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달동네에서 작은 법당을 두고 수행생활을 하다 20여 년 전 주택가로 이전한 스님과 잠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스님에게 과거 허름한 법당을 떠나 이제는 제법 번듯한 사찰로 변모한 역사를 들으며 한창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였다.

“근데 달동네 시절이 더 좋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옛날 법당은 성인 3명이 서있으면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좁다고 하셨으면서. 이런 황당함은 이어진 스님의 얘기에 곧바로 사라졌다.

스님이 사찰을 이전해온 동네는 대형교회와 신학대학이 즐비한 이른바 기독교 영역이었다. 이곳에서 스님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주민들에게 심각한 텃세 피해를 입었다. 동네 꼬마아이들과 반갑게 인사라도 나누면 부모가 되레 아이에게 “인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화를 내기 일쑤. 누군가는 “절에 들어가면 엄마, 아빠, 형제들이 암에 걸려 죽는다”는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스님의 귀엔 “범죄자 소굴인 절”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소문도 들려왔다.

다른 종교와의 교류를 싫어하는 건 본인의 자유이지만 비방·폭언·욕설은 범죄다. 불교가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신구의(身口意) 삼업 가운데 구업이 있는 이유다. 하물며 불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인 기독교에 이런 가르침이 없겠는가.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누가복음 6장 45절)

마태복음에서도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수확할 순 없는 일. 종교인이기에 앞서 사람됨이 먼저다. “말은 사람됨을 보여주는 거울”이라던 원로 신학자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릇된 신앙심으로 무고한 이를 괴롭히는 일,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일은 예수도 원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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