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석산, 경주 남산 불국정토의 시작점

신라에 불교 공인된 7세기 초반
산 정상, 불국토로 만든 첫 사례
단석산 마애불상군, 남산 이어져

사진 1. 향로를 든 인물상
사진 1. 향로를 든 인물상

단석산은 김유신이 화랑으로 있을 때 정상 부근의 바위를 칼로 내려쳐서 갈라놓았다는 유래가 전한다. 뭐 이 정도는 나중에 알았던 유래일 뿐 관심사는 아니었다. 내가 단석산에 오른 이유는 아주 특별한, 지금은 사라진 불교 예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중 손에 들고 다니는 휴대용 향로의 모습 때문이다. 

마애불상군은 바위 면을 깨거나 파서 불상과 보살상 등을 새겨 놓은 곳을 말한다. 이 중 신선사 마애불상군에는 신도가 부처님을 뵈러 갈 때 향로를 들고 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지금 한국불교 예식에서는 사라진 향로를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08년 군위 인각사 부도탑 자리 지하에서 발견된 향로를 보면 휴대용 향로의 원형을 알 수 있다.(사진①,②)

사진 2. 군위인각사출토향로
사진 2. 군위인각사출토향로

마애불상군 북쪽 면에 두 인물상이 있다. 두 인물상을 처음 볼 때 어릴 적 만화에서 보았던 스머프가 생각났다. 머리에는 고깔모자를 쏘고 바지는 펑퍼짐하게 입고 있다. 특히나 신발은 앞 코가 뾰족하게 솟아난 것이 완전 스머프의 모습 같았다. ‘신라 남성들은 바지를 이렇게 입었을까?’ 아하 하며 예전 경주 국립박물관의 이차돈 순교비가 생각났다. 순교비의 이차돈도 항아리 바지 같은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신라인들은 스머프 모자에 항아리 바지를 입고 있었구나. 상상해보니 웃음이 절로 나오는 모습이다. 두 인물상 중 오른쪽 앞의 인물이 더 큰 것으로 보아 높은 신분의 사람이다. 앞의 인물이 휴대용 향로를 들고 있고, 뒤의 인물은 지금은 알 수 없는 신성한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것 같다. 성지순례를 다닐 때 맨 앞에 스님이 서서 휴대용 향로를 들고 향을 피우고 부처님을 참배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혹시 중국이나 일본 아니면 베트남의 절에 가면 한국과 다른 점을 본 적이 있는가 싶다. 바로 법당 앞마당에 있는 큰 향로다. 우리 한국의 절은 법당 안의 부처님 불단 앞에만 향로가 있다. 그러나 한국 외의 모든 나라 사찰들은 법당 밖에 향을 피울 수 있는 큰 향로가 마련돼 있다. 왜 우리는 마당의 향로가 사라졌을까? 신라와 고려시대까지 우리 한국의 사찰에도 법당 밖에 큰 향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지금 한국 사찰에 법당 밖의 향로가 사라진 이유는 조선시대에 돈 되는 청동이나 놋쇠로 만든 큰 향로를 권력자들이 모두 가져갔기 때문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석탑이나 석등 주위의 배례석(拜禮石)은 향로의 기단 자리로 추정된다. 경남 창령에 있던 인양사에는 신라시대 771년부터 810년까지 40여 년간 불사하던 과정을 적어놓은 비문이 있다. 이 비문에 보면 782년 정례석(頂禮石)을 조성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배례나 정례는 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절을 하는 돌이란 지금의 배례석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것이 예법이다. 법당에서 부처님께 절을 할 때 향을 먼저 피우고 절을 해야 예법에 맞는 것이다. 즉 불교에서 배례란 향을 피우는 의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배례석이 향로 자리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조선 500년의 숭유억불은 많은 불교문화를 사라지게 했다. 흔적은 남았지만 어떤 법회에 어떻게 사용했는지 모르는 문화재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사찰의 박물관이나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는 불연이 있다. 분명 가마인데 사람이 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성물을 가마에 얹어 놓고 이동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어떤 법회에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남아서 전래는 되었지만 알 수 없다. 

이러한 것이 또 있다. 사찰의 큰 법당 뒤에 하나씩은 있는 구시이다. 구시는 구유의 사투리라고 한다. 구유는 소나 말의 여물통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것은 댑싸리나무로 만들었다고 전하는 송광사의 비싸리구시가 있다. 화엄사에도 길이가 7m나 되는 큰 구시가 있다. 전에는 대웅전 뒤에 있었는데 지금은 화엄사 성보박물관 앞뜰에 있다. 화엄사 구시를 소개하는 글에 정유재란 때 승병에게 밥을 해서 담았던 그릇이라고 전한다. 급한 전쟁기에 여럿이 서거나 앉아서 밥을 빨리 먹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근대에 누군가 상상한 이야기다. 전쟁기에 만든 구시일 리가 없다. 만드는 공력에 비해 활용도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급하면 주먹밥으로 만들어 먹으면 되지 구시에 담아서 먹을 이유도 없다. 무언가 중요한 역할을 하던 물건인데 정확하게 어떤 용도인지는 모르고 있다. 종이를 만들 때 사용하던 용도라고도 하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사진 3. 단석산 마애불상군 정면 관세음보살
사진 3. 단석산 마애불상군 정면 관세음보살

신선사 마애불상군은 경주 남산의 탑곡 마애불상군과 더불어 옛 신라인의 신행 생활 전반의 불교문화를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다. 7세기 조성된 신선사 마애불상군은 최초의 석굴 사원이기도 하다. 그런데 접근하기가 너무 어렵다.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전용 주차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인터넷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차를 어찌어찌 세워놓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정말 죽을 둥 살 둥 올랐다. 그런데 내려올 땐 완전 다른 극락세계 입구를 맛보았다. 다시 또 가볼까 싶을 정도로 접근성이 어렵고 힘든 곳이다. 이런 곳에 신라인들은 불국정토를 조성해 놓은 것이다. 다가가기 힘들기에 성스러운 불국정토를 세울 곳으로 생각했을까?

(사진③)마애불상군은 ‘ㄷ’자 모양이다. 입구는 서쪽이 되고 정면으로 들어서서 보이는 관세음보살님은 동쪽에 새겨져 있다. 보관을 쓰고 있지 않아서 얼핏 보면 부처님이 서 계신 것 같지만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계신 관세음보살님이다. 북쪽에는 본존불인 미륵부처님께서 왼손은 밑으로 오른손은 위로 손바닥을 보이는 시무외인과 여법인의 수인을 하고 서 있다. 미륵부처님 정면인 남쪽에는 지장보살 입상이 연화대에 서 있다. 바로 이 지장보살상 근처 조성기에 신선사에 미륵불상과 2구의 보살상을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사진④)

사진 4. 단석산 마애불상군 미륵본존불
사진 4. 단석산 마애불상군 미륵본존불

미륵 본존불 왼편 큰 바위의 아래에는 앞서 보았던 두 명의 공양인물상이 새겨져 있고, 두 공양인물상 왼쪽 밑에는 작은 부처님 입상이 새겨져 있다. 공양인물상 바로 위에는 세 분의 부처님이 오른쪽을 향하여 손짓하면서 참배를 온 중생들을 인도하고 있다. 여기서 손짓에 대한 해석으로 거의 모든 설명들은 본존불인 미륵부처님을 향한다고 쓰여진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 보이지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옆에 앉아서 생각하고 있는 부처님께 손짓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성기의 내용을 보았을 때 미륵본존불과 서 있는 두 보살상은 신선사를 창건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확인이 된다. 그렇기에 손짓하는 마애부처님과 앉아있는 반가사유상은 창건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반가사유는 다음 세상에 중생을 어떻게 구제할까 고민하는 모습이다. 신라인들이 꿈꾸는 불국정토를 이룩해줄 사유하는 미래의 부처님께 삼세의 부처님들이 인도하시는 손짓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사진⑤)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은 불교가 공인된 이후 7세기 초반 산 정상에 최초로 조성된 불국정토의 세상이다. 불국정토는 부처님과 출가 수행자와 신도의 신행 생활이 펼쳐져 있는 불교문화 전반이며 부처님 세상을 의미한다. 이제 전 세계 유일한 산 전체를 불국정토로 꾸며놓은 경주 남산으로 가보자. 단석산 정상의 바위에서 시작된 불국정토가 남산의 산 전체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사진 5. 손짓하는 세분의 부처님과 반가사유부처님
사진 5. 손짓하는 세분의 부처님과 반가사유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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