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코로나19가 시작돼 점차 기승을 부리던 따뜻한 봄날에 산문 밖을 나섰다. 고여 있는 물은 썩는 법이라. 〈금강경〉과 〈법화경〉을 짊어지고 흐르는 물이 되어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고자 만행을 계획했다.

하산하던 날, 온 대중은 만행을 결정한 나를 의아해했다. 선방이나 율원을 간다면 능히 격려하며 보내줄 터이나 홀로 만행을 한다고 하니 은사스님은 상좌가 풍진 세상으로 들어가 행여나 악업에 물들까 전전긍긍하셨다. 그럼에도 나의 결정은 단호했다. 번잡한 시장에서도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곳이 곧 절이고 수행자라 하지 않았던가.

화광동진(和光同塵).

‘그동안 세상 밖에서 살았으니 이제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공부해야지. 그 속에서도 내 마음이 먼저 쉬어져야 관념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터.’

만법이 하나로 돌아감을 알려면 그동안 일으킨 만 가지 번뇌를 떨치고 지금까지 온갖 세상의 이치대로, 상식과 관념으로 분별을 쉬어야 한다. 그렇게 오로지 모든 것을 연기(緣起)로 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때맞춰 사방이 온갖 욕락으로 둘러싸인 뜨거운 길 위에 사는 사람들 가까이에 작은 포교당을 개원했다. 주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포교당 불사가 불가능하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지라 오로지 화엄법계를 믿고 하나씩 쌓아올렸다. ‘웅장원(熊張湲)’은 그렇게 탄생했다. 지역주민 응모로 포교당 이름을 지어서일까. 물을 찾아 만생명이 모여들 듯 그때그때 인연에 따라 대중이 모여들었다.

하루는 여름날에 두툼한 겨울 점퍼와 반바지 차림을 한 걸인이 찾아와 돈 몇 푼을 요구했다. 큰 절이었으면 만날 일도 없었겠지만 이 또한 만행의 과정이리라. 처음엔 5000원을 부탁하던 사람은 시간이 지나며 때론 만원, 그리고 2만원으로 조금씩 더 큰돈을 원했다. 한편으론 의심이 들었지만 그 또한 분별심이라 여겼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걸인은 비에 젖은 몸으로 다시 웅장원을 찾았다. 진동하는 땀 냄새와 비에 한껏 젖은 신발, 그리고 구멍 난 짝짝이 양말…. 평소처럼 별 일 없이 돌아간 그는 2주 뒤 다시 찾아왔다. 그날 옆에 있던 도반스님은 미리 준비해둔 유명 메이커 신발과 양말을 선물했다. 발사이즈를 물었을 때 260을 신는다며 자신은 ‘나○키’ 신발을 좋아한다던 말을 기억해놓았던 것이다. 아마도 10만원은 넘었을 새 신발에 걸인께서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걸인은 웅장원에서 마지막으로 법당 부처님전에 절을 올렸다. 자그마한 분별심이 연민으로 바뀐 그날부터 걸인은 더 이상 웅장원에 오지 않았다.

말끔히 양복을 차려 입은 사람과 비루한 행색의 걸인. 그 모습에 사람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면 그건 나의 분별심 때문이다. 지금 내 모습을 비추는 거울은 무엇도 아닌 앞사람이란 걸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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