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부처님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부처님 집착 말라’ 불자 종종 만나
종조 모르고 사상 등 알 수 있을까
부처님을 창조주로 보는 불자들은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구복 기원해
잘못된 샛길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
우린 부처님 일대기를 읽어야 한다

그림 최주현
그림 최주현

몹시 추운 겨울 밤, 중국의 어느 사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유랑하다가 얼마 전부터 이 절에 머물던 스님 한 사람이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주지스님이 넉넉하게 땔감을 마련해주지 않았나 봅니다. 스님은 달달 떨면서 군불을 좀 땔까 하며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봤지만 땔감은 눈에 띄지 않았지요.

하긴 수행하겠다는 사람이 추위를 이기지 못해 온기를 찾아 군불을 지필 생각만 한다면 너무 나약한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주지스님도 이런 마음에서 방에 불을 넣어주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런데 너무 추웠던 스님은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이 나무로 만들어졌음을 알고, 냉큼 내려다 도끼로 쪼개어 장작으로 삼은 겁니다. 주지스님이 굴뚝에서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놀라서 달려갔고, 객승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음을 알았지요. 

“어찌 성스러운 부처님을 도끼로 패서 땔감으로 쓸 수 있느냐!”

노발대발한 주지스님이 소리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자 이 객승은 용서를 빌기는커녕 이미 하얗게 쌓인 재를 부지깽이로 뒤적뒤적하기만 합니다. 이 모습이 궁금해진 주지스님이 ‘뭘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이 스님 대답이 천연덕스럽습니다.

“우리 부처님 다비(화장)했는데 사리가 있는지 찾는 중입니다.”

하도 천연덕스러워 진작에 스승으로부터 천연(天然)이란 이름을 받은 단하 스님 이야기입니다. 불상도 땔감으로 쓰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 무엇이라도 절대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 대상이 부처님이라도 말입니다. 심지어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고 외치는 스님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심오한 선문답을 풀어드리기 위함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불자들 입에 오르내리다보니 부처님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제법 있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부처님에 집착하지 말라고 종주먹을 들이대는 ‘불자’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지 부처님, 부처님 하고 백날 찾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요. 붓다는 아무것도 아니다, 찾으려 하는 순간 상(相)에 사로잡혀서 정말로 진짜 붓다를 만나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불자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시시하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법신불이니 자성불이니 말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해서 몇 가지 빤한 에피소드만 접하고는 다 안다고, 더 알 것이 뭐 있느냐고, 다 옛날이야기 같은 것이니 수행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불자들을 종종 만납니다. 

부처님을 대하는 참 희한한 자세 첫 번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2600여 년 전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없었다면 이 모든 사상과 주의주장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을까요? 아무리 밝고 깊은 안목과 혜안을 지니고서 선, 중관, 유식, 정토, 법화, 화엄 등등의 심오한 사상을 펼친다 해도 그 시작은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모르고서 무조건 집착하지 말라고 외치는 것이야말로 허공에 대고 색칠을 하겠다고 덤비는 무모한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정 스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 사람을 모르고 그의 사상이나 가르침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불타 석가모니의 경우처럼 그의 삶이 곧 그 사상을 나타낸다면 더욱 그렇다. 그가 한평생을 어떻게 살았으며, 그 시대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가 곧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그리고 그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는 불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이 될 것이다.”
- <불타 석가모니(와타나베 쇼코 지음)> 역자 서문에서)

부처님의 정신은 부처님의 입을 통해 말씀으로 우리에게 들렸고, 행동으로 몸소 진리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러니 석가모니 부처님 생애를 어떻게 읽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불자는 부처님이 되겠노라 다짐하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이 되겠다면서 부처님이 실제로 인도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셨는지를 면밀하게 알아보지 않는다면 어불성설입니다. 

그런 반면, 부처님을 창조주처럼 여기는 불자들도 많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그분께 열심히 빌면 다 들어주고 이뤄준다고 여깁니다. 내 행복도 부처님이 주시고, 내 불행도 부처님이 치워주신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착하게 살면 부처님이 상을 주고, 나쁜 짓하면 부처님이 벌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자식이 잘 되기를 부처님 앞에 와서 빌고 남편이 승진하기를 부처님에게 빕니다. 아픈 몸 건강하게 해 달라고 빌고, 죽음이 엉겁결에 나를 찾아오지 않게 해 달라고 빕니다. 빌고, 빌고 또 빕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을 대하는 참 희한한 두 번째 자세입니다. 그 간절한 믿음을 비웃으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저 역시 힘없는 어리석은 범부중생인지라 불보살님을 귀히 모시고 존경하고 그 길을 따라가려는 불자입니다. 힘에 부치면 부처님께 의지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 생각해 보셨나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눈물을 흘리며 붙잡는 부모를 뿌리치고 집을 빠져나온 분입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첫 자식을 낳았는데 그 곁에서 손을 잡아주고 공동육아를 하기는커녕 모자가 곤히 잠든 시간에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몰래 성을 빠져나온 사람입니다. 그런 분인데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자식 잘 되게 해달라고, 남편 잘 되게 해 달라고, 우리 부모님 만수무강케 해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죽자 식음을 전폐한 부모에게 부처님은 실제로 무슨 말을 건넸을까요? 늙은 배우자의 임종에 즈음해서 부처님은 어떤 위로의 말을 알려주었을까요? 외모에 집착해서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여인에게는? 재산을 다 물려준 뒤 자식들의 부양을 받지 못해 살아갈 의욕을 잃은 노인들에게는?

간절하게 기도하는 오늘의 불자들을 바라보면서, 정작 석가모니 부처님이 2024년 이 땅에 오셔서 이런 소망을 품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어떤 해법을 안겨주실까 궁금해집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사는 이 지구에 불교를 시작한 석가모니 부처님이 진짜로 어떻게 살다 가셨는지, 누구를 만나서 어떤 말씀을 들려주셨는지, 날마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뜨고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지, 온종일 무슨 생각을 하며 사셨는지, 그리고 다 늙어 인생의 마지막 자리를 찾아갈 때의 심정과 마지막 당부는 무엇이었는지 이런 것을 한번은 진지하게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영국의 비교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은 “붓다의 삶은 그의 가르침과 융합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 삶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곤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에서)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는 인간적인 문제가 늘 생기게 마련인데 여기에는 초현실적이거나 궁극적인 진리보다 인간적인 해법이 더 실질적인 도움을 줍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땅을 맨발로 저벅저벅 밟고 다니신 80년의 생애를 참고하면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것에 대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경전이라는 거대한 숲에 두 갈래 길이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스스로 깨닫겠다는 자력문과 기도하며 기대겠다는 타력문입니다. 자력문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 자칫 빠져들기 쉬운 샛길이 바로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이라며, 추울 땐 목불(木佛)도 땔감으로 써야 한다고 호기를 부리는 자세입니다. 타력문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 자칫 빠져들기 쉬운 샛길은 무조건 빌면 다 된다며, 행불행도 저분이 주신다며 맹목적으로 빌기만 하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경전을 읽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저는 말합니다. 자력문의 길이든 타력문의 길이든 어떤 길을 선택하시더라도 가장 먼저 읽어야 할 경전은 부처님 일대기라고 말입니다. 

부처님 일대기를 담고 있는 경전을 불전(佛傳)이라 하는데 그 숫자 역시 아주 많습니다. 내용도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거북할 정도로 신화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경전도 많습니다. “이건 그냥 아이들이나 읽을 만한 우화잖아”라고 여겨질 만한 내용의 불전도 있습니다. 하나하나 따지지 말고 그냥 글자 적힌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신화적인 내용은 걷어내고 인간적인 면모만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처님 일대기 하나를 말하는 데에도 역시 노란 숲속 두 갈래 길처럼, 입장이 이렇게 나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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