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붓다가 보여준 존엄한 죽음 (2)

사랑하는 이 떠나보낸다는 상실감
슬픔보다 완성으로 관점 돌려봐야

지원(가명) 씨는 14년간 이어 온 남편의 병간호로 지쳐있었다. 평소 사람을 좋아해 친구를 사귀고 여행을 즐기던 지원 씨였지만 오랜 병간호로 더 이상 만날 친구도 없었고, 자신만을 찾는 남편의 고함소리에 외출은 쉽지 않았다. 요양병원에 보내라는 자식들의 권유를 들을 때면 화가 치밀고 남편과 함께 죽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상담실을 찾았다. 남편은 모야모야병을 앓고 있었고 뇌출혈로 쓰러졌다. 다행히 일찍 발견했지만 재발했고 병간호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낫는다는 희망마저도 이젠 사라졌다”며 눈물을 흘리던 지원 씨는 “그래도 그를 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죽음을 맞아야 하는 환자 당사자도 너무나 괴롭겠지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가족들도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을 건너야 한다. 가족들은 폐허가 될 것 같은 자신의 남은 삶이 두려워 떠날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곤두박질칠 자신의 삶을 붙들 듯이 환자의 마지막 임종을 붙드는 모습이다. 그래서 임종자의 가족들은 지원 씨처럼 남편의 회생을 기대하며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오직 기적을 기대하며 환자의 연명치료를 이어가기도 한다.

‘안락사’는 윤리적 문제로 쉽게 결정하기엔 어려운 주제다. 안락사라는 용어는 17세기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최초로 사용했다. 이후 1935년에 미국에서 ‘자발적 안락사의 입법화를 위한 단체’가 결성되고 꾸준히 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장애를 가진 신생아에게 안락사를 시행해 윤리적인 문제가 다시 대두됐다. 안락사는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적 문제를 이끌 것이란 우려를 비롯해 자살과의 모호한 경계, 안락사 오용 문제에 어렵게 답을 제시하며 발전했고, 현재도 반대파의 다양한 주장들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죽을 권리’와 ‘생명을 이어갈 권리’라는 팽팽한 논쟁을 이어가고 있지만 모두가 두말없이 우선 합의하는 것은 ‘웰다잉(well dying)’이다. 죽는다는 사실은 반박할 수 없고 잘 죽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실존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안락사의 역사 가운데 자살기계 ‘타나트론(Thanatron)’을 발명한 잭 케보키언(Jack Kevorkian, 1928~2011)은 죽음의 의사로 불렸다. 그는 1980년대에 죽을 권리를 주장해 화제의 인물이 되었고 실제 말기 환자들이 죽음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가 발명한 타나트론은 3개의 병에 생리식염수, 진통제, 치사량의 염화칼륨이 순서대로 담긴 장치였다. 환자들은 타나트론을 이용해 스스로 약물을 주입하고 고통 없이 삶을 마무리했다. 케보키언은 이어 일산화탄소를 흡입해 죽음에 이르는 ‘머시트론(Mercitron)’을 개발했다. 해석하면 ‘자비의 기계’다.

자비의 기계라고 명명한 것은 죽음이라는 인식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죽음은 불행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란 메시지를 전달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며 보편적인 진리다. 삶의 필연적 대가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열반 전에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준다. 붓다는 춘다의 공양을 그 어떤 공양보다도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그가 올린 버섯요리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아셨지만 망설임이 없으셨다.

책 〈고타마 붓다의 생애〉에서 춘다가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을 올린 장면이 나온다. 부처님은 춘다가 준비한 음식 가운데 버섯요리를 드셨고, 다른 제자들은 그 음식을 먹지 못하게 춘다에게 버리라고 지시했다. 버섯요리를 먹은 후 붓다는 심한 병에 걸렸고 날카롭고 극심한 통증으로 괴로워했다. 이후 붓다는 큰 공덕이 있는 음식에 대해 아난다에게 설하며 괴로워할 춘다에게 전달할 말을 당부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받은 공양’과 ‘공양을 받은 후 열반에 들게 되는 음식’이 그 어떤 공양보다 뛰어나며 공덕이 같다고 했다. 깨달음 이후가 깨어있는 삶의 시작이라면 열반은 삶의 완성이다.

열반에 앞서 아난다는 붓다에게 참배해야 할 성지에 대해 질문한다. 붓다는 믿음이 깊은 사람이 경배해야 할 장소로 ‘붓다가 태어난 곳’ ‘깨달음을 이룬 곳’ ‘법을 처음으로 가르친 곳’, 마지막으로 ‘열반에 든 곳’이라고 했다. 이것은 태어남과 성장처럼 죽음도 받아들여야 할 삶의 부분이란 뜻일 것이다.

분명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으로 인해 사라지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다. 하지만 붓다는 슬픈 죽음에 대해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과정으로 보여주셨다. 붓다의 열반을 지켜보며 슬퍼 울고 있던 아난다에게 붓다는 말했다.

“슬퍼하지 말라. 우리는 가깝고 친숙한 모든 것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여러 번 말하지 않았느냐. 무엇이든 발생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 그러니 생긴 것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느냐? 그런 것은 없다.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흩어지게 되어 있다.”

죽음을 슬픔의 사건으로 볼 것이 아닌 인생의 종결을 맞이하는 안식이자, 완성의 미학으로 관점을 돌려야 하는 이유다.

*사례는 내담자 보호를 위해 취지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재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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