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불교 경전을 읽어봅시다

팔만대장경엔 1514종 경전 있어
경전의 숲 입구서 헤메는 그대여
깨달음 사용설명서 ‘자력문 경전’
불보살 가피 바라는 ‘타력문 경전’
두 갈래 길 중 무엇을 택하겠는가

그림=최주현 화백
그림=최주현 화백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고 
하나의 길만 가야 하는 것이 아쉬워
깊은 숲속으로 굽어 사라지는 길 하나를
오랫동안 서서 멀리 바라보았지.(후략)”

미국 시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서는 두 갈래 길을 동시에 갈 수 없어서 마음속으로 길 하나를 선택한 뒤 가지 못하게 된 길을 아쉽게 바라보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그려집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선택의 연속입니다. 두 길을 동시에 걸어가는 일을 내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걸 할까, 저걸 할까. 할까, 하지 말까. 이걸 살까, 저걸 살까. 살까, 사지 말까.

선택지가 둘 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내 앞에서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걸 선택했을 때의 결과는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인지라 나는 자주 선택장애, 결정장애를 겪습니다.

붓다의 말씀이 담긴 경전은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서 있고, 이름을 알지도 못할 나무들이 서로서로 기대어 서 있는 아주 커다란 숲과도 같습니다. 그 숲에는 나무가 너무 많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경전을 나열해볼까요?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유마경〉 〈무량수경〉 〈천수경〉 〈아함경〉 〈니까야〉, 〈법구경〉 〈밀린다왕문경〉 〈원각경〉 〈육조단경〉 〈열반경〉 〈지장경〉 〈숫타니파타〉 〈본생경〉 〈약찬게〉 〈법성게〉 〈불설소재길상다라니〉….

이 정도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지안 스님에 따르면, 해인사에 모셔져 있는 고려대장경에는 1514종류의 경전이 있고, 일본에서 편찬한 대정신수대장경에는 2236부의 경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경전으로 시작하는 불교〉88쪽) 

이 많은 경전들이 사람들에게 고루 읽히거나 연구된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경전은 너무나 많이 읽혀서 수없이 많은 해설서가 있는가 하면 어떤 경은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선택받지 못한 채 대장경이란 창고 안에서 천년도 넘게 고독하게 잠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온갖 경전들이 있다 보니 “불교 경전 한 권 읽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요? 하나만 추천해 주십시오”라는 부탁을 받으면 참으로 난감해집니다.

지친 현대인들에게 숲에서 산책하는 것보다 좋은 약은 없듯이 마음의 양식을 찾는 이에게 경전의 숲에서 산책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그런데 경전의 숲이 너무 깊어서 입구에서 어정거리며 기웃거리다가 “나중에…”라며 돌아섭니다. 이런 사람에게 그 초입에서 두 갈래 길을 먼저 보여주고 싶습니다.

한 갈래는, 어려운 경전을 하나씩 읽어가면서 그 속에 담긴 뜻을 완벽하게 다 이해하여 붓다의 경지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이 길을 자력문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씩 알아가고 그 속에서 제시하는 여러 가지 실천법을 따라 해보면서 자기를 괴롭히는 번뇌의 정체를 알아내고 없애는 길입니다. 내가 수행자가 되고 내가 아라한이 되고 내가 보살이 되고 그리고 내가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성능 좋은 세탁기를 새로 샀다고 해보지요. 당장 빨래를 해야 해서 세탁기를 설치하자마자 돌리려고 하는데 예전 것과 작동법이 달라서 문제입니다. 그럴 때 사용설명서를 펼쳐서 읽어봅니다. 사용설명서에서 ①, ②, ③…으로 숫자를 매겨서 친절하게 작동법을 일러주고 있으니, 그 설명대로 하나씩 따라 해보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막연하고 어렵게 느껴졌지만, 일러주는 대로 하나씩 따라 해보니 뜻밖에 참으로 쉬운 것임을 알게 되고, 무엇보다 쌓였던 빨랫감을 거뜬하게 세탁했습니다. 자력문이란 바로 이렇게 내 빨랫감을 내 손으로 깨끗하게 세탁해서 기분 좋게 입는 것입니다. 그걸 도와주는 사용설명서가 바로 경전입니다.

또 다른 한 갈래는, 깨달음이니 수행이니 하는 것은 마냥 어렵고 낯설게만 느껴지며, 그저 불보살님의 가피로 나와 내 가족이 행복하게, 무탈하게 한 생을 살아가도록 복을 빌며 기도하는 길입니다. 타력문이라고 부르는 길로, 타력 즉 불보살의 힘에 의지해서 고해와 같은 인생을 헤쳐 나가는 신앙모습입니다. ‘나는 중생이어서 그저 불보살님께 나를 맡깁니다. 나를 도와주세요’라며 기도하는 것이지요.

나의 배우자, 내 자식, 내 부모들에게 불보살님의 가피가 내려지기를 빕니다. 이렇게 나와 가족의 행복을 빌려고 절에 다니기 시작했거나 현재 삶이 너무 힘들어서 절에 다니며 기도해서 불보살님의 보호를 받고 싶은 사람들이 주로 선택하는 신앙방식입니다. 때가 많이 묻은 빨랫감을 앞에 두고서 힘 좋은 사람, 가사도우미를 소리쳐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가 내 외침을 듣고 달려와서 나 대신 빨랫감을 말끔하게 세탁하는 것이지요. 내 힘으로 세탁할 수 있다면 내 힘으로 해결해야 옳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도저히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면 남의 손을 빌려야 합니다. “도와주세요”라고 소리치는 것이 바로 기도요, 이런 신앙방식을 타력문이라고 합니다.

불교에는 자력문의 경전도 있고 타력문의 경전도 있습니다. 불교교리가 이러저러한 내용들이니 꼼꼼하게 읽고 완벽하게 이해하면서 자기 마음속 번뇌를 하나씩 없애도록 안내하는 경전이 있는가 하면, 살면서 힘든 일이 있으면 무조건 불보살님 이름을 부르기를 권하며 그러면 원하는 것을 이룬다고 일러주는 경전도 있다는 말입니다. 

노란 숲에 두 갈래 길이 있어 나그네가 어느 길로 가야 좋을지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프로스트의 시처럼 대장경이라는 거대한 숲의 초입에서 쉬이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을 살피기를 권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택하시렵니까? 자력문인가요, 아니면 타력문인가요? 강의 시간에 이런 질문을 던지면 수강생들은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나는 자력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력문이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실, 교리에 대해서 잘 모르고, 설명을 들어도 이해할 수가 없고, 먹고 사느라 바빠서 경전을 꼼꼼하게 읽거나 법문이나 강의를 챙겨 들을 수 없고, 무엇보다도 깨달음이니 수행이니 하는 것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타력문의 불교를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려니 옆 사람에게 창피하고 민망해서 대답을 망설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느 길을 택하셔도 좋습니다. 눈치를 볼 필요도 없습니다. 내 인생인데요.

자력문과 타력문에 대표적인 경전을 하나씩 들자면 자력문의 경전으로 니까야(아함경)를, 타력문의 경전으로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들 수 있습니다. 길상소재다라니도, 지장경도 타력문의 경전으로 분류할 수 있지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자력문의 경전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경전 속 내용을 깊이 새기고 이해하고 사색하며 자기 마음에 담고 스스로를 경전 구절에 비추어 살펴야 하는 자력문의 경전들을 마치 타력문의 경전처럼 대하는 불자들도 많습니다. 가령, “〈금강경〉 읽으면 좋다던데…”라면서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는 사람들, “〈법화경〉 사경하면 불보살님 가피를 입는다던데…”, 혹은 〈약찬게〉나 〈법성게〉, 〈천수경〉을 몇 독씩 하면 좋다면서 기도의 일환으로 그 경전을 읽거나 사경하는 경우입니다. 좋다니까 하는 겁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니, 그걸 문제 삼을 수는 없겠지만 이따금은 이런 의문도 듭니다. “대체 무엇이 좋아야 좋다고 하는 걸까, 어떻게 좋은 것이 좋다는 것일까?”

이렇게 되물으면 ‘따지지 말고 그냥 간절하게 읽어가라’는 매서운 질책도 많이 받습니다. 분별심을 내려놓고 열심히 읽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니, 이래저래 경전은 안 읽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좋은 듯 합니다. 자력으로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겠노라 다짐하며 읽으면 내가 깨달음을 이루니 좋고, 이해하지 못해도 자꾸 읽으면 배우자와 자식과 부모님이 무탈하다고 하니 그것도 좋습니다. 경전을 읽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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