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다 죽는 것이 진정으로 사는 길”
“中道 깨닫고 알라…그럼 삶이 편안해진다”

‘선악 내려놓으라’는 충고에 발심
혜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수행
조사전서 성철 스님 경책에 긴장
선배스님들 정진력에 함께 정진해

혜암 스님 ‘수좌정신’ 韓불교 필요
“공부는 간절히 애써야 성취 가능
간화선 위기? 공부하는 사람 문제”

善惡·苦樂 양변 떠나는 것이 ‘중도’
공부하려면 ‘중도연기’ 이해가 필요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울 올해 총선
시비장단 벗어난 중도의 삶을 살아라”

원각 스님은… 1966년 해인사 중봉암에서 혜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7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이후 구족계를 받았다. 수계 후에는 해인총림 선원 등 제방에서 혜암, 성철, 전강, 경봉, 구산 스님 등을 모시고 수행정진했다. 거창 고견사 주지, 해인사 원당암 감원 및 달마선원장, 해인총림 유나,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으며 2015년 3월 해인총림 9대 방장으로 추대된 이후 수많은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원각 스님은… 1966년 해인사 중봉암에서 혜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7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이후 구족계를 받았다. 수계 후에는 해인총림 선원 등 제방에서 혜암, 성철, 전강, 경봉, 구산 스님 등을 모시고 수행정진했다. 거창 고견사 주지, 해인사 원당암 감원 및 달마선원장, 해인총림 유나,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으며 2015년 3월 해인총림 9대 방장으로 추대된 이후 수많은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부처님 법(法)이 천강(千江)에 골고루 스미듯 세상을 얼려버린 추위도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움츠러들게 한다. 특히나 겨울바람이 매섭기로 소문난 가야산 동장군에게 자비란 없는 듯하다. 말 그대로 뼈를 때린다. 두 겹 세 겹으로 몸을 감싼 목도리가 자기소임을 제대로 못해 민망할 정도.

해인사는 여전했다. 웅장하고 위엄 있는 가람과 각자의 위치에서 흐트러짐 없이 정진하는 대중들의 모습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비로자나 부처님께 인사를 올리기 위해 해인사 대적광전으로 향했다. 이날은 마침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 스님의 22주기 추모다례가 있던 날. 대적광전을 가득 메운 사부대중들은 ‘공부하다 죽어라’던 선지식(善知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다.

해인총림의 ‘오직 정진’ 가풍
다례가 끝나고 퇴설당(堆雪堂)을 찾았다. 바로 해인총림 방장 원각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스님의 편안한 미소에 한기(寒氣)가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원각 스님은 2015년부터 총림 대중들을 이끌고 있다. 평생 정진해 온 수행력을 바탕으로 원만하게 산중을 이끌고 있다는 평이다. 그래서인지 스님은 대중들의 정진부터 강조했다.

“이곳 퇴설당은 해인총림의 가풍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때로는 대중들의 대중선방으로 또 때로는 어른스님들의 주석처였던 퇴설당은 ‘쌓여있는 눈 무더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눈덩이처럼 스님들은 오직 참선에 매진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어요.

또 하나 의미를 찾자면 달마 스님에게 인가를 받은 혜가 스님의 구도정신이 살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달마 스님이 소림굴에서 면벽수행을 하고 있을 때 허리까지 쌓이는 눈을 맞으며 도(道)를 구했던 그 혜가 스님의 간절한 정신 말입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옛 선시를 하나 전했다.

入雪忘勞斷臂求(입설망로단비구)
覓心無處始心休(멱심무처시심휴)
後來安坐平懷者(후래안좌평회자)
粉骨亡身未足酬(분골망신미족수)

눈 속에서 괴로움 잊고 팔 끊어 구하니
마음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비로소 마음 편하구나.
훗날 편안히 앉아 평온한 마음을 누리는 이여
뼈를 부수고 몸을 잊어도 보답하기에는 모자라네.

‘퇴설당 정신’을 음미하며 먼저 스님의 수행여정에 대한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승의 기일에 듣는 사제(師弟) 인연이 흥미진진했다.

선악(善惡)의 양변을 내려놓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해인사 약수암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해인사 중봉암에 계시던 도림 스님(훗날 봉철 스님)이 자주 약수암에 다녀가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착하게 사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착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죠. 그러던 어느 날 도림 스님이 ‘착한 것도 내려놓고 악한 것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발심(發心)이 됐어요.”

스님은 발심의 힘으로 중봉암에 올라 삭발을 하고 출가했다. 1966년의 일이다. 시간이 지나 1966년 동안거가 끝나자 혜암 스님은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에서의 정진을 마치고 중봉암에 왔다. 원각 스님은 처음 만난 혜암 스님에게 출가하고자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했다. “선과 악, 양변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그래서 출가하고 싶습니다.” 혜암 스님은 더 듣지 않고 그 자리에서 출가를 허락했다.

“은사스님께서 저를 받아주실 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중노릇 잘 못하면 상좌를 잘못 가르친 스승도 같이 지옥에 떨어진다. 그러니 중노릇 잘하라’고 하시며 ‘모든 것은 때가 있으니 때를 놓치지 말고 젊을 때 열심히 공부하라’ 하셨습니다.”

중봉암에서 원각 스님은 혜암 스님과 한 방에서 같이 생활했다. 저녁 9시쯤 자 새벽 2시 30분쯤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예불 올리고 정진하고 또 가끔 스승의 법문을 들으며 공양 준비를 했다.

“큰스님께서는 참선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공부하다 죽어라, 이 공부를 해야 수지가 맞는다’고 하셨죠. 이와 함께 인과(因果)를 강조하셨습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하시며 스스로 올바르게 살고 철저하게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원각 스님과 혜암 스님은 정진 외 시간에는 울력을 많이 했다.

“큰스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이치에 맞게끔 하라고 하시며 나무 자르고 장작 패고 밥하는 법까지 일러주셨습니다. 하루 종일 일을 할 때는 공양간 바닥에 상을 펴서 같이 밥을 먹고 다시 나가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정진을 했습니다.

저는 힘들고 피곤해 죽겠는데 큰스님은 항상 여여하셨습니다. 밤새 장좌불와를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깜짝 깜짝 놀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중봉암에서 은사스님께 유일하게 배운 게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이었는데 신심(信心)이 생기고 좋았습니다. 하루는 은사스님께서 부르시더니 어떤 구절이 좋으냐고 물으셔요. 그래서 ‘평등성중 무피차 대원경상 절친소(平等性中 無彼此 大圓鏡上 絶親疎)’를 꼽았죠. ‘평등한 성품 가운데는 너와 내가 따로 없고, 우리의 본래 마음바탕에서는 가깝고 먼 게 없다’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저에게 직접 제 법명을 한번 지어보라고 하세요. 생각 끝에 성각(性覺)이 어떠냐고 여쭈니 자신과 같은 돌림(性觀)이라 안 된다고 해서 지금의 법명 원각(源覺)을 지어 승낙을 받고 쓰게 됐습니다. 하하.”

원각 스님은 1967년 계를 받은 뒤 본격적인 납자(衲子)의 길을 시작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그해에 해인사에는 해인총림이 개설되었다. 방장 성철 스님, 수좌 석암 스님, 주지 지월 스님, 유나 혜암 스님, 율주 일타 스님, 강주 지관 스님 등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이 주요 소임을 맡았다.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도 현장에서 들었다.

“백일법문은 오후 1시에 시작해서 매일 2시간씩 진행됐습니다. 정말 그 열기가 대단했어요. 성철 스님께서는 불교의 모든 것을 ‘중도(中道)’로 회통해서 법문을 하셨습니다. 엄청난 대중이 몰려들었습니다. 지금 해인사 선원에는 30명 남짓 사는데, 그때는 70명 이상이 선방에서 정진했어요. 숫자가 많아 좀 고생했지만 그래도 모든 대중이 신심 나서 공부했습니다.”

원각 스님은 출가 직후부터 정진의 고삐를 당겼다. 결코 시간을 낭비할 수 없는 시기였다고 한다. 스님은 해인사 선원에서 연달아 세 철 동안 정진했다.

“예전 해인사에는 선방이 3개였습니다. 조사전은 용맹정진, 퇴설당은 가행정진, 선열당은 일반 정진실이었습니다. 성철 스님께서 조사전부터 경책을 하시면 큰소리가 들립니다. 죽비로 사정없이 경책을 하실 때였으니까요. 대중들이 제대로 정진을 안 하면 ‘밥도둑놈들이 잠만 잔다’고 호되게 경책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퇴설당과 선열당의 대중들은 더 긴장해서 자세를 다잡곤 했습니다.

당시는 대중이 많아 방이 부족했습니다. 노장님들도 큰방에서 같이 생활했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자야 했습니다. 저는 선열당에서 정진했는데 자다가 눈을 뜨면 이미 대중의 3분의 1은 앉아서 정진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같이 정진하곤 했습니다.

그때는 점심공양을 마치고 대중들이 큰방에 다 모여서 차담을 함께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어서 분유를 타서 한 잔씩 나눠 마시기도 했습니다. 어른스님들이 다 같이 오셔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힘이 들어도 그때는 정진 분위기도 좋고 대중들이 화합해서 잘 지냈습니다.”

해인사에서의 정진 후 스님은 군대에 다녀왔다. 강원도 화천의 포병부대에서 생활하면서도 스님은 ‘출가자’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근무할 때 쓰는 모자에 화두 ‘마삼근’과 ‘숙맥’을 적어놓고 지냈다고 한다.

“바보처럼 오로지 공부하자는 의미였는데 동료들은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하하.”

제대 후에는 지리산 상무주암, 봉화 각화사 동암, 남해 용문사, 하동 칠불암, 남원 실상사 백장암 등에서 혜암 스님을 시봉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스님은 또 통도사 극락암, 순천 송광사, 문경 봉암사, 부산 범어사, 평창 오대산 상원사, 강진 백련사 등의 선원에서 정진을 이어갔다.

해인총림 선원에서 대중들을 경책하는 원각 스님.
해인총림 선원에서 대중들을 경책하는 원각 스님.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중도정신
원각 스님은 혜암 스님의 ‘수좌정신’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은사스님께서는 공부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어요. 첫째는 밥을 많이 먹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공부하다 죽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안으로 공부하고 남을 도와줄 것, 넷째로 주지 등 일체 소임을 맡지 말 것, 다섯째로는 일의일발(一衣一鉢)로 청빈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전 혜암 스님이 주석했던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 옆에는 ‘공부하다 죽어라’ 비(碑)가 서 있다.

“공부하다 죽어라. 공부하다 죽는 것이 사는 길이다. 옳은 마음으로 옳은 일 하다가 죽으면 안 죽어요.”

해인사 원당암에 서 있는 공부하다 죽어라 비.
해인사 원당암에 서 있는 공부하다 죽어라 비.

원각 스님의 말씀은 자연스럽게 공부 방법으로 이어졌다.

“화두 공부는 우리의 근본 자성자리를 깨우쳐서 그것을 바탕으로 활발하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지혜롭게 살 수 있어요. 근본 마음 바탕을 깨우쳐 그 바탕에서 생활하지 못하고 바깥일에 끄달려 생활하게 되면 항상 경계에 휘둘려 주인공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과 소통도 못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갈등이 생깁니다. 근본 바탕자리를 깨닫게 되면 무엇과도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이치를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역천겁이불고 긍만세이장금(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즉, 영겁의 시간이 흘렀어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의 앞날이 오더라도 늘 지금이다’고 했습니다. 진리는 시공을 초월합니다.”

그렇다면 화두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원각 스님은 ‘의심’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공부를 하려면 먼저 부처님 핵심 사상인 중도연기(中道緣起)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실참을 해야 합니다. 공부는 실제생활에 적용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부와 생활이 따로 가면 안 됩니다.

실제로 정진을 할 때 화두를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하는 것은 맞지 않아요. 공부에 대해 조금 안다고 자만하게 되면 그걸로 공부는 끝입니다. 중요한 것은 화두에 대한 대의심입니다. 의심이 살아 있어야 화두도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공부는 간절하게 애써서 해야 됩니다. 이 공부를 성취해야 인생문제, 생사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수승한 공부법이라고 알려진 간화선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고 있다. 간화선의 빈자리를 파고든 수행법이 한국불교에 정착한 지 이미 오래된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 원각 스님은 “공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공부를 하는 사람과 그 방법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간화선은 사실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공부법입니다. 그런데 역대 조사스님들의 경우를 보면 화두 공부가 그렇게 어려운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화선에 대해 비판적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신심이 부족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애써 정진하지 않으면서 쉽게 포기하려 합니다. 정말 이 공부가 아니면 안 된다는 그런 마음으로 정진하시기를 바랍니다.”

올해는 국회의원 총선거를 비롯해 크고 작은 일들이 많다. 종단적으로도 많은 일정들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갈등이 아닌 대중의 화합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원각 스님은 주저없이 중도(中道)를 꼽았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고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변(二邊)을 버린 중도(中道)를 정등각했다’입니다. 이 초전법륜이 바로 부처님의 근본법입니다. 부처님의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입니다.

유무(有無)와 선악(善惡), 고락(苦樂) 등의 양변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 중도입니다. 마음의 근본 바탕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도입니다. 그러면 삶이 편안해집니다. 속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내 본래의 마음자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회복한 뒤에 그 바탕에서 생활하는 것이죠. 그럼 ‘나’라는 것도 세울 게 없습니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선거전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경쟁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옳다’고만 하는 아집을 버리고 역지사지의 정신을 살려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면 많은 국민들도 큰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서로를 인정해야 합니다. 시비장단에서 벗어난 본래의 마음바탕에서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스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을 놓칠 수 없었다. 스님 말씀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약속된 시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천천히 해도 된다”며 스님은 객을 걱정했다. 자리를 정리하고 퇴설당 뒤편으로 가니 원각 스님의 거처 화안당(和安堂)이 나온다. 스님의 자비로운 미소가 잘 어울리는 화안당에 겨울바람 사이로 따뜻한 볕이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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