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고통스런 기억 반복되는 장애
삶의 의미 찾는 노력 따라야

영화 ‘소원’을 보고나서 가슴 깊이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울적함으로 한동안 괴로웠다.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문득 영화 속 아이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외면하고 싶었다. 영화 ‘소원’은 9살 소녀가 학교를 가던 중 술에 취한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트라우마를 겪는 아이의 심리적 치유와 건강을 위해 가족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이 영화를 보고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수많은 트라우마 사건으로 평생을 괴롭게 사는 내담자들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화 속 소원과는 달리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내가 하필 그때 그곳에 가서…”라며 자신을 책망하며 살아간다. 아무리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이야기할지라도 그들은 평생을 괴로워한다. 특히 갑자기 성폭행 장면이 떠오르면 숨을 못 쉴 정도로 힘들어했다.

트라우마라고 불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극심한 고통과 스트레스 상황으로 괴로움을 겪은 후 앓는 심리적 증상이다. 사실 트라우마는 전쟁, 재난, 성폭력 등 갑작스러운 사고와 충격을 포함해 지속적인 정서적 학대와 왕따 경험, 사별, 이별 등 일상 속에 마주하는 심리적 고통도 원인이 된다. 또한 전쟁과 사건사고 등 급작스러운 단일 트라우마(single trauma)보다 정서적 학대와 왕따 등 연속적으로 일어난 복합 트라우마(complex trauma)가 내담자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트라우마 사건 이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갑자기 당시 기억이 떠오르는 침투사고가 있으며 악몽을 꾸고 공포와 과잉경계, 과잉각성 등도 보인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경우에도 수치심, 자기비난, 자기비판이 자동적 사고로 나타나며 분노와 우울, 무감동, 수면장애 등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특히 대표 증상인 침투사고(intrusions)는 트라우마와 관련된 생각이 원치 않아도 불쑥 떠오르는 증상이다. 침투사고가 괴로운 이유는 플래시백(flashback) 현상 때문이다. 플래시백은 그 사건이 지금 현재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느끼고 마음속에 재연되어 재경험을 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 이르게 한다. 침투사고는 악몽의 원인이 되어 치료에 악영향을 끼치고 고통이 반복되게 만든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마음챙김 전략을 다양하게 사용한다. 특히 침투사고로 고통스러울 때 도움이 되는 그라운딩(Grounding)은 유명하다. 그라운딩은 트라우마의 안전기반 치료로써 지금-여기 존재하도록 돕는 기술이며, 손의 촉감이나 발 감각을 확인하고 현재로 돌아오도록 돕는 기법이다. 또 치료 당시 내담자가 머물고 있는 방이나 공간에서 새로운 것을 천천히 관찰하도록 도와주면 침투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라운딩은 손쉽게 접근하면서도 효과가 빨라 트라우마를 겪은 내담자에게 효과적이다. 그 외 여러 증상에 따른 다양한 치료 방법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트라우마는 갑작스런 사건 사고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일상 속에 모든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정서적 고통이다.

책 <정신과 의사가 붓다에게 배운 트라우마 사용설명서>의 저자 마크 엡스타인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살피며 “붓다의 이야기 핵심에는 가장 중요한 트라우마가 숨어 있다”고 했다. 마크 엡스타인은 정신분석과 대상관계이론을 중심으로 붓다의 삶을 관찰했고 어머니인 마야부인의 죽음에 집중했다. 그는 좋은 환경이 붓다에게 주어졌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붓다의 무의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어머니의 부재로 공허감과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온 붓다가 정서적 고통의 원인인 트라우마에 직면해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서적 고통은 자각(awareness), 알아차림의 대상이 되고 그 결과 유익한 결과물을 낳는다”고 말했다. 트라우마는 사성제의 ‘고(苦)’이며,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훈련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고통의 종식’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붓다는 안겨주었다.

트라우마의 고통은 잔인하다. 칼럼 주제로 적으면서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가볍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 조심스럽고 걱정이 된다. 하지만 붓다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서 얻은 희망을 전하고 싶다. 트라우마는 분명 극복된다.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나치의 손가락 하나에 삶과 죽음이 갈리는 상황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대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쁨보다는 도덕적 결함을 보이고 비통함과 환멸의 시간을 보낸다”고 설명했다. 수용소에서 겪은 고통이 트라우마가 되어 나머지 삶을 지배한다. 하지만 그는 트라우마 경험을 바탕으로 심리학계에 새로운 이론인 ‘로고테라피’를 창안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했다. 의미치료로 불리는 이 로고테라피는 환자에게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돕고 그 의미를 향해 살아가도록 돕는다. 빅터 프랭클은 “왜(why)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삶에 목적이 있는 사람은 계속 성숙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극심한 고통이 삶의 숙명이라면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 살아가는 강한 생명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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