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붓다가 보여준 존엄한 죽음 (1)

부처님도 신체 고통 마주하셨다
이 순간을 살며 죽음 기억해야

강력한 진통 효과로 알려져 있는 마약성 진통제 모르핀(morphine)을 맞아도 효과가 없었다. 몸에는 이미 모르핀보다 강력한 펜타닐(fentanyl)이라는 마약성 진통제 주사를 연결하고 진통 패치도 붙여둔 상황이었다. 지난 1월 3일 극심한 다리 통증으로 앉고 서는 것이 불가능해 결국은 앰뷸런스를 타야 했다. 그동안 다리에서 느낀 방사통을 참으며 나름대로 관리를 했지만 단순한 디스크가 아닌 ‘척추전방전위증(척추분리증)’으로 수술은 불가피했고, 심하게 눌린 신경으로 인해 수술 후에도 통증이 사라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통증과 함께 떠오른 것은 죽음이었고 불안과 슬픔으로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다. 이 글을 연재하는 내가 직접 겪은 고통이다.

죽음과 고통은 삶에서 마주하는 극렬한 과제다. 하지만 가장 외면하고 싶은 주제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마주할 때는 모든 것을 제쳐두고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되지만 감당할 방법이 마땅하게 없어 속수무책이 된다.

죽음을 다루는 심리학은 인류의 중요한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짧다. 전통적으로 죽음은 종교와 철학의 영역이었고 종교는 사후세계에 대한 안내와 위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심리학에서는 프로이트가 1917년에 사별을 경험한 사람들의 우울을 다루는 〈애도와 우울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목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죽음과 삶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부버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맹렬한 논의는 관심을 끌었고 실존주의 심리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런 노력과 논의에도 죽음에 관련된 학문은 20세기 중반에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죽음학이라는 용어 ‘타나톨리지(thanatology)’를 최초로 사용한 러시아 생물학자 엘리 메치니코프와 죽음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허만 파이펠 등에 대한 설명은 차치하고, 죽음에 대한 연구는 의학, 사회복지학, 사회학, 인류학, 법학, 철학, 종교 등 인류의 삶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주제가 됐다.

심리학에서 죽음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한 연구 분야가 불안이다. 죽음불안은 단순히 죽음을 마주할 때 느끼는 정서를 넘어 모든 불안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발달심리학자들은 만2세 아동들이 크고 작은 죽음을 경험하면서 생명의 유한을 인식하게 되고 만3세부터 6세에는 부모와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죽음은 태어난 이후부터 계속 우리 곁에 있었고 마지막 순간에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다. 죽음을 외면하고 억압하고 살아가면서 나타나는 심리적 방어는 특별함을 추구하는 허영심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존재의 영속성을 위해 자녀와 동일시하는 모습도 보인다. 구원을 추구하는 맹목적 모습과 돈에 대한 집착과 중독 증상도 깊이 들여다보면 죽음불안이 기저에 깔려있다.

죽음불안을 극복하고 건강하게 치료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회피하지 않는 자세’다. 이 시대 실존주의 심리치료의 대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어빈 얄롬은 죽음불안을 주제로 환자들을 만났다. 그는 “건강하고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죽음, 고독, 무의미와 같은 실존적 조건을 용기 있게 직면해야 하고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앞서 칼럼에서도 말했지만 직면과 수용은 심리치료의 첫 번째 열쇠다. 직면과 수용은 알아차림의 또 다른 이름이라 생각한다.

삶의 모든 문제를 직면한 위대한 스승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병원에서 통증이 사그라질 때쯤 석가모니 부처님이 신체적 고통을 마주한 장면을 책에서 읽고 울컥했다. 고통쯤은 쉽게 이겨낼 것이라는 구원 환상이 무너지고 인간이신 붓다를 마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체의 고통이 있는 붓다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부처님도 아프셨다’란 사실과 열반의 과정은 고통과 죽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인류의 과제를 완벽하게 풀어놓은 해답지를 보는 것 같았다.

책 〈고타마 붓다의 생애〉에서는 붓다의 고통에 대해 “마치 죽음으로 이끄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해왔다”고 한다. 암바팔리를 떠나 우기를 맞아 비구스님들께 베살리에서 수행할 것을 당부한 이후였다. 고통의 순간 붓다는 승단에 아무런 말없이 떠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정해진 수명까지 살아낼 것을 다짐하고 고통을 감수했다. 회복 후 나무 그늘에 앉아있을 때 아난다가 붓다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살피며 “교단에 지침을 남겨주지 않고 떠나시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니 안심이 된다”고 말한다.

붓다는 이에 대해 “너희는 무엇을 내게 바라느냐? 나는 안과 밖이 다르게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답했다. 열반에 대해 알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을 마쳤다는 말이다. 붓다는 의식과 말과 몸(행동)이 일치했고 붓다의 일상과 삶이 가르침이었다. 달리 더 이상 전할 가르침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죽음을 직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중요한 원칙이다. 임종기 환자들을 대상으로 좋은 죽음을 연구한 스타인하우저에 따르면 ‘인생의 완수감’을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특징으로 꼽았다. 인생의 완수감은 “알아차림하며 지금 이 순간을 살면서(carpe diem) 죽음을 기억하는 것(memento mori)”이 열쇠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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