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라는 미명하에 
과학 절대화의 환상이 
가속화되는 현대 사회
‘正見’으로 허상 탈피를

우리 시대는 거대한 환상을 마주하고 있다. 이 환상은 그럴듯한 좌표를 제시해주고 있다. 과학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환상은 과학에게 전능이라는 멋진 옷을 입혀준다. 과학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데이터와 실험실 증거들에 힘입어 설득력을 드높이고 있다. 과학에 대한 맹신은 기묘한 선험적 도식화 과정을 거치면서 윤리와 철학을 뒷자리로 물러서도록 강요하고 있다. 세상은 과학의 답변을 해답으로 받아들이며, 다른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으려 한다.

얼마 전까지 욕망은 ‘타자의 욕망’으로 이해됐다. 이 타자와 관련된 질문들은 주객이 전도돼 데이터는 인간에게 무엇인가로 변경되고 있다. 디지털 데이터의 지시에 충실한 인간은 곧 호모 디지털리스(Homo digitalis)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과학으로 무장한 문명은 온갖 데이터를 제시하며 현대인을 조작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인간은 세련된 인공지능들을 마주하며 전능한 과학에게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묻고 있는 현실이다. 현대인은 사유능력을 포기하고 빅데이터의 지시에 충실하고자 한다. 과학은 욕망을 해석하고 메뉴로 제시하며 욕망에 대한 사용법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환상이 실제로 지향하는 것은 동일성을 지닌 주체를 형성하려는 시도이다. 인간에 의하여 제작되고 인간의 내면세계를 모방하여 기능적으로 인간화되던 인공지능은 이제 스스로 현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주체의 동일성으로 무장한 인공지능은 타자화된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화된 과학 자신을 만족시키며 인간을 배제하는 형국이다. 앞으로 과학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은 철저한 소외일 것이다. 과학은 스스로를 위해 기능할 뿐, 인간은 배제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대의 최첨단 과학은 인류에게 진정한 동반자가 되지 못한다. 순수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인간의 현실적 요구로부터 괴리되어 있다. 엘리트 과학자들은 호기심 그 자체를 위해 연구하기 때문이다. 응용과학 분야에서는 과학적 연구들이 철저히 상업화되어 자본의 질서에 편승하며 복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윤추구를 위한 과학기술의 실태가 그것이다. 

과학기술은 기존 상식의 틀 위에 덧입혀진 선입견에서 벗어나 온갖 도구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때 꽃피어난다. 가령 비윤리적 생체실험들은 인간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자연은 인간의 상상력보다 훨씬 더 풍부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탐구라는 미명하에 과학 절대화의 환상이 가속화된다. 우리 시대는 과학이라는 새로운 권위가 구석구석 작동하며 우리를 옥죄고 있다. 

생태적 윤리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불교의 시선은 이러한 족쇄가 현실인지 검토하는 일이다. 인간의 마음은 결코 백지상태가 아니다. 진화과정에서 직면했던 생존경쟁으로부터 형성된 업식이 내재된 공간이다. 즉 적자생존과 적응이라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신경 회로의 총합이 탑재되어 작동하는 곳이다. 이처럼 생명이 데이터의 총합이 아니듯, 생태계는 기술이 조작할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생명과 생태계를 따뜻하게 보듬고자 하는 실천이 커다란 의미의 자비관이 아니던가? 과학과 종교가 갈등 없이 동행할 수 있다는 주장들은 무엇인가? 불교는 과학에 대하여 유난히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의문을 가져야 한다. 올바른 시선, 즉 정견에 의하여 과학만능이라는 환상의 허울을 벗기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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