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구하는 마음이 곧 괴로움

손해 입고 하소연하고픈 내 마음
불자라면 인연법으로 받아들여야
‘구하지 않음’이야말로 참된 도행

한겨울인데도 마트에선 진공 포장된 옥수수를 만날 수 있다. 옥수수를 보니 몇 해 전 추억이 떠오른다. 밥보다 떡이랑 옥수수를 더 좋아하시는 친정엄마께서는 집 앞에 옥수수를 아주 많이 심으셨다. 풍성한 수확물을 기대하고 열심히 관리하면서, 옥수수가 자라는 모습을 기다리셨다. 드디어 내일은 옥수수를 따는 날이라고 하셨고, 커다란 옥수수 자루를 밭에 갖다놓으셨다. 설레는 마음으로 자루를 바라보며 엄마께서는 들떠 있으셨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나가보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누군가 옥수수를 다 따서 자루째 가져간 것이다. 단 한 개의 옥수수도 남겨두지 않고 그 많은 수확물을 모조리 다 가지고 간 것이었다. 엄마는 무척 속상해하셨다. 매일매일 실해져가는 옥수수를 바라보며 맛있게 먹을 생각에, 그리고 자식들 나눠줄 생각에 흐뭇해하셨는데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그때 나는 엄마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엄마, 그 옥수수는 엄마의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것이었나 봐요. 누군가 가져가서 잘 드셨을 테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시자구요. 보시할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세요.” 엄마께선 곧바로 “그래! 내 것이 아니었던 거지!” 하셨다. 그리고 다음날 시장에 가서 옥수수를 한아름 사다드렸던 기억이 난다.

살다보면 이렇게 무언가를 잃게 되거나 남으로부터 손해를 입은 것 같을 때가 있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누명을 쓰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도 있다. 그럴 때 잃어버린 것을 찾고 싶고, 세상을 향해 하소연하고 싶은 속내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러나 불자는 인과를 믿고 인연법을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내 앞에 벌어진 모든 일을 부처님의 법문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

엄마께는 달마대사의 이입사행관 법문을 전해드렸다. 살면서 원망심이 날 때에 많은 도움을 받는 법문이다.

수행자는 괴로움을 겪게 되면 마땅히 이렇게 생각하여야 한다. ‘내가 지난 옛날부터 셀 수 없는 세월동안 근본은 버리고 사소한 일을 좇으며 생사의 물결 속을 윤회하였다. 그러면서 얼마나 많은 원한과 증오가 있었을 것이며, 뜻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일 또한 없겠는가? 지금 비록 내가 저지르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이는 지난 세상에 나에게 잠재하였던 재앙이며 악업의 열매가 익은 것일 뿐이다. 하늘이나 사람은 알아볼 수가 없다.’ 이런 마음으로 괴로움을 달게 받으면서 누구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경의 말씀에 ‘괴로움을 당해도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마음은 막힘없이 통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이런 마음이 날 때에 이치와 맞아 떨어져서 원망을 바탕으로 도를 닦아가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원망을 갚는 행[報怨行]’이라고 하느니라.

중생은 본래 실체가 없다. 생명이 인연을 맺으면서 바뀌는 것이니 비록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받지만 모두가 인연에 따라서 생긴다. 어쩌다가 좋은 과보를 얻어서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이는 내가 과거에 씨를 뿌린데 따른 결과일 뿐이다. 지금은 얻었다고 하지만 인연이 다하면 없어지고 말 것인데 무엇이 기쁘겠는가? 얻고 잃음을 인연에 따르면서 마음에 더하거나 덜함이 없고, 기쁨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대로가 도를 따르는 것이다. 때문에 ‘인연에 따르는 행[隨緣行]’이라고 한다.

세상 사람은 혼미하여서 가는 곳마다 탐착만을 구하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에 언제나 한 마음을 돌려 먹는다. (중략)모든 현상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쉬고 따로 구하지 않는다. 경의 말씀에도 ‘구하는 것이 있으면 괴로움이고, 구하는 것이 없으면 즐거움이다[有求皆苦 無求乃樂]’라고 하셨다. 구하지 않음이야 참된 도행(道行)이 아니겠는가?

김영애 문사수법회 법사

구하고자 하는 나를 나무아미타불 염불로 항복받으라고 하시며, 금강경의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전해주신 한탑 스님께서는 저서 〈금강경법문〉에서 이렇게 강조하셨다. “내가 살고 있다는 생각, 내가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 그래서 무언가를 구하는 마음을 남김없이 항복해야 합니다. ‘나’라는 것이 본래 없고 오직 부처님생명만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다는 부처님의 무한한 법문을 듣는 것이 염불입니다. 염불은 내가 부처님을 불러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나를 불러주고 계신 소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심이 되는 법문이다.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며 오늘도 그저 부처님이 불러주시는 소리를 잘 들을 뿐이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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