한 계율관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율 경시의 시대’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말씀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님의 불교관, 수행관은 한국불교의 큰줄기에서 뻗어 나온 것이었다. 스님은 오대산에서 수행자가 됐다. 그리고 가야산에서 수행의 틀을 완성했다. 

“저는 5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해 13살에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집안 형편상 가지 못했어요. 그러다 절에 가면 고등학교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에 영어사전 하나 들고 입산을 하게 됐습니다. 1959년 음력 1월 12일에 아버지 제사를 모시고 일주일 뒤에 절에 왔습니다.”

고향 김제에 있는 작은 절로 간 스님은 향학열(向學熱)에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새벽에 일어나 도량석하고 염불하면서 자연스럽게 절 사람이 됐습니다. 3일 정도 지나 수행자가 되고 싶다 했더니 스님들께서 ‘너는 세속공부하러 오지 않았느냐?’고 물으셔요. 그래서 ‘공부가 크게 다르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려 정식 출가를 하게 됐습니다. 하하.”

스님은 공양주부터 했다. “아무 맛 없는” 밥을 척척(?) 해냈다. 어른스님들의 당부에 따라 8개월만에 금산사로 갔다. 또래의 행자가 30여 명 가량 됐다. 다시 시간이 흘러 예산 향천사를 거쳐 오대산에서 신심(信心)과 원력(願力)을 다졌다. 감자 서너 개에 쌀과 보리가 몇 알씩 얹혀 있던 밥을 먹는 일이 일상이었지만 오대산에서의 단련시간은 잊을 수 없다. 

얼마 뒤 스승 희섭 스님을 따라 화성 용주사로 갔다. 운허 스님과 탄허 스님을 모시고 무비, 성타, 월은, 송원, 주인 스님 등이 역경연수생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무관 스님은 원주로서 스님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했다. 

36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오대산으로 돌아와 상원사에서 탄허 스님에게 <서장>과 <선요>를, 그 후 다시 용주사로 가 월운 스님한테 <능엄경>을 배웠다.

“한암 스님과 그 상좌 보문 스님, 손상좌이자 저의 은사인 희섭 스님께 오대산의 가풍을 배웠습니다. 사숙이신 탄허 스님께도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한암 큰스님과 보문 노스님을 보면서 수행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은사 희섭 스님을 모시면서도 철저한 자기수행과 대중살림의 원칙 등을 면밀히 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내전(內典)을 마치기 위해 1971년 해인강원에 입학했다. 2년간 치열하게 공부한 뒤 강원을 졸업했고 지관 스님의 추천으로 해인강원 강사가 된 뒤에는 현대화된 강의법을 알아보고자 정규 고등학교 과정과 대학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동국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과정까지 공부했다. 정말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본격적인 공부의 과정에서 만난 어른들이 바로 자운 스님과 지관 스님이다. 
“종단의 대표적인 율사인 자운 큰스님은 스스로를 상참괴승(常慙愧僧)이라고 하셨어요. 부처님처럼 성불해 중생제도를 하지 못함을 창피해하면서 항상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부끄러운 줄 아는 참괴의 도리로 사셨어요. 큰스님은 여름에도 가사장삼을 수하고 3년간 국립도서관을 다니면서 사분율을 중심으로 오분율까지 직접 옮겨 쓰시면서 3년 동안 연구에 진력했습니다. 저 역시 출가자의 초심을 지켜주는 것이 계율이라는 생각이 들어 큰스님을 모시고 율을 공부했습니다. 이 인연으로 자운-지관 스님으로 이어지는 계맥(戒脈)을 잇게 됐습니다. 

자운 큰스님의 제자인 지관 스님은 말이 필요 없는 대강사이십니다. 1970년대 해인사에서 스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스님은 하루 두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경전을 비롯한 각종 내외전을 보시다가 밤 12시가 되면 독성각에서 108배를 하시고 잠깐 방에서 주무신 뒤 새벽 3시 예불에 나오셨습니다. 그전에도 그랬고 총무원장 소임을 보실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바로 <가산불교대사림>입니다. 스님의 ‘문자사리’가 곧 완성됩니다. 스님의 강맥(講脈)을 이은 저로서도 기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님의 말씀에는 오대산의 행(行)과 가야산의 향(香)이 묻어났다. 
 
부처님의 생애가 중요한 이유
스님은 말길을 다시 계율로 돌렸다. 
“법(法)은 삼수 변에 갈 거자로 이뤄져 있습니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법입니다. 법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변하지 않는 진리를 말합니다. 

마음이 안정되고 고정된 상태를 삼매라고 합니다. 수능엄삼매, 법화삼매, 해인삼매, 원각삼매 등 어떤 경전에든지 삼매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름은 달라도 삼매는 삼매입니다. 

사람들의 집착을 불교의 삼매로 전환시키는 것이 수행이고 계율입니다. 여기서 법은 시작됩니다. 탐욕을 떠나게 하는 가르침 가운데 가장 존귀한 것,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욕존(離欲尊)이라고 하는데 지혜와 자비를 말합니다. 이것을 갖추기 전까지 보살들이 수행을 합니다. 이 수행 역시 계율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계율을 잘 실천해야 마음안정이 이뤄지고 집중이 생겨 삼매를 증득할 수 있어요. 깨달음을 얻는 것과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출발선이 계율호지(戒律護持)에 있다는 것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스님은 이어서 보조국사 지눌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의 첫 구절을 설명했다. 자상한 말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부초심지인 수원리악우 친근현선 수오계십계등 선지지범개차(夫初心之人 須遠離惡友 親近賢善 受五戒十戒等 善知持犯開遮)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나쁜 벗을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라, 오계나 십계 등을 받아 계를 지켜야 하는데 어떤 경우에 계율을 어기고 범하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것이 좋고 나쁜 것인지를 알려면 부처님께서 계율을 만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본인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판단한 것을 기준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지눌 스님도 계율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이미 오래전에 정의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소중합니다.”

스님은 계율을 지키는 것과 함께 평소 수행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삼일수심천재보 백년탐물일조진.(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 스님은 “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가 되고, 백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에 티끌이 된다”며 수행을 통해 주인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소 불자들에게 법문을 하면 신심과 원력, 수행을 강조합니다. 이와 함께 언어의 사용에 대한 당부도 해요. 사람관계라는 것이 언어로 이루어지잖아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충고를 할 때는 적어도 장점 세 가지를 먼저 얘기하고 그다음에 한 가지를 고치면 좋겠다고 제안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기분 나쁘지 않게 알아듣고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작은 수행들이 모여 큰 수행이 완성됩니다.”

지난 주말 긴 동안거가 끝나고 수행자들은 만행을 떠났다. 스님은 결제와 해제가 따로 없다고 역설했다. 특히 부처님 생애를 공부하고 자기수행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해제하고 나면 보통 만행에 나섭니다. 평소 가보지 못한 곳을 찾기도 하고 국내외 성지도 갑니다. 저는 납자들에게 부처님 성지순례를 권합니다. 성지에서 부처님의 삶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면 좋겠습니다. 성지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것을 실천할 것인지 다짐해 보기를 바랍니다. 성지에 갈 여력이 안 된다면 부처님 전기를 다시 읽어봐도 좋습니다.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을 보기만 해도 신심이 다시 샘솟을 것입니다.”

아침 일찍 시작된 인터뷰는 점심 공양 후에도 한참 동안 이어졌다. 해인율원 문을 나서는데 성철 스님이 율원을 만들 때 내려줬다는 ‘정행당(淨行堂)’ 글씨가 보인다. 어른스님이 솔선해서 보여주는 ‘정행’에 율원 학인스님 10명은 물론 가야산 대중 전체가 청정한 수행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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