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눈에는 괴물만이 보일 뿐

흥행 중인 고레에다 감독 ‘괴물’
온갖 편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
괴물은 누구인지 관객에게 물어
환자 공양 받은 가섭존자처럼
혐오 벗어나면 부처 마음 알아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괴물’의 한 장면.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괴물’의 한 장면.

마음을 헤아려 뜻이 통하는 일은 지극한 일이다. 오죽하면 깨달음을 얻고 수많은 제자들과 대중에게 둘러싸여 있던 부처님 마음을 아는 이가 단 하나였을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대중에게 설법을 하시다가 가만히 꽃을 들어 보이자 아무도 그 뜻을 몰라 갸우뚱할 때 가섭존자만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말이나 글로 전하지 않은 마음이 고스란히 마음으로 통했기에 가섭존자도 말로 답하지 않고 웃음으로 답했다는 이 일화는 마하가섭이 불제자 가운데 첫 번째로 꼽히게 된 근거이기도 하다.

대중에게 꽃을 들어 보인다는 염화시중(拈花示衆)에서 말이 아닌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러나 수많은 불제자 가운데 혼자서만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렸다는 가섭존자도 여성을 불제자로 들이는 일을 두고는 반대를 했다고 하니 다른 이의 마음은 정말로 어렵고 깊은 심연일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짚어보는 영화다. 누가 누구인지 서로 다 아는 지방 도시, 가족이래야 엄마 아니면 아빠 하나만 있는 한부모 가정, 그래서 어디 불이라도 나면 온 지역이 불구경하며 ‘누가 불 난 자리에 있었다’라는 시시콜콜 뒷말 나누는 그런 동네. 서로서로 다 안다고 생각하는 이런 배경에서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부처님 손바닥’ 들여다보듯 왜 그랬는지 바로 알 수 있으려나?

세탁소 일을 하며 초등학생 아들 미나토(구로사와 소야)와 둘이 사는 엄마 사오리(안도 사쿠라)는 아들이 뭔가 다르다 싶으면 바로 알아챌 수 있다. 그런데 달라진 모습은 보자마자 알겠는데 왜 그런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마을 어딘가에 불이 나면 모두가 불난 곳이 어딘지 볼 수 있는데 어째서 불이 났는지 알기는 어려운 것처럼. 

영화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갑작스런 화재 사고를 내려 보며 장난치는 미나토와 사오리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소방차가 달려가고, 불난 건물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그 건물에 남성들이 드나드는 유흥업소가 있었다는 것도 알려지고, 거기 누가 드나들었다며 수군거리기도 하는데 그 불이 어쩌다 난 건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아들 미나토 운동화 한 짝이 없어졌다거나, 물을 담아준 텀블러에 흙이며 돌조각이 들어있다거나, 갑자기 혼자 마구잡이로 자른 머리카락이 집안에 흩어져 있다거나, 다쳐서 상처가 났는데 선생님 때문에 그랬다거나, 늦은 시간까지 집에 없는데 연락도 없다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수밖에. 

사오리가 아이를 찾으러 차를 몰고 나섰다가 외진 길가에 세워진 자전거를 보고, 그 길 안쪽 수풀을 헤치고 가니 기찻길 끊어진 막다른 곳에 있는 터널이 나오고, 그 캄캄한 터널 안으로 들어갔더니 ‘괴물은 누구일까’라고 읊조리고 있는 아들을 찾았을 때, 다그치며 화내기보다 끌어안고 무사한지부터 챙긴 엄마가 도대체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겨우 찾은 아들이 갑자기 달리는 자동차 문을 열고 휙 몸을 던진다면 아이에게 물어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학교에 가봐야 한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인 호리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교장부터 지난해 담임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까지 그저 한결같이 ‘오해를 일으킨 부분이 있다’는 ARS 응대같은 말만 되풀이 한다. 엄마는 학교에 책임을 묻고, 원인을 밝히려 한다. 다른 학생들 이야기도 듣고, 정황을 살피다 보니 선생님이 수상쩍기 그지없는데 되레 호리 선생님은 한부모 가정의 엄마라서 과잉된 태도를 보이는 게 문제라고 맞선다. 사오리는 학교라는 집단에 맞서 마침내 호리 선생님을 공청회에 세우고 공개사과를 받아낸다. 그 일로 호리는 일도 잃고, 연인도 잃고, 화재가 나던 날 그 건물 유흥업소 출입까지 했다고 기사화 되면서 지역에서 설 곳이 없어졌다. 교사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기 쉽지 않지만 확정되면 가차 없다. 선생님, 괴물이었어요?

여기까지는 사오리의 시점일 뿐, 영화는 다시 이 일들이 일어난 상황을 되짚어 보여준다. 아이들은 얼핏 본 모습만으로 헛소문을 퍼뜨리기도 하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무리지어 한 아이를 집요하게 따돌리고 괴롭히기도 하고, 그 사실을 감추려는 거짓을 지어내기에 스스럼이 없다. 그 학교, 그 아이들이라서가 아니라 아이들 세계가 워낙 그렇다. 선생님을 괴물로 만든 미나토, 네가 괴물이었어?

선생님이 미나토에게 폭력적이었다고 증언했던 요리(히이라기 히나타)는 외톨이다. 병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는 요리는 얌전하고 상냥하지만 또래 사내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자칫 요리 편을 들어주거나 조금이라도 가까이 지내면 위험하다. 병이 옮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괴롭힘을 같이 당해야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친구가 생길 줄 몰랐어”라고 감동하는 요리에게 “친구 맞는데, 다른 아이들한테 티내지 마”라고 말하는 미나토는 그런 자신을 이해해주는 요리 앞에서 스스로가 부끄럽고 괴롭다. 그러면서 둘은 서로의 마음을 묻고 답하는 놀이를 한다. ‘괴물은 누구게?’

둘 사이는 이제 비밀이 된다. 요리에게 병이 있다고 몰아붙이는 요리의 아버지, 요리를 무리지어 괴롭히는 또래들, 그 문제를 덮어두기 바라는 선생님들, 학교에서 문제만 없으면 아무 일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 숲속 터널 지나 폐차된 기차 안에서 두 아이는 꿈꾼다. 이 세상 말고 다음 생에 환생한다면 그때는 안전하고 평화롭기를.

내한 기자간담회에서 영화에 나오는 어른 가운데 누가 가장 ‘괴물’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미나토와 요리를 연기한 쿠로카와 소야와 히이라기 히나타는 “현장에 있는 모두가 괴물 같았다. 모두가 내게 자극을 줬고 대단한 괴물이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이 영화를 거친 다음에 이제 괴물은 피해야 할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긍지와 희망을 담는 말이 된 것이다.

가섭존자가 어느 날 탁발을 나갔는데 거지가가섭에게 음식을 받겠냐고 물었다. 그 거지는 몸에 피고름이 흐르고 있는 나환자였다. 병들고 주린 처지이면서도 보시로 복을 짓기 바라는 거지의 마음을 헤아린 가섭존자는 기꺼이 음식을 받겠노라고 했다. 그러자 거지가 손으로 음식을 집어 가섭의 탁발 그릇에 담다가 썩어 너덜거리던 손가락 한 마디가 떨어져 음식과 함께 담겼다. 그 음식을 받은 가섭은떨어진 손가락만 집어서 걷어내고서는 공양 받은 음식물을 말끔히 다 먹었다. 혐오의 벽을 넘어섰기 때문에 가섭은 부처님 마음을 헤아려 웃음으로 답했을 것이다. 

미나토와 요리는 상대는 보지 못하는 그림을 보고 질문을 던져 답을 맞히는 놀이를 한다. 환생할 날을 기다리지 않고 태풍을 뚫고 서로를 만나 마음을 나누기로 한다. 비바람이 지나가 쑥대밭이 된 세상을 돌아보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아이들 웃음이 곧 염화시중이고, 괴물은 혐오가 아닌 놀이가 된다. 웃음을 이심전심으로 나누는 관객일 수 있어서 고맙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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