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치악산 구룡사

구렁이 먹잇감 된 꿩 살린 스님
꿩 대신해 구렁이 먹이로 잡혀
구렁이 몸 벗을 종소리 요구에
꿩 두 마리가 목숨 바쳐 타종

겨울철 흰 눈에 뒤덮인 비로봉 미륵불탑.
겨울철 흰 눈에 뒤덮인 비로봉 미륵불탑.

정상에 홀로 세운 돌탑 셋
산행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처음 치악산을 오르면, 대부분은 ‘진짜 이름 그대로 치가 떨리고 악이 바친다는 말이 맞구나’ 생각하게 된다. 치악산의 주능선은 북쪽 비로봉(1282m)에서 남쪽의 남대봉(1182m)까지 10㎞ 정도며, 설악산, 월악산과 함께 3대 악산으로 꼽힌다. 특히 치악산은 당일 산행만 허용할 만큼 험하다.

어느 해 겨울 치악산 능선을 종주하고 비로봉에서 하산할 때였다. 비로봉 바로 아래 산장 직원은 우리의 늦은 하산길이 걱정되어 그곳에서 묵기를 청하였다. 비로봉 아래에서 하룻밤이라, 조심스럽고 설레는 마음에 하루 묵기로 하였다. 직원은 따뜻한 차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무엇보다 비로봉 정상에 있는 세 돌탑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뒤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자료를 찾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원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용창중(일명 용진수) 씨 꿈에 산신령이 나타났다. 산신령은 그에게 혼자서 비로봉 정상에 3년 안에 3기의 돌탑을 쌓도록 했다. 이에 용 씨는 비로봉 아래 토굴을 짓고 부지런히 돌탑을 쌓기 시작하였다. 1962년 9월부터 쌓기 시작한 탑은 1964년에 이르러 돌탑 셋으로 완성되었다. 1967년과 1972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너졌고 그해마다 용 씨가 복원하였다. 1994년 이후에도 세 차례 무너져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 복원하였다. 현재 비로봉에는 용왕탑, 산신탑, 칠성탑 등 3기의 미륵불탑이 있다.

어떤 바람으로 돌탑을 쌓았는지, 그 공덕으로 어떤 감응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개인의 삶을 위해서인지,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인지 모르지만, 비로봉을 오른 이들은 미륵돌탑에 예를 올리며 힘겹게 올라온 정성을 저마다의 바람으로 회향할 것이다.

상원사 범종각. 자신들을 구해준 스님을 위해 꿩 두 마리가 목숨 바쳐 대신 종을 울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상원사 범종각. 자신들을 구해준 스님을 위해 꿩 두 마리가 목숨 바쳐 대신 종을 울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범종 울려 스님을 구하다
치악산의 옛 이름은 적악산(赤嶽山)이다. 단풍이 들면 산 전체가 붉게 변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지금의 치악산으로 바뀐 연유는 남대봉 아래 상원사 범종 전설과 관련 있다. 그 전설은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스님이 치악산의 울창한 숲길을 걷던 중 숲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살펴보니 구렁이가 꿩 두 마리를 몸으로 감고 있었다. 스님은 살려고 몸부림치는 꿩들이 불쌍해 보였다. 그리곤 재빨리 지팡이로 구렁이를 쫓아 꿩들을 구해주었다. 그날 저녁, 스님은 폐사 직전의 구룡사에 도착하여 깊이 잠들었다. 한밤중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혀 눈을 떴다. 구렁이가 스님의 몸을 감고 삼킬 듯이 말하였다.

“네놈이 나의 밥을 먹지 못하게 하였으니, 너라도 대신 잡아먹겠다.”

스님은 당황하지 않고 말하였다.

“그대가 사람의 말을 할 줄 하는 것을 보니, 다른 짐승과 달리 전생의 선근이 매우 깊은가 보다.”

“그렇다. 나도 전생에 대장부의 몸을 가진 사람이었다. 성낼 일이 아닌데 사람들이 놀려 크게 성을 내어 지금의 뱀 몸을 받았다. 배가 너무 고파 꿩이라도 한 마리 잡아먹으려 하였는데.”

“그렇다면 어서 나를 잡아먹어 너의 배를 채워라. 나는 기꺼이 몸을 보시하겠다.”

“스님이 아니었다면 벌써 잡아먹었다. 나는 이 구렁이 몸이 싫다. 이 몸을 벗어나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대가 나를 위해 그렇게 해준다면 살려주겠다. 날이 새기 전에 종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나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스님은 막막하였다. 구룡사는 폐사에 가깝고, 종이 있는 절이라고는 산 위로 30리 길에 있는 상원사뿐이었다. 스님은 부처님 뜻에 맡기고 염불하였다. 새벽 세 시가 되자 멀리서 종소리가 들렸다. “땡∽땡∽.” 딱 두 번의 종소리였다. 구렁이는 스님을 풀어주고, 마지막 말을 남기며 숨을 거두었다.

“스님, 고맙습니다. 저는 두 번의 종소리를 듣고 이제 구렁이의 몸을 벗어 하늘에 태어납니다. 스님께서 이 몸을 화장해주시고, 이 이야기를 교훈이 되도록 전해주십시오.”

화장을 마친 후 스님은 상원사로 올라갔다. 상원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범종각 범종 밑에는 머리가 깨져 죽은 두 마리 꿩만 있었다. 스님이 살려준 꿩이었다. 스님은 꿩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산하였다.

그리하여 적악산(赤嶽山)에서 ‘꿩 치(雉)’자를 사용하여 치악산(雉嶽山)이 되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꿩의 보은 전설로 인하여 범종을 치기 전에 가볍게 두 번 치는 전통이 생겼다. 불교의식집인 <석문의범>에는 ‘여기에는 치악산 암수 꿩의 보은 전설이 있다(此有雉岳山 雌雄雉 報恩傳說)’며 새벽종을 치는 의미를 전한다.

이 이야기는 꿩 대신 까치, 백로 등으로, 스님 대신 선비, 한량, 포수, 나무꾼, 학동 등 여러 변형으로 전해진다. 다양한 변형은 새로운 이야기를 던져주기에 흥미롭다.

절 이름에 거북과 용을 넣다
비로봉(1282m)과 상원사(1100m)는 높은 곳에 자리하여 마음먹고 올라야 한다. 반면에 구룡사는 명상하듯이 계곡을 옆에 끼고 평평한 숲속 길을 걸으면 나타난다. 그 길은 편할 뿐만 아니라 비로봉으로 가는 등산로와 중복되므로 주말에는 많은 사람이 오간다. 세렴폭포까지는 걷기 좋은 길이라 추천하는 바다.

구룡사 절터는 원래 깊은 못으로서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 의상 스님(625∼702)이 못을 메우고 절을 지으려 하였다. 용들은 이를 막기 위하여 벼락을 치고 우박 같은 비를 내려 산을 물에 잠기게 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비로봉과 천지봉을 밧줄로 연결하여 배를 매어놓고 배 위에서 낮잠을 즐겼다. 용들은 지금쯤 스님이 물에 잠겨 죽었다고 생각하며 비를 멈추었다.

이때 스님은 잠에서 깨어나 한 장의 부적을 그려 못에 넣었다. 이윽고 물은 뜨겁게 끓기 시작하였다. 참지 못한 용들은 물속에서 뛰쳐나와 동해로 달아났다. 그런데 한 마리는 눈이 멀어서 달아나지 못하고 절 위쪽의 구룡폭포 아래 용소에 숨어들었다. 그 뒤 의상 스님은 못을 메우고 절을 창건하였다.

한편 동해로 달아난 여덟 마리 용은 정신없이 도망치느라고 구룡산 앞산을 여덟 개로 쪼개놓았다. 지금도 구룡사에서 동해로 향한 능선은 여덟 골짜기로 되어있다.

그리하여 초기에는 아홉 구(九)를 써서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고 한다. 또는 절 주변의 지형과 처음 이름이 구룡사(九龍寺)였던 것과 관련하여 이러한 창건 설화가 생겼다고 본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용과 관련된 창건 설화는 경남 양산 통도사, 전남 장흥 보림사 등 여러 사찰에 있다. 그런데 설화나 전설은 그냥 상상의 경우도 있지만, 그때 상황을 나타낸 은유의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때 용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무렵, 불교에 텃세를 부린 기존 세력으로 본다. 기존 세력과 대립 속에서 기존 세력은 약해지고 불교는 지역에 자리 잡은 모습이 전설로 전해진다.

구룡사는 도선국사·무학대사·서산대사 등 여러 고승이 수행하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런데 조선 중기 이후 차츰 사세가 기울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시오.”

간절한 마음에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다. 그러나 오히려 절이 더 힘들어졌고 폐사에 직면하였다. 그때 도승이 나타나 말하였다.

“절의 운을 지켜주는 거북바위의 혈맥을 끊어서 절이 쇠락해졌습니다. 거북을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아홉 ‘九’자 대신 거북 ‘龜’자를 쓰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사찰의 이름을 龜龍寺(구룡사)로 바꾸었다. 절 이름이 九龍寺(구룡사)에서 龜龍寺(구룡사)로 바뀐 사연도 사찰과 관련된 그 시대 상황을 은유한 이야기가 아닐까. 어떤 일이 있었을까. 궁금하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