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대산 월정사

선재길·전나무숲 아름다움 가득
선지식 일화도 빼놓을 수 없어
자장 스님·나옹 스님 이야기와
삼국유사 ‘대산월정사’편 흥미도

강원도 평창 월정사 전나무숲길.
강원도 평창 월정사 전나무숲길.

선재길을 걷다
지리산 둘레길을 시작하여 전국의 걷기 좋은 길에 이름을 붙인 뒤, 여유롭게 그 길을 걷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미 많은 사람이 걷던 길도 있고, 지역주민만 걷던 길도 있고, 새롭게 만든 길도 있다. 그중에 걷기에 힘들지만 큰 기쁨을 주는 길도 있고, 그저 그런 길도 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이어지는 10㎞ 선재길은 숲과 계곡이 어우러진 멋진 길이다. 전 구간을 걷지 않더라도 월정사 주차장에서 섶다리까지 계곡을 낀 오솔길은 참으로 좋다. 편도 3㎞, 50분 내외 거리다. 물론 초입에 있는 전나무숲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월정사에서 정진한 선지식의 일화와 함께하면 더욱 유익한 걸음이 되리라.

선재길은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의 주인공인 선재동자에서 유래한다. 선재동자는 남쪽으로 순례하며 여러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남쪽으로 순례하므로 남순동자(南巡童子)라고도 한다. 선지식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나아가게 하는 훌륭한 스승이나 벗을 말한다. 선재(善財)라는 이름도 재밌다. 선재동자가 태 속에 있을 때나 태어나서나 집안에 재산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시작으로 구법여행 중에 53선지식을 만난다. 그리고 마침내 법계(法界, 부처님·진리의 세계)에 들어간다. 그 선지식이 참으로 다양하다. 보살, 스님, 불교 신자, 장자, 거사, 천신, 천녀, 바라문, 선인(仙人), 왕, 선생, 동자, 동녀, 뱃사공, 외도, 유녀(遊女), 태자 부인, 태자 어머니 등이다. 53선지식은 모든 불보살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어찌 53선지식만 있겠는가. 자신을 내려놓으면 모두가 선지식이고, 문수보살이다. 지금 월정사 가는 길이 바로 선지식을 만나는 길이다.

佛法 번창하게 이끈 선지식
선재길은 참으로 오대산 월정사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오대산은 문수도량이 함께하는 산이고, 월정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한 자장 스님(590?~658?)이 터를 잡았다. 이후 월정사에서 정진한 이들의 이야기 속에 여러 선지식이 등장하고, 근래에는 〈화엄경〉의 대가 탄허 스님(1919~1983)이 주석하였다.

월정사는 643년(선덕여왕 12) 자장 스님이 창건하였다. 다음은 〈삼국유사〉 제3권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에 전하는 이야기다.

636년 스님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당나라로 들어갔다. 태화지(太和池) 옆 문수보살상 앞에서 7일 동안 기도하는데, 꿈에 노스님이 범어(梵語)로 된 네 구 게송을 전하였다. 이튿날 아침 어떤 스님이 나타나 게송의 뜻을 알려주고, 부처님 가사와 발우, 진신사리를 전해주며 말하였다.

“그대의 본국 동북방 명주(지금의 강릉) 경계에 오대산이 있다.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친견하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이후 태화지 용이 나타나 말하였다.

“전에 게송을 전하던 노승이 바로 문수보살입니다. 신라로 돌아가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스님은 신라에 돌아오자 문수보살이 머무는 오대산에 이르러 산기슭에 초당을 짓고 정진하였다. 그러나 문수보살을 뵙지 못하고 다시 원녕사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 이후 자장 스님이 초당을 지은 곳에서 유동(幼童)보살의 화신이라고 하는 신효(信孝)거사가 정진하였다. 다음은 〈삼국유사〉 제3권 ‘대산월정사 오류성중(臺山月精寺 五類聖衆)’에 전하는 이야기다.

충남 공주가 집인 신효거사는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는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았다. 거사는 고기를 구하려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가 학 다섯 마리를 보고 활을 쏘았다. 학 한 마리가 깃털 한 조각을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그 깃털을 집어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았더니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거사는 고기를 얻지 못하여 자기 넓적다리를 베어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이후 출가하여 자기 집을 절로 만들었다. 지금의 강릉에 이르러 깃털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모두 인형으로 보였다. 이곳에서 살고자 하여, 길에서 할머니를 보고 살만한 곳을 물었다.

“서쪽 고개를 넘으면 북쪽으로 향한 골짜기가 있습니다.”

할머니는 말하자마자 사라졌다. 관음보살의 가르침이라 여겼다. 거사는 곧 자장 스님이 처음 초당을 지은 곳으로 들어와 정진하였다. 다섯 분의 스님이 와서 말하였다.

“그대가 가지고 온 가사 한 폭은 어디 있는가.” 무슨 말인지 모르자 스님은 또 말하였다. “그대가 집어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본 그 학의 깃털이 바로 가사다.” 깃털을 내주자 스님이 깃털을 가사의 뚫어진 폭에 갖다 대니 서로 꼭 맞았다. 깃털이 아니고 가사의 베였다. 거사는 다섯 분의 스님과 작별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들이 다섯 성중(聖衆)의 화신임을 알았다.

〈삼국유사〉 ‘대산월정사 오류성중’에는 다섯 성중이 누군지 설명이 없다. 앞글인 ‘대산오만진신’에서 오대산 동대 남대 서대 북대 중대에 각각 관음보살, 지장보살, 대세지보살, 아라한, 문수보살이 나타나셨다고 하였으니, 다섯 성중 역시 그분들이라 짐작한다. 문수보살을 비롯한 보살들은 노스님, 용, 학, 여인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 마치 선재동자가 여러 선지식을 만나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대산월정사 오류성중’ 말미는 “나라 안의 명산 중에서 이곳이 가장 좋은 곳으로, 불법이 길이 번창한 곳”이라는 말로 끝맺는다.

월정사 경내.

대자유인의 기개 느끼다
선재길이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일주문에서 금강교 앞까지 이어지는 약 900m 길이의 전나무 숲길은 유명하였다. 광릉 국립수목원, 전북 부안 내소사와 더불어 국내 3대 전나무숲으로 꼽는다. 무엇보다 오대산 전나무숲에는 대자유인의 이야기가 있다.

고려말 북대암(北臺庵)에서 수행하던 나옹(懶翁) 스님(1320~1376)은 매일같이 월정사 부처님 전에 콩비지를 올렸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어느 겨울날이었다. 스님은 콩비지를 받쳐 들고 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소나무에 쌓여있던 눈이 스님과 부처님에게 올릴 콩비지를 덮쳤다. 스님은 소나무를 향해 야단을 쳤다.

“이놈, 너는 부처님 진신(眞身)이 계신 이 산에 살면서 항상 부처님 은혜를 입고 있는데, 어찌 부처님 전에 올릴 공양물을 버리게 하느냐.”

마침 스님의 꾸짖는 소리를 들은 산신령은 소나무에게 명하였다.

“소나무야, 너희는 큰스님도 몰라보고 부처님께도 잘못을 저질렀으니, 이 산에 함께 살 자격이 없다. 멀리 떠나라. 이제부터는 전나무가 이 산의 주인으로 오대산을 번창하게 하리라.”

소나무는 오대산에서 쫓겨나고, 이후 전나무가 주인 노릇을 하였다. 대자유인인 나옹 스님의 기개는 또 다른 일화를 전한다.

오대산 북대암에 모셔오던 16나한상을 상원사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운(移運)은 힘든 일이라 대중스님은 고심이 많았다. 이에 나옹 스님은 이운을 혼자 도맡아 하겠으니 며칠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운하기로 한 기간이 다 된 날 점심때에도 전혀 진척이 없었다. 스님들은 답답하였다. 해가 질 무렵 나옹 스님은 나한전에 들어가 큰 소리로 말하였다.

“옮긴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으면 제 발로 옮겨 갈 일이지, 이 화상이 업어서 옮겨주기를 기다리는가.”

그리고 나한들의 머리를 주장자로 내리쳤다. 그 순간 나한상이 벌떡 일어나 법당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상원사에 자리한 나한들을 살펴보니 한 분이 보이지 않았다. 내려오다가 칡넝쿨에 걸려버렸다. 나옹 스님은 산신령에게 이운을 방해한 칡넝쿨을 없애도록 명령하였다. 이때부터 오대산 상원사와 북대 주변에는 칡넝쿨이 사라졌다.

나한과 산신령에게도 당당한 나옹 스님은 이 땅에 오신 불보살의 화현이다. 나옹 스님의 가르침이 바람 따라 전나무숲에서 들려온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노여움도 내려놓고 아쉬움도 내려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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