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심신 안정시켜 온 ‘정신음료’ 

차의 싹을 가공한 오랜 마실거리
남종선 스님들 차 수행에 활용해
사찰만의 독특한 차 문화 형성돼
하수방 〈다동〉 통해 차 역사 조명

전남 승주 야생차밭. 초의 선사는 산골짜기, 바위 곁에서 자라는 차를 최고로 쳤다.
전남 승주 야생차밭. 초의 선사는 산골짜기, 바위 곁에서 자라는 차를 최고로 쳤다.

전남 승주 야생차밭. 초의 선사는 산골짜기, 바위 곁에서 자라는 차를 최고로 쳤다. 

동양문화권에서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 음료는 그 종류만도 수백 종에 이르는데, 그 원료로 초목의 뿌리, 잎사귀, 줄기, 열매에서 동물의 일정 부위까지 확대 활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찌 보면, 광범위하게 음료를 만들어 낸 것은 삶의 필요 요건에 따라 가감되었다. 아무튼 차는 단순한 ‘마실거리’나 음식과 약의 범주를 넘어 정신음료로 발전됐으니 이는 차나무의 싹을 활용해 문화의 결을 일구어 낸 차의 이해자들이 이룩한 업적이라 하겠다.

차란 원래 차나무의 어린 싹을 가공한 차를 의미하며 때론 중의적인 뜻을 지닌다. 어떤 때에 차는 음료수로 ‘마실거리’를 뜻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차 싹을 제다라는 공정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차란 어휘가 ‘마실거리’를 아우르는 말로 쓰인 것은 조선 후기 이후라 생각한다. 현재 우리가 차라고 말할 때 이는 광범위한 의미의 ‘마실거리’를 뜻한다. 그렇다면 차란 무엇이며 그 의미의 혼용이 일어난 것은 왜일까. 

그 어휘의 연원을 살펴보면, 차의 유입 시기인 7세기나 난만한 차 문화를 이룩했던 고려 시대, 조선 전기까지도 차란 차의 싹을 가공한 것을 의미했다. 그러다가 차의 의미가 ‘마실거리’라는 광의적 의미로 혼용해 사용된 것은 차 문화가 쇠락됐던 양난 이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문화적 현상은 차 문화가 쇠락되어 가던 시기의 형태로 차의 의미나 가치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어휘 사용의 오류를 지적한 것은 다산 정약용이다.

그가 차란 차나무의 어린 싹을 가공한 것을 말하는 것이지 타물(他物)을 활용하여 만든 음료를 모두 차라고 부르는 것은 오류라고 한 것이 그것이니 이는 그의 〈아언각비〉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차란 어휘 사용의 부정확성은 양난 이후 차 문화가 쇠락되어 가던 시기에 나타난 문화 현상이며, 또 다른 요인으로는 근대기에 서양에서 들어온 커피와 홍차 등을 차라고 부른 것도 어휘 사용의 혼선을 부른 연유라 생각한다. 

아무튼 지금 차란 모든 음료를 지칭하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 구축한 차 문화란 차 싹으로 만든 차를 즐기면서 만들어 낸 독특한 문화의 유형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차 문화의 근간은 차 싹으로 만든 차를 통해 구축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으로 차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현대인의 삶이 윤택해지기 위해서는 옛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차 즐기는 것을 생활화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차가 한국에 소개된 이래 차를 통해 자신의 삶은 물론 사회화, 즉 사람 간의 소통에 유익한  매개물로 활용하여 실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의 유용성은 과거와 현재, 미래에도 동일한 가치와 의미로 응용·확장될 것이며, AI가 보편화되어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는 현대 사회의 변화는 인류가 비로소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독특한 삶의 구조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 차의 유용성, 즉 여유로운 시간을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는 차의 생활화는 더욱더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차의 생성과 문화 형성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에 유익함을 주었던 차란 무엇이며 어떻게 발전되었던 것일까. 이 답을 얻기 위해서는 차란 무엇이며 어떻게 문예적인 소양을 함의한 문화 결을 만들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차는 심신의 안정과 인간 사이의 소통을 연결하는 매개물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차의 효능은 정화 능력이 차 응용의 핵심 사항이었다. 이는 신농씨의 설화에서 드러나는 차에 대한 이해의 지표이며, 활용의 명분이요, 실질의 차의 가치를 알았다는 점이다. 바로 차의 이런 특징적 요소를 적극 활용한 것은 차 이해의 선각자들이 이룩한 업적으로 당대 육우가 그랬고, 차를 선 수행에 활용했던 선종 수행자들이 그랬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차를 마시면 정신과 몸이 맑아진다는 점에서 울화와 피로에 찌든 몸과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차를 통해 불로장생을 도모했으니 이는 도가에서 차를 활용한 목적이었다. 도가에서 불로장생의 단약으로 이해한 차의 활용을 수행에 적극 차용해 선 수행에 도움을 얻으려한 것은 남종선의 수행승이었다. 

이렇게 차는 정신을 맑게 하고 몸을 바르게 하는 정신음료로 발전해 수많은 수행승이나 도가의 수련자들, 시인 묵객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음다의 수행규범을 만들어 사찰의 독특한 차 문화 형태를 만들어냈으니 이 점이 바로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차 문화가 끊어질 듯 이어진 요인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들이 차를 통해 삶의 향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고상한 뜻을 가진 이들이 차를 아끼고 중하게 여겨 곁에 두고자 했던 연유는 무엇일까. 바로 차의 천연성, 싱그러움과 활발한 생명성, 청량감, 온화함, 향기로움, 소박성, 맑음이다. 이는 사람의 이상적 가치와 관통하는 것으로, 자신을 향상하여 해탈이나 군자가 되고자 했던 사람들은 차를 즐김으로써 혼탁해진 자신의 심신을 정화하고자 했다. 차를 오래 마시면 힘이 나고 마음이 즐겁다고 한 〈식경〉의 인용문은 바로 차를 마시면 피로와 성냄, 시기와 질투를 사라지게 하여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차의 이로움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탐독했던 명대 강소 무석 사람 하수방(1551~1635)의 〈다동(茶董)〉은 차의 근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더구나 이 문헌은 초의 선사가 〈동다송〉을 저술하면서 참고했던 중요한 문헌이다. 그러므로 본 연재에서 하수방의 〈다동〉을 기초문헌으로 삼은 연유는 분명하다. 물론 본 연재의 핵심은 한국 차 문헌을 통한 정보와 필자가 40여 년 동안 차를 연구하면서 경험했던 차의 세계를 평이하게 풀어내어 독자들의 차의 이해에 길잡이가 될 수 있다면 그 의미가 더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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