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천년왕국 신라’ 시작점

6개 부족 연합체였던 초기 신라
혁거세 부족이 경주 남산 근접해
남산 탑동 ‘나정’ 신라 신궁 확인
경주 남산, 신라시대 정치 중심지
그 신령스러움은 불교에게 흡수돼

신궁으로 추정되는 나정의 팔각건물터. 경주 남산은 신라 탄생과 더불어 정치적 중심지였다. 
신궁으로 추정되는 나정의 팔각건물터. 경주 남산은 신라 탄생과 더불어 정치적 중심지였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0년 발간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경주 남산 64개의 계곡 중 60개에서 296곳의 사찰 터와 불상 등 불교 유물이 377점 발견됐다. 또한 경주남산연구소에서 발간한 남산 안내서의 책자에는 150곳의 사찰 터와 100여 기의 불탑, 130구의 불상 그리고 22기의 석등과 연화대 19점 등 700여 점의 유물과 유산이 있다고 했다. 이 외의 경주 남산 사찰 터와 불상 등 발견된 개수를 정리한 연구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자칭 경주 남산에 푹 빠진 연구자이며 또한 남산 불교 매니아(출가자) 입장에서 공식적으로 공인되고 일관된 연구 자료가 없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찌 되었건 남북으로 8㎞ 뻗어있고 동서로는 4㎞이며 가장 높은 봉우리가 494m인 이 작은 산에 이처럼 많은 사찰 터와 불상이 곳곳의 바위에 조성되었다는 것은 경외감과 함께 “신라 사람들은 왜 남산의 바위마다 부처님을 모셔 불국정토로 조성했을까”라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인류 문명의 기원에 관한 인문학적 연구내용이 필요하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인류는 신을 창조하여 문명을 꽃피운다고 말했다. 또한 요즘 인기 있는 뇌과학 연구 중 박문호의 〈뇌 생각의 출현〉이나 데이비드 이글먼의 〈우리는 작자의 세계가 된다〉에서 보면 ‘뇌는 생각을 출현시켰으며 이 생각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불교도의 입장에서 ‘나’라는 존재를 해체한 ‘오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종합하면 변화하는 존재인 ‘나’는 ‘신’을 창조하며 문명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신에 관한 생각은 인간보다 힘이 강한 동물에서 하늘이라는 절대적 존재로 나아갔다. 이것은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신에 관한 생각의 발전이다. 한국의 역사도 이와 같다. 단군신화를 보면 하늘을 섬기는 집단인 환인·환웅·단군이 호랑이나 곰을 믿는 집단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인도와 서양 그리고 동북아 신앙의 인문학적인 내용 또한 마찬가지다. 

인도의 신화는 ‘인도 아리안’ 민족의 역사일 수 있다. 신을 믿는 민족들이 아리안의 민족에게 지배되는 과정에서 신화가 만들어진다. 신화는 그저 창작된 것이 아니라 집단의 이동 중 타 집단과의 만남에서 타협하고, 다투고,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내용의 역사이다. 인도는 인도 아리안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지배 집단이 되었다. 그렇기에 아리안이 믿는 신은 최상의 좋은 신인 지배적 신이 된다. 반면에 아리안 집단에게 안 좋은 인상을 주었던 집단의 신은 안 좋은 신이 된다. 

그리스 신화와 인도 힌두교의 신화가 비슷한 것은 서쪽으로 이동한 아리안 집단이 그리스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리스 또한 하늘의 절대적 신을 숭상한다.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서양에선 새로운 종교가 탄생한다.

유대교에서 시작된 기독교와 이슬람이 그것이다. 그리스로 대표되는 신화 속 신들과 인도의 신은 지배 집단의 신과 지배당하는 신이 통합되면서 종교 문화를 발전시킨다. 또한 많은 종교의 신이 종합되면서 다양성이 인정되고 융성하면서 인류 문명은 꽃을 피운다. 인도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종교의 믿음과 신앙의 다양성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바로 지배 집단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통합의 정신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유대교를 뿌리로 둔 기독교와 이슬람은 좀 다르다. 

유대인은 언제나 지배당하던 집단이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신 또한 다른 집단의 신을 지배했던 적이 없다. 유대인의 신화에서 유일신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 있으며 믿음을 강조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즉 타민족의 신에게 지배당하는 것은 유대인의 신인 ‘유일신 창조주’와 ‘여호와’가 믿음을 시험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을 통해 타 집단에 지배당하더라도 그 집단의 신이 자신들이 믿는 신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러한 유대교 유일신의 교리는 집단을 유지하는 것에는 큰 힘이 된다. 이러한 유대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나온 것이다. 기독교는 지배 집단이었던 로마에서 ‘예수’를 탄생시켰으며 로마가 단일 종교로 인정하면서 서양을 대표한 종교가 된다. 또한 아랍 민족이 주축이 되어 유대교를 뿌리로 한 이슬람은 탄생한다. 이슬람 종교를 통한 통합의 정신은 지금의 이슬람 문화권을 만들어 가는 힘이 되었다.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북아의 종교 또한 큰 틀에서 하늘이라는 유일한 정신에서 모든 통합이 이루어진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하늘이 내리는 명령인 ‘천명’이 곧 도덕이기에 사람들은 이것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북아의 사상이나 철학 또한 하늘이라는 ‘유일신’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늘을 숭상하고 신성하게 여긴 것은 우리 한민족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늘의 숭상은 산의 숭상으로 이어진다. 산의 숭상은 다시 신비스러운 바위의 숭상과 연결된다. 하늘은 사람이 다가설 수 없다. 그렇기에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인 높은 산은 하늘과 통하는 통로가 된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이 산 정상에 있는 것처럼 한민족이 산을 숭상한 이유도 여기 있다. 그렇기에 신라인이 산을 숭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모습이다. 

경주 남산은 신라의 탄생과 관련된 내용을 품고 있다. 경주 남산의 중요성은 여기서 시작된다. 

신라는 여섯 개의 부족이 건국과 함께 나라를 이끌었는데 이 중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과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이 남산을 접하고 있었다. 알천 양산촌은 남산을 중심으로 서북쪽에 있는 부족인데 신라 최초의 왕인 박혁거세의 탄생지가 이곳에 있다. 

신라 왕성인 반월성 밑 경주 남산 탑동에는 나정(蘿井)이 있다. 바로 이곳이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으로 전하는 장소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 6부의 사람들이 남쪽을 바라보다 찾게 된 양산(楊山)의 나정에서 알을 발견했는데 여기서 박혁거세가 탄생했다고 전한다. 알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하늘 즉 높은 곳을 상징한다. 새는 하늘과 소통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렇기에 알에서 탄생한다는 것은 하늘과 연관된 높은 존재라는 의미를 갖는다. 〈삼국유사〉 ‘기이제1-신라시조혁거세왕’에는 다음이 이야기가 전한다.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 숲속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래서 가서 살펴보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깨뜨리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이에 거두어서 길렀는데, 나이 십여 세가 되자 쑥쑥 커서 남들보다 일찍 성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6부의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떠받들었는데, 이때 이르러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 남산 서쪽에 있는 산기슭(지금 창림사)에 궁실을 짓고.

또한 남산의 서쪽에 궁궐을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창림사 터로 판단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남해 차차웅’에는 박혁거세의 큰아들인 차차웅이 왕위를 잇고 서기 6년인 남해 차차웅 3년에 나정 자리에 시조를 기리는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소지 마립간’에서는 487년에 ‘소지마립간이 시조가 탄생한 곳에 신궁을 설치한다’라고 했다. 2000년대 나정의 발굴조사에서 팔각의 건물터가 발견되면서 나정에 신궁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됐다. 경주 남산은 신라의 첫 시작이 이뤄진 중요한 산이었다.

신라는 중요한 결정 사항이 있을 때는 6개 부족의 장이 모여 전원 합의에 의해 결정하는 화백회의를 두었다. 이 화백회의가 경주 남산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삼국유사〉 ‘기이제1-진덕왕’에 보면 진덕왕(재위 647∼654) 시기 경주 남산에 있던 오지암(吾知巖)에서 화백회의를 열었다. 

왕의 시대에 알천공·임종공·술종공·호림공·염장공·유신공이 있었는데, 그들은 남산 오지암(오지암)에 모여서 나랏일을 의논했다.

오지암은 산에 있는 작은 암자를 의미한다. 또한 산이 곧 부처님 세상이기에 전각이 없는 암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산에는 전각의 바닥을 두르는 전돌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찰에서 보이는 전각의 마루는 조선 중기 이후에 유행한 것이다. 고려 이전의 전각에는 마루가 아닌 전돌로 바닥을 마무리했다.

766년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는 ‘산청 석남암사지(石南巖寺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던 석남암도 ‘암(巖)’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곳 역시 석조 비로자나불좌상을 조성하고 전각은 없었던 암자로 보인다. 암(巖)의 의미는 더 연구해 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 어찌 되었건 경주 남산에는 불상만 조성하고 전각은 조성하지 않았던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경주 남산은 신라의 탄생과 더불어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남산에 오르면 경주의 반월성과 중심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지금까지 신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경주 남산은 신라의 탄생과 함께한 중요한 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후 불교가 들어오면서 경주 남산의 신령스러움은 불교가 흡수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경주에 있는 신라 최고의 산신이 머문 선도산과 김유신의 일화가 있는 단석산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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