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돕는 게 나를 돕는 길…진정한 보살 돼라”

“우리 삶은 무생, 한바탕 꿈 같아
두륜산 대흥사엔 생로병사 윤회를 
끊는 할과 방의 확철대오가 있다”

천운 스님 인연으로 佛門에 들어
선지식들에게 ‘이뭣고’ 화두 받고
지금도 수좌들과 매일 수행 정진

상월 보선 대종사는… 1966년 용암사서 천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2년 통도사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문경 봉암사와 순천 송광사, 양산 통도사, 해남 대흥사 등에서 오랜시간 수선안거했다. 총무원 호법부장, 대흥사 주지, 제14·15대 중앙종회의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대흥사 조실로서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상월 보선 대종사는… 1966년 용암사서 천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2년 통도사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문경 봉암사와 순천 송광사, 양산 통도사, 해남 대흥사 등에서 오랜시간 수선안거했다. 총무원 호법부장, 대흥사 주지, 제14·15대 중앙종회의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대흥사 조실로서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남도를 대표하는 두륜산은 영축산과 흡사하다. 두륜산 정상에 누워 계신 부처님과 영축산을 지키는 적멸보궁이 다르지 않다. 그 앞에만 서면 얼었던 마음이 풀리고 만다. 넓은 품으로 중생들의 마음을 쉬게 하는 것도 똑같다.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 될 것이다.”

서산 대사의 말씀과 같이 두륜산과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법맥을 올곧게 이어가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서산 대사의 의발이 전수된 뒤 수많은 수행자를 배출한 명찰인 대흥사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선해교림(禪海敎林) 면모를 갖춘 도량으로 발전해왔다. 

“대흥사만한 곳이 없습니다”
넓은 산간분지에 자리한 대흥사는 다른 절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가람 배치를 보이고 있다. 절을 가로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당우들을 자유롭게 배치했다. 또 서산 대사 추모공간인 표충사가 있는 별원구역까지 크게 세 영역에 전각들이 들어서 있다. 

오랜만에 대흥사를 찾은 만큼 대웅보전과 천불전 등을 참배하고 조실 상월 보선 대종사(조계종 원로회의 수석부의장)의 주석처인 염화실(拈花室)로 향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보여주는 보선 스님은 “두륜산과 대흥사만큼 좋은 곳이 없다. 사계절 내내 그렇다. 비가 와도 좋고 눈이 와도 좋고 바람이 불어도 좋은 곳이 대흥사”라며 먼저 당신이 손수 지은 글을 내밀었다.  

“두륜의 기개는 남도의 하늘과 땅을 휘젓고 중생의 번뇌와 고통을 잠재웁니다. 두륜의 종주(宗主)인 청허 휴정(淸虛休靜) 선사께서는 대흥사에 주석하며 무상한 깨달음의 노래를 중생에게 남기셨습니다.

낮이면 한 잔의 차요, 밤들면 한바탕의 잠일세. 청산과 백운이 함께 무생(無生)을 이야기하네.

청허 휴정 선사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삶은 무생입니다. 그리고 한바탕 꿈과 같습니다. 오늘의 모습도 내 모습이 아니고 내일의 모습도 내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생로병사의 무진행의 고통 속에서 영원히 윤회합니다. 두륜산 대흥사에는 생로병사의 윤회를 끊는 할과 방의 확철대오가 있습니다.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의 선향(禪香)과 법향(法香)과 다향(茶香)이 머물고 있는 두륜의 품은 길 없는 길을 걷는 모든 중생들이 번다한 세속의 때를 씻을 수 있고 영원한 무생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무생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80년 뒤에는 내가 저것입니다.”

오래 기다린 값인가? 스님의 첫 말씀부터가 심상치 않다. 이럴수록 필요한 것은 정면돌파였다. 

“서산가풍이 활발발한 도량으로”
보선 스님은 다시 ‘서산가풍’을 강조했다. 

“서산 대사의 의발이 전해진 것은 이곳이 당신의 법(法)을 이을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사께서 묘향산에서 열반에 들기 전 제자들을 불러놓고 강조하고 강조했던 내용입니다. 불교가 가장 어려웠던 때인 조선시대에도 수행가풍이 살아 있었습니다. 정조 대왕이 이를 알고 대흥사에 표충사를 짓고 서산 대사의 가르침이 널리 전해지도록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저의 은사이신 천운 큰스님께서 대흥사의 가풍을 다시 정립하셨습니다.”

보선 스님은 천운 스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신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천운 스님의 법을 이은 것도 당연했다. 천운 스님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보선 스님의 수행여정은 시작됐다. 

“제 고향이 전남 영암입니다. 광주로 고등학교를 갔어요. 학기 중에는 학교에 다니고 방학 때는 내려와 고향집에서 지냈습니다. 방학이 되어 집에 가면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 바빴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보냈더니 보다 못한 형님이 하루는 저를 불러요. ‘도갑사에 큰스님이 계시는데 인사드리러 가자.’ 형님이 은사스님과 인연이 있었거든요. 저는 좋다고 했어요. 초등학교 때는 도갑사로 소풍을 갔고 중학교 때는 큰 트럭을 타고 대흥사로 수행여행을 와서 절이 친숙했거든요.”

그렇게 보선 스님은 형님과 함께 도갑사로 갔다. 도갑사에서 평생의 스승 천운 스님을 만났다. 

“은사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도인이 여기 계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고승(高僧)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때는 굉장히 젊으실 때였는데도 안광(眼光)이 대단했습니다. 형님이 은사스님께 ‘이놈이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하니 스님께서 좀 잡아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하고는 집에 가버렸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허허’ 웃으시더니 미륵전에 있던 방을 하나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좋은 방이었습니다.”

그렇게 보선 스님의 ‘절 생활’이 시작됐다. “나름 익숙해서” 절에서의 생활은 어렵지 않았다. 

“은사스님께 원칙이 하나 있었습니다. 3일 이상 절에 머물면 무조건 삭발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당연하게’ 깎았어요. 어색하지 않았거든요.”

스님은 한 달 동안 그렇게 첫 ‘절 생활’을 했다.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다 방학이면 도갑사로 가는 생활이 이어졌다. 여느 때와 같이 절에서 생활을 하던 고2 여름방학 때 천운 스님이 스님을 호출했다. 

“계(戒)를 받아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스님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라.” “스님 되는 것은 싫습니다.” “그럼 우선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생활하거라. 사미십계는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을 마시지 말라, 꽃다발을 갖지 말고 향수를 몸에 바르지 말라, 노래하고 춤추고 풍류재비 하지 말며 가서 보고 듣지도 말라,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지 말라, 때 아닌 때에 먹지 말라, 돈과 금은보물을 갖지 말라 등이다. 만약 출가를 하지 않고 일반인으로 살게 되면 앞의 5계만 지켜도 된다.” “그럼 받겠습니다.”

출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스님은 넙죽 사미십계를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스님은 자연스럽게 출가했다. 도갑사에서 수행을 시작한 스님은 화순 용암사에서 천운 스님을 계사로 다시 정식으로 사미계를 받았다. 1966년 3월의 일이다. 

“은사스님께서는 평생 수행과 교육과 복지에 심혈을 기울이셨고 특히 계율(戒律)을 잘 지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계율이 수행자의 생명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항상 부처님의 칠불통계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즉, 모든 악한 일을 짓지 말고 온갖 선한 일을 찾아 행하며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를 명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사스님의 말씀을 새기고 행하려고 저 역시 노력하고 있습니다.”

화두 참선 중인 보선 스님. 스님은 새벽 3시면 일어나 수좌들과 함께 정진한다.
화두 참선 중인 보선 스님. 스님은 새벽 3시면 일어나 수좌들과 함께 정진한다.

“깨달음에 집착 말라…길은 경전 안에 있다”

“깨달음이란 상에 얽맨 사람 많아
일념으로 정진하면 저절로 깨달아”
업장 소멸하는 길은 보살행에 있어


선지식(善知識)들을 모시는 기쁨

1972년 3월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 이후 보선 스님은 화순 용암사와 문경 봉암사, 순천 송광사, 공주 마곡사, 인제 백담사 무문관은 물론 대흥사 동국선원에서 정진을 이어가고 있다. 

“화두는 ‘이뭣고’를 하고 있습니다. 은사스님을 비롯해 송담 스님, 구산 스님, 서암 스님께 모두 똑같이 ‘이뭣고’를 받았어요. 근본적으로 화두는 ‘이뭣고’로 통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생사(生死)가 무엇인가를 참구하셨어요. 어찌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통합적인 의문이 바로 ‘이뭣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00공안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정진하는 동안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들을 모시고 수행했다. 스님은 “구산 스님, 경봉 스님, 서옹 스님, 청화 스님, 송담 스님, 서암 스님 등이 생각난다”고 했다.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을 모시고 정진했습니다. 1980년 전후 될 것입니다. 그때 송광사가 한창 불사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울력 목탁이 울리면 구산 스님께서는 제일 먼저 낫과 호미를 들고 마당으로 오셔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전각 지을 때 쓸 목재들을 스님들이 직접 다듬었습니다. 구산 스님의 낫질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정진 중 반철이 지날 즈음에는 점검을 해주셨습니다. 수좌들은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삼일암으로 갔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하는데 삼일암 마루에 난초가 딱 보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절을 올리니 ‘정진이 어떠한가’라고 여쭈셨어요. 그래서 제가 ‘난초 향이 좋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주장자를 들고 저를 때리려고 해요. 이내 ‘이놈아! 얼른 가서 더 열심히 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얼른 도망왔습니다. 하하.”

해제를 앞두고 구산 스님이 다시 보선 스님을 불렀다고 한다. 정진에 열심이던 젊은 수좌를 눈여겨 봐왔던 터였다. 봉투를 꺼낸 구산 스님이 “이것은 해제비가 아니고 다시 오라는 차비이니 그리 알고 받아 가거라”고 말했다. 봉투를 열어보니 3만원이 들어있었다. 당시 해제비가 3만원이었으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이를 본 수좌들은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곁의 성자’로 존경받았던 청화 스님도 잊을 수 없는 어른이라고 했다. 대흥사 진불암에서 10년 넘게 묵언과 장좌불와를 하던 스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청화 스님을 한국의 밀라레파라고 하잖아요. 저도 실제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평생을 수행에만 진력하셨습니다. 염불선을 기반으로 정통불법을 다시 세우고자 했던 어른의 모습이 가슴에 뚜렷하게 남아있습니다.”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에서 정진할 때 공부에 진전이 없어 경봉 노스님을 찾아가면 ‘중생도 부처도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알면 될 텐데’라며 격려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보선 스님은 매일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오전에는 동국선원에서 13명의 수좌들과 같이 정진한다. 오후에는 출재가를 두루 만나며 공부를 점검해준다. 일정이 없을 때면 염화실에서 책을 보거나 화두를 드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보선 스님은 가사 장삼도 깔끔하게 정리해 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보선 스님은 가사 장삼도 깔끔하게 정리해 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부처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보선 스님을 만난 때는 마침 부처님 성도(成道)재일 직후였다. 부처님 깨달음의 의미를 여쭈지 않을 수 없었다. 

“싯다르타 태자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신 날이 바로 성도재일입니다. 불교에서 제일 중요한 날입니다. 출가 이후 온갖 고행을 해도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안 싯다르타 태자는 수자타가 올린 죽을 드시고 왕자 시절 경험한 참선의 경험, 참선의 맛을 살려 다시 선정에 들어 정등각을 성취하셨습니다. 

깨닫고 보니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의 경지가 높아 누구한테 설명을 해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에 들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안 천신들이 깨달음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고 부처님께 간청을 하였고 결국 다섯 비구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 바로 성도재일입니다.

부처님은 다섯 비구를 만나 중도연기(中道緣起)와 팔정도(八正道),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등에 대해 설하셨습니다. 이 내용들은 모두 <초전법륜경>에 나와 있습니다. 다섯 비구가 깨달은 뒤 야사와 그 친구 54명이 또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전도대선언’을 하시며 전법의 길을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여야 합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덧붙여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조언을 잊지 않았다.   

“깨달음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제방을 살펴보면 깨달음이라는 상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일념으로 화두에 매진하다 보면 깨달음은 저절로 옵니다. 부처님 경전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모든 지침은 경전에 있습니다. 자연스런 정진과 깨달음은 함께 오기 마련입니다. 이점을 잘 아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보선 스님은 사부대중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스님은 차근차근 말씀을 이어나갔다.

“제가 사람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잘 살라’는 것입니다. 잘 사는 것이 뭣이냐? 제가 볼 때는 업장을 소멸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업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업이 아니면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어요. 업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 업을 정화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근본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업을 소멸하는 길은 보살행에 있습니다. 보살은 이타행(利他行)을 합니다. 그런데 이타행이라는 것은 곧은 자리행(自利行)입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둘이 아닙니다.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길, 즉 업장소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살행은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번 한 생 세상에 왔으니 진정한 보살이 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수행이고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업장소멸만이 나를 해탈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웃고 살아야 합니다. 웃으려면 갈등이 없어야 합니다. 나 자신과의 갈등, 상대방과의 갈등이 없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타협하면 세상은 밝아집니다. 웃고 삽시다. 하하.”

스님의 유쾌한 웃음과 함께 긴 인터뷰는 끝났다. 어느새 어둠이 온 산에 내려 앉아 있었지만 전혀 어둡지 않았다. 산중에 어른이 계시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빛’임을 보선 스님을 친견하면서 다시 확인한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