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당 생전 자료들 총망라
국학적 시각으로 규명해
불교인, 차인 면모들 살펴

효당 최범술의 불교와 차도/채정복 지음/민족사/5만7000원
효당 최범술의 불교와 차도/채정복 지음/민족사/5만7000원

효당 최범술(1904~1979) 스님은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이다. 불교인이며 원효학 연구자였고, 독립운동가였으며 제헌의원을 지낸 정치가다. 또한 현대 차문화의 중흥조이다. 

효당은 우리가 영화로 잘 알고 있는 ‘박열’과 함께 흑우회(불령선인회)의 일원이 돼 일본 천황 암살을 위해 중국 상하이에서 폭탄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효당(曉堂)은 원효(元曉) 스님의 효(曉)자 호로 사용할 정도로 원효 교학 복원에 평생을 바치며, 국민대학, 해인중고등학교, 해인대학을 창설했다. 

그는 전통적인 의미의 탈속적인 고승이 아닌 근대 불교계의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다. 이 같은 효당의 생전 자료를 총망라해 국학적 시각으로 규명한 연구서 〈효당 최범술의 불교와 차도(茶道)-효당 최범술의 생애와 국학 연구〉가 발간됐다. 

이 책은 효당의 일생을 통한 활동과 연구의 성격과 지향점이 ‘국학’으로 귀결하였음을 조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국학은 단순한 전통의 계승이 아닌, 근대적인 민족적 자아의 재발견을 말한다. 나아가 그 지향점이 ‘살아있는 사람’이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효당은 부처와 중생을 나누어 성불(成佛)을 어떻게 하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직면한 일상사의 소중함과 자연스러운 순리와 부지런한 정진을 강조하며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효당은 이를 ‘대사회성(大社會性)’이라고 하였다. 
 

불교인으로서 효당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해인사 인경(印經, 목판을 인쇄해 책으로 만드는 작업) 도감을 맡아 〈고려대장경〉 인경을 불교계의 동지들과 함께 6개월간 작업해 11월에 완성했다. 이때 효당은 국간판(국가가 제작한 경판) 대장경 외에 그동안 해인사 장경판고의 동서재에 방치돼 오던 사간판(지방관청이나 사찰에서 제작한 목판)도 빠짐없이 인간(印刊)하여 1만1391판에 달하는 ‘해인사 사간 루판 목록(海印寺寺刊鏤板目錄)’을 완성했다. 

이 사간판에서 국간판보다 훨씬 정교하고 우아한 요나라 대안본(大安本)과 수창본(壽昌本)이 발견됐고, 그때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원효 대사의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상권판 4쪽, 고려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완질, 의상 대사의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등이 발견돼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국간판 고려대장경이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 중심으로 구성된 데 비해, 이들 사간판은 경전의 주석, 중국과 한국 승려들의 개인 찬술, 고승의 전기 어록, 불교 의례 등 다양한 전적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차인이라면 알고 있는 초의 선사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린 인물이 바로 효당이다. 그는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일반 대중에게는 거의 사장(死藏)된 차 문화를 중흥하였다. 경남 사천 다솔사에서 차나무를 심어 차를 직접 만들고 한국 최초의 상업판 단행본인 〈한국(韓國)의 차도(茶道)〉를 저술하여 한국 차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한국 차문화를 대중화시켰다.

책의 저자인 원화 채정복 박사는 효당본가 반야로차도 문화원 본원장이자 효당사상 연구회 회주다. 채정복 박사와 효당과의 인연은 고교 시절부터 시작되었는데 효당의 문하에 정식 입문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다. 효당의 맏제자로 원효(元曉)의 원(元)을 받아 원화(元和)라는 호를 받았다. 그녀는 효당을 이어 원효학 공부, 차도 수련 뿐만 아니라 특히 독자적인 ‘반야로선차도’를 개창해 국내외에 선차문화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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