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혹한 시대, ‘求道영화’로 넘다

대표 불교영화 ‘만다라’, ‘달마가…’
불교 구도심 담긴 대표적인 고전 
해외 영화제서 수상… 불교 알려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영화 중 하나인 〈만다라〉의 한 장면.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영화 중 하나인 〈만다라〉의 한 장면.

한국영화 100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가운데서 반드시 꼽히는 불교영화라면 특히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와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이 꼽힌다.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이 만든 〈만다라〉는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두 사람의 협업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작품으로 꼽힌다. 수행자로서 겪게 되는 번뇌와 만행의 과정에서 계율로 자신을 다스리려는 법운 스님(안성기 분)이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무애한 해탈의 길을 구하는 지산 스님(전무송 분)과 맞닥뜨리며 품게 되는 고뇌를 영화는 법문이 아니라 영상으로 풀어낸다.

영화 시스템 밖에서 배용균 감독이 구도하듯 만든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한국영화 역사상 최초의 1인 제작 방식의 영화이자 그 시도가 불교영화이자 예술영화의 성취를 이룬 걸작이다. 1989년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3등상을 받을 당시 이 영화가 대상을 수상했던 일화는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자주 언급된다. 젊은스님 기봉의 간절한 구도자적 번뇌와 수행을 독창적인 철학과 미학으로 담아낸 이 영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두 작품 모두 ‘달마’와 ‘만다라’라는 제목에서부터 불교적 작품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만큼 오락과 여흥을 앞세운 작품이 아니라서 아무 때고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영화들이 아니지만 불교 영화로서만이 아니라 작품 자체로 한국영화사뿐 아니라 세계영화사에 빛나는 작품들이다.

시대적으로 이 두 작품 모두 1980년대 작품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정치적으로 어두웠던 시기인 유신 시대부터 5공화국 내내 검열이 일상이었던 시기인 1981년에 발표된 〈만다라〉에 대해 아시아 최초로 촬영감독으로서 회고전의 주인공이 된 정일성 촬영감독은 “어두운 시대에 더 어두운 영화를 통해서 저항했었다”고 밝히고 있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내가 직장암 수술 후 병원에 있을 때 임권택 감독이 소설 〈만다라〉 소설을 갖고 왔다.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장소 헌팅에 나섰다”며 “〈만다라〉는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찍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영화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만다라〉 크랭크인 날짜가 전두환 전 대통령 취임식 날짜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 취임식을 본 후 저항심이 들었다. 그래서 임권택 감독에게 ‘이번 작품은 로우키(조명을 어둡게 하는 것)로 찍고 싶다’고 말했다. 임권택 감독도 흔쾌히 허락하더라”라고 했다. 현실의 억압을 영화의 미학으로 어떻게 극복해왔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당대 최고의 감독들과 수없이 많은 작업을 해오며 한국영화의 촬영 미학을 이끄는 선구자 역할을 해왔던 정일성 촬영감독이 검열을 넘어서기 위한 저항의 방식이 바로 〈만다라〉의 어두운 영상인 것이다. 이렇게 검열을 피하면서도 시대적 억압을 불가의 고뇌에 담은 〈만다라〉는 개봉 당시 대종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한 7개 부분에서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진출해 한국의 영화와 불교를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우리가 영화 〈만다라〉를 보면서 소설과 영화, 그리고 시대를 관통하는 ‘만다라’에 대해 조금은 깨우침을 얻게 되는 것은 작품이 거쳐 온 내력에도 담겨있다. 영화 〈만다라〉의 원작인 소설 〈만다라〉를 쓴 김성동 작가는 열아홉에 입산해 여러 선방과 토굴에서 정진하던 승려였다. 1974년 〈주간종교〉의 종교 소설 현상 공모에서 단편 소설 〈목탁조(木鐸鳥)〉가 당선되었을 당시, “악의적으로 불교계를 비방하고 전체 승려를 모독했다”는 오해 속에 김성동은 승적을 박탈당하고 나서 쓴 중편 소설이 〈만다라〉이다. 1978년에 〈한국문학〉 신인 문학상에 당선되면서 김성동은 본격적으로 소설가로 활동하게 됐다. 이 소설이 당대 최고의 감독 임권택을 만나고 임권택 감독이 가장 신뢰하는 촬영감독 정성일과 함께 영상으로 옮긴 영화 자체가 고도 ‘만다라’인 것이다.

‘만다라’는 범어로 Mandala라고 한다. Manda는 ‘진수’ 또는 ‘본질’이라는 뜻이며 접속어미 la는 ‘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만다라의 본래 의미는 본질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변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불화를 뜻한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불안하고 예민한 시기에 불가에 입문한 불자가 득도하기 위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뇌와 방황을 통해 진정한 도는 지식이나 수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깨달음을 그린 이 작품은 당시 타락한 사찰 불교를 비판하는 시각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인간의 본질적 삶, 존재의 문제를 가장 치열한 세속과 출가의 경계를 통해 다루는 불교 문학의 수작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배용균 감독의 영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한장면.
배용균 감독의 영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한장면.

또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87년 6월 항쟁 이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다양한 시도로 드러나던 1989년에 발표됐으나 당시 동국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배용균 작가가 기획 8년, 제작 4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혼자 제작, 연출, 각본, 촬영, 미술, 편집, 조명 등 영화 제작의 모든 과정을 도맡아 국내 개봉이 아니라 해외영화제 수상을 통해 알려진 작품이다. 

영화사 설립을 허가제로 통제하던 시기에 개인으로서의 작가가 표현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길고 긴 인고의 시간을 거쳐 나온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한국영화 역사상 전대미문의 시도이자 예외적 미학의 성취를 이루면서 1989년 제4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는 실력 있는 신인감독의 작품을 소개하는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었고, 이어서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대상인 황금표범상을 비롯해 국제기자협회상, 기독교평론가상, 청년비평가상 등 특별상까지 석권하면서 한국영화와 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큰 계기가 되었다. 또한 수상 이듬해인 1990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봉한 것은 당시까지 한국영화가 상업적인 기반으로 프랑스 파리 시중극장에서 개봉하게 된 첫 사례였다. 

배용균 감독은 1981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 1985년 촬영을 시작했고, 4년 동안 작업 끝에 영화를 완성했는데, 각본과 연출은 물론 촬영, 조명, 미술, 편집에 이르기까지 당시 제도권 영화계가 해온 제작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1인 독립 제작’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또한 기성배우들이 아니라 연기 경험이 없는 일반인들을 캐스팅해서 그때까지만 해도 집단작업으로서만 가능했던 영화예술을 개인적인 창작차원으로 끌어들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제작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영화는 상영시간 2시간15분 내내 심오한 불교 철학, 구도의 자세뿐 아니라 한국적인 영상미의 극치로도 평가받으면서 “감독의 구도자적 자세로 인해 영화의 모든 장면이 하나의 시이자 그림이며 침묵이 된다”(‘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이세기)는 평가와 더불어 이후 한국 독립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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