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허상… 집착 내려놓으면 如如하다”

지난해 11월 금정총림 방장 추대
소통과 화합으로 후학들 이끌어  
대중들에 맞게 안거 문화도 변화

‘상구보리 하화중생’ 실천한 50년
출가 후 수도암 등서 치열한 정진
은사 부름에 8년 간 하심으로 불사
부산서 전법…‘포교·복지’ 이끌어

정여 스님은… 벽파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75년 7월 15일 부산 범어사에서 지유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76년 3월15일 부산 범어사에서 고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김천 수도암, 현풍 도성암, 하동 쌍계사 금당, 문경 봉암사, 백담사 무문관, 범어사 금어선원  등에서 안거했다. 범어사 주지, 부산불교연합회장 및 이사장을 지냈다. 대한불교교사대 학장, 사단법인 파라미타청소년연합회장, 사회복지법인 보현도량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범어 이사장, 부산불교복지협의회 이사장을 지냈다. 재단법인 보현장학회 이사장, 사단법인 세상을향기롭게 대표를 맡고 있다. 1991년 조계종 총무원장 공로 표창패, 2000년에는 종정 표창패를 받았다. 2001년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에 이어 2005년 다촌문화상 공로상과 포교대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스님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나를 찾아가는 명상여행〉과 〈머무는 그 자리에서 행복을〉 등이 있다.
정여 스님은… 벽파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75년 7월 15일 부산 범어사에서 지유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76년 3월15일 부산 범어사에서 고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김천 수도암, 현풍 도성암, 하동 쌍계사 금당, 문경 봉암사, 백담사 무문관, 범어사 금어선원 등에서 안거했다. 범어사 주지, 부산불교연합회장 및 이사장을 지냈다. 대한불교교사대 학장, 사단법인 파라미타청소년연합회장, 사회복지법인 보현도량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범어 이사장, 부산불교복지협의회 이사장을 지냈다. 재단법인 보현장학회 이사장, 사단법인 세상을향기롭게 대표를 맡고 있다. 1991년 조계종 총무원장 공로 표창패, 2000년에는 종정 표창패를 받았다. 2001년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에 이어 2005년 다촌문화상 공로상과 포교대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스님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나를 찾아가는 명상여행〉과 〈머무는 그 자리에서 행복을〉 등이 있다.

금정산(金井山)은 금빛 물고기가 내려와 산 정상의 샘(井)에서 놀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그리고 그곳에 건립된 사찰이 범어사(梵魚寺)다. 해동의 화엄십찰 중 하나로 창간된 범어사는 수많은 고승대덕들을 배출한 명실상부한 한국의 명찰이며, 지금도 부산과 경남 일원의 수행·전법 도량이자 총림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금정총림을 새로 이끄는 선지식이 여산 정여 대종사다. 새해를 앞두고 정여 대종사를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산중도 한파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선지식의 푸른 안목 때문인지, 무애한 그림자 때문인지, 출세간의 하루는 그저 여여했다. 산문의 안과 밖은 그랬다.   

금정총림, 변화된 안거
금정총림 범어사는 지난해 10월 26일 산중총회를 통해 원로의원 정여 스님을 방장 후보에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그리고 11월 1일 조계종 중앙종회의 인준이 있었다. 

정여 스님은 방장으로 추대된 후 총림을 소통과 화합으로 이끌고 있다. 정여 스님이 방장으로 추대된 후 금정총림은 처음 맞는 동안거에서 여러 가지 변화를 보였다. 새벽 정진 시간을 3시에서 4시로 옮겼고, 삭발·목욕일을 한 달에 세 번에서 네 번으로 늘렸다. 그리고 1시간 정진 후의 10분 포행을 20분으로 늘렸다. 

“정진 후 포행은 휴식과 각자의 용무를 보기 위한 시간인데 10분이라는 시간은 충분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포행은 맑고 고요한 마음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수행의 시간이기도 한데 10분이라는 시간은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좌선으로 경직됐던 몸을 충분히 풀어줄 수 있어야 다시 좌복 위에 앉을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을 조금 늘렸습니다.”

변화에 대한 안거 대중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그런 긍정의 변화는 스님이 오랫동안 출세간과 세간에서 수행과 전법을 통해 쌓은 공부와 그로 인한 내공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지나온 시절을 ‘지나간 시절’로 끝내지 않고, 오늘의 시절에 맞게 가져다 쓰고 있는 것이다.

상구보리(上求菩提)
정여 스님이 산문에 든 지 50여 년, 그 시간은 이제 ‘길’이라는 말로 바꿔 불러야 할 것 같다. 출가 수행자로서 정여 스님의 ‘길’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지극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의 ‘50년’을 정리하면 수행과 불사, 포교와 복지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산문과 산문 밖을 오가야 하는 지극한 불사였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정여 스님은 제대 후 옛 전우의 권유로 출가했다. 범어사에서 벽파 스님을 은사로 불가의 이름을 받았다. 그리고 1975년 7월 15일 부산 범어사에서 지유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고, 1976년 3월 15일 부산 범어사에서 고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정여 스님이 들려준 남해 보리암 복골에서 정진한 일화는 상구보리를 위한 정진력을 알 수 있게 한다. 스님에 따르면 금산 자락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옆을 막아 만든 토굴에서 결사를 했다. 끼니는 미숫가루, 화두는 조주 스님의 ‘무(無)’자였다. 스님은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無’자를 여러 장 썼다. 그리고 그 ‘無’자를 천장과 벽에 붙여놓고 백일정진을 했다.   

1978년 범어사 승가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바랑 하나와 길을 나섰다. 수도암과 도성암에서 화두를 들었다. 수도암에서는 해인사 종정을 지낸 법전 스님을 모시고 1년 반 가량을 수행 정진했다. 

그리고 스님은 1984년 여름에 범어사 금강암으로 돌아갔다. 은사스님의 부르심이었다. 불사가 있었다. 출가 수행자에게 ‘불사’란 그 이름이 무엇이든 한 가지이다. 도량을 일구는 것 역시 무거운 불사다. 스님에게 불사라는 이름 안에는 경중과 원근이 없었다. 스님은 금강암 불사만에 온 마음을 냈다. 그것 역시 ‘정진’이라고 생각했다. 한 가지만 생각하는 것, 그것은 수행이었다. 불사는 8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회향했다.

불사를 마친 스님은 다음날 곧바로 선원으로 향했다. 하동 쌍계사 금당선원. 스님은 입승 소임을 맡아 3년간 정진했다. 그리고 스님은 부산으로 돌아왔다. ‘무’자 끝에는 ‘회향’이라는 또 다른 화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의 공부가 스님을 산문 밖으로 불러냈다. 

스님은 은사스님께 자신의 전법과 포교에 대한 원력을 고했다. 몸과 마음이 고단해서 절을 찾는 대중의 모습이 스님의 마음 한 가운데에 있었다. 스님은 생각했다. 그들은 고단한 이들이다. 고단한 이들을 어찌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하화중생, 그것은 결코 기다려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가가야 하는 일이었다. 스님에게 ‘공부’는 반드시 회향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수행자의 공부에는 많은 인연의 공덕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한철의 공부라도 그 끝에서 원력이 인다면 부처님 말씀에서 멀리 있는 대중을 위해 길을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화중생(下化衆生)
정여 스님은 1995년 부산 영정시장 한복판에 여여선원을 열고 대중과 함께한다. ‘도량’은 부처님을 모시고 대중을 맞는 곳이다. 대중이 도량에 머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하화중생은 시작되는 것이다. 스님의 진심어린 전법은 포교로 이어졌다. 석 달 만에 1400여 개의 인등이 법당을 밝혔다. 

스님은 먼저 교리강좌를 열었다. 주간반, 야간반, 금강경반, 육조단경반 등을 통틀어 1500여 명이 등록을 마쳤다. 불도 부산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스님은 ‘계층포교’에 누구보다도 먼저 눈을 뜬 수행자였다. 철저히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어린이법회를 열었다. 

법당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것이 포교였다. 즐거운 곳. 그곳이 도량이고, 그 도량에서 할 수 있는 불사가 전법이고 포교였다. 하나에서 시작된 법회는 수백 명의 아이들이 참석하는 법회가 됐다. 

스님은 1988년 대한불교교사대학을 설립했다. 어린이포교를 키우려면 전문성을 갖춘 지도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대한불교교사대학을 통해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전문 지도교사를 양성했다. 그리고 2001년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장, 2012년 파라미타청소년연합회 6대회장 소임으로 그 원력을 이어갔다. 청소년 명상프로그램 개발과 보급, 140여 명의 파라미타 명상지도자 배출로 이어졌다.

스님은 불교 복지에서도 그 원력을 이어갔다. 1997년 개금사회복지관장 소임을 시작으로 복지를 통한 포교불사를 시작한다. 1999년 금정구 서동에 무료급식소를 열었고 직접 배식봉사를 하며 16년을 이어갔다. ‘세상을 향기롭게’를 창립해 국제구호도 진행했다. 

“하루 20분 명상하세요… 인생이 달라집니다”

세수 70에 봉암사 등서 수행 정진
“장국죽비 맞았지만, 신심이 났다”
“그대여, 삶의 변화 이끌고 싶은가
그렇다면 경전 독송·명상을 하라” 

‘세상을 향기롭게’가 2019년 진행한 몽골 사회복지시설 지원사업에서 몽골 어린이들과 함께하고 있는 정여 스님.
‘세상을 향기롭게’가 2019년 진행한 몽골 사회복지시설 지원사업에서 몽골 어린이들과 함께하고 있는 정여 스님.

다시, 보리(菩提)
대중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며 20여 년 포교의 길을 걸었던 스님은 다시 수행의 길을 시작한다. 다시 상구보리. 세수 70세. 스님은 다시 선방을 찾았다. 스님은 문경 봉암사 태고선원에 방부를 들였다. 20여 년 만이었다.
 
“쌍계사 금당선원에서 3년 결사를 하고 시중에 나와서 20년을 포교하고, 나이 일흔에 다시 선방 좌복에 앉을 생각을 한 것도 참 다행한 일이고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봉암사 태고선원 서당은 나이도 젊고 힘이 있는 사람들이 주로 정진을 하는 곳이었다. 스님은 왠지 그런 봉암사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꼭 하고 싶었어요. 봉암사 선원은 하루 10시간씩 정진을 하는데, 졸다가 경책하는 스님으로부터 가차 없이 장군죽비를 맞기도 했어요. 10시에 방선 죽비를 치면 좌복 위에 그대로 누워서 자는데, 밤 열두 시에 눈을 떠보면 다른 스님들이 정진하고 있어 덩달아 신심 나게 수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그 후 해남 대흥사, 보경사, 오대산 상왕사에서 2년, 북대에서 1년 반, 통도사 서운암에서 1년 반, 다시 범어사에서 정진했다. 이렇게 제방 선원에서 수행했지만, 수행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스님은 수행 중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 백담사 무문관을 찾았다.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서늘해지고 무거워지는, 무문관. 한 번 문이 닫히면 해제 때까지 나올 수 없고, 한 번 문 밖을 나오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최소한의 공간, 하루 한 끼, 그리고 묵언. 

“자신을 돌아보는 공부가 되었고, 이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길을 가는 정도(正道)라고 깨달았어요. 우리 모두는 자기 길을 홀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홀로 가는 길이 더욱 밝아지고 또렷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출가수행을 하면 처음에는 뭔가 깨달음도 얻고,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수행을 시작하지만, 점차 수행의 시간이 쌓이면 얻을 것이 없음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수행임을 깨닫게 됩니다.” 

대종사의 법
“〈금강경〉은 진리의 실상을 모르고 힘들게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중생에게 지혜를 일깨워 참다운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해주는 경전입니다. 또 〈금강경〉은 밝고 투명한 길을 제시해 줍니다. 또 아픔과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밝혀내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제시해 주는 경전입니다. 부지런히 독송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정여 스님 수행의 한 축은 〈금강경〉이다. 〈금강경〉 공부를 통해 불자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스님은 일상에서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독송하고 외우기를 권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若見諸相) 비상(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첫 번째 게송인데, 이 한 게송의 의미를 진실로 깨닫는다면 삶이 가벼워질 겁니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는 의미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정신적이나 물질적이나 다 허망한 것이고 실체가 없습니다. 상(相)을 초월한 자리에서 곧 여래를 만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어 스님은 부처님의 제자인 박칼리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칼리나가 아픈 몸으로 부처님께 예배한 뒤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때 부처님께서 ‘나를 보려거든 육신인 나를 보지 말고 진리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화를 통해 ‘법을 보는 자가 곧 여래를 보리라’는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제1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 나오는 제2 게송 중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집착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이라는 구절의 깊은 뜻이 궁금하여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청정한 마음을 내되, 형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응당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착처럼 무서운 병이 없습니다. 물질, 욕망, 명예에 마음이 머물면 그것으로 인해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형상에 마음이 머물고 마음을 빼앗기며 살았기 때문에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형상과 물질은 다 그림자이고 허무한 것임을 일러주셨습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벗어버리고 여여(如如)한  마음에 머물러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난해 11월 열린 보현장학회 장학금 수여식에서 정여 스님이 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수여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열린 보현장학회 장학금 수여식에서 정여 스님이 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수여하고 있다.

〈금강경〉에 대해 조금의 의심이 없고 믿는 마음이 청정하다면 그 자리가 곧 부처님 마음이며, 이런 마음엔 앉고, 서고, 가고, 옴이 여여해서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또 깨달음이란 곧 부처님의 마음을 뜻하며, 집착과 소유욕이 없어 맑고 청정하며 걸림이 없는 진여의 마음이기에 자신을 떠나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스님은 〈금강경〉 공부와 함께 꾸준히 명상을 하면 인상이 바뀌고 삶에 변화를 가져온다고도 했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20분 정도는 시간을 내서 명상을 해야 발전이 있어요. 명상하는 도중에 잡념이 일어난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명상이 일어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고, 오직 호흡과 일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호흡에 몰두하다 보면 자연히 잡념은 사라지고 마음은 점점 고요하게 되어요. 마음이 맑아지면 심기가 평안해지며, 그동안 바깥세계로 치달리던 잡다한 생각들이 쉬면서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호흡과 생각이 안정되고 느낌이 편안해지면 고통과 괴로움은 사라져요. 그러면 표정이 바뀌고, 인상이 달라지고 인생도 달라집니다.” 

4차 혁명시대, 밝은 부분도 있지만 어두운 부분도 많은 이 시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시대에 ‘불교’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의미가 있다면 불교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AI에게 밀려나서 사람이 할 일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물질을 앞세워 살다보니 인간성이 상실되는 삭막한 세상입니다. 본래 마음은 깨끗하고 맑고 시비도 없고 분별도 없는데 이런 마음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욕망과 욕심은 불안의 원인이 되고,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어리석은 마음 바탕 위에서 일어난 생각의 그림자에 있습니다. 괴로움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물질, 명예, 욕망은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바탕 위에 그려진 생각의 그림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글로 적고 입으로 내기는 쉬운 법이지만 이루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출세간과 세간을 경계 없이 오가며 부처님 제자로 살아온 스님의 법향은 감출 수 없는 꽃향기처럼 대중 속에 흐르고 있다. 한파주의보로 소란스러웠던 하루. 산중은 선지식의 법향으로 여여, 또 여여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