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부처임을 믿으면 부처

칠언절구 오도송, 내용 탁월해
‘고향=정토’ 알면 ‘남아 대장부’
독립운동 주도한 기개도 확인 

사나이 가는 곳이 바로 고향인 것을(男兒到處是故鄕)
나그네 인생 시름 속에 길게 헤매이네(幾人長在客愁中)
깨달음의 고함 악! 하고 외치니 삼천세계 깨지고(一聲喝破三千界)
눈 속에 붉은 복사꽃은 조각조각 흩날리네(雪裡桃花片片紅)

이 시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39세(1917년 12월 3일 밤 10시경)에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에서 좌선을 하던 중 갑자기 분 바람에 무슨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어 지은 오도송이다.

칠언절구의 이 시는 전형적인 근체시의 시의 형식인 압운(押韻: 鄕, 中, 紅)과 대구(對句)가 잘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탁월한 명품 선시이다. 

기승전결에 따라 살펴보면 기구에서 “사나이 가는 곳이 바로 고향인 것을”이라고 자신의 오도의 경지를 노래했다. 당나라 마조대사는 “마음이 부처”라고 했다. 오직 마음만이 세상과 사물을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이 부처”라고 한 것이다. 내 마음이 부처인 것을 믿으면 부처이고, 내 마음이 중생이라고 믿으면 중생이다. 마음이 아름다우면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했다. 

같은 세상에 살아도 사람들의 생각이 각기 다르다. 자기 생각이 자기의 세상이다. 만해는 이 도리를 아는 자를 ‘남아 대장부’라고 표현했다. 고향은 가장 편안한 자기 집이다. 정토이다. 깨달음의 세계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미몽과 망상, 집착 속에서 헤맨다. 그래서 승구에서 “나그네 인생 시름 속에 길게 헤매이네”라고 읊었다. 진리를 모르면 인생의 밤길이 멀고 길다.

전구에서 만해는 화두공안을 깨뜨리고 깨달음을 얻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립문자의 경계다. 이것을 당나라 임제(臨濟) 선사는 “할(喝)”로 표현했다. 그동안 깜깜했던 무명(無明)과 의심의 세계,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이치가 모두 깨지고 온 세상이 광명이다.
이런 경계를 “눈 속에 붉은 복사꽃은 조각조각 흩날리네”고 갈무리했다. 절창이다. 흰 눈 속에서 붉은 복사꽃이 필 수는 없다. 선가에서는 이런 언어도단(言語道斷)적인 표현으로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냈다. 이 경계를 방거사는 “아름다운 눈송이가 송이송이 떨어지는구나(好雪片片 不落別處)”라고 노래했다.

3구와 4구에서 색성오도(色聲悟道)의 대구를 이룬다. 3구는 ‘고함소리 할’ 즉, ‘소리(聲)’이고, 4구는 ‘흰 눈 속의 붉은 복사꽃’ 즉, ‘색깔(色)’이다. 구도자가 깨달음을 얻을 때는 먼저 우리의 감각기관인 눈으로 색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들어서 세계를 이해하고 인식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의식 활동의 첫 출발이다. 향엄 선사는 대나무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고(香嚴擊竹), 영운 선사는 복숭아꽃을 보고 깨달았다(靈雲桃花)는 일화가 있다.

만해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쾌거인 1919년 3·1운동을 주도해 차가운 감옥에서도 끝까지 일제의 회유나 강압에 굴복하지 않고 지조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사나이 가는 곳이 바로 고향인 것을”이라고 외친 그의 깨달음의 실천이다.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전미개오(轉迷開悟)하는 선사의 투철한 오도(悟道) 정신은 한국문학사에서 전통적인 한시의 형식에서 한글로 쓰는 자유시로 건너오는 교량적인 시기에 한시와 한글시, 시조 모두를 잘 구사할 수 있었고, 불멸의 시집인 〈님의 침묵〉을 발표해 당시 서정시 수준을 구사하던 황무지였던 시단에 심오한 사상과 철학을 지닌 관념적인 시를 선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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