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강화 전등사, 순천 정혜사 불단의 용(龍)

육각형과 용, 연꽃은 물 에너지의 상징
공포에서 용-연꽃-봉황의 중층적 구성
전등사와 정혜사 불단에 웃고 있는 용
용 입에 연꽃, 물고기로 물 기운 증폭

용은 물 에너지, 봉황은 바람 에너지
미국의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의 세계> 등의 저서에서 “신은 에너지의 의인화다”라는 명제로 신화에 접근하고 해석했다. “신이란 삶과 우주 만유에 작용하는 근원적 에너지나 가치체계를 의인화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이 명제는 한국산사 장엄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용, 봉황 등의 상상 속 서수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단군신화>에 보면 환웅은 우사(雨師), 운사(雲師), 풍백(風伯)을 포함해 300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고 홍익인간의 뜻을 펼친다. 우사, 운사, 풍백은 비, 구름, 바람의 상징이다. 변화무쌍한 우주의 에너지를 인격화한 것이다. 그 에너지 셋은 농경사회에서 절대적인 힘에 가깝다.

<화엄경>에서도 마찬가지다. ‘화장세계품’을 보면 모든 세계의 성립과 바탕에는 풍륜과 수륜이 있다. 바람과 물의 순환하는 에너지 속에서 세계가 일어나고 성립한다. 세계의 맨 아래는 풍륜이 있고 그 위에 수륜인 향수해가 있다. 향수해 위에 한 송이 커다란 연꽃이 피었다. 연꽃 속에 불국토가 있다. 연꽃 속에 함장되어 있는 불국토이기에 ‘연화장세계’라 부른다. 연화장세계는 풍륜-수륜-대연화-불국토의 중중무진의 구조로 펼쳐있는 광대무변의 세계다. 세계를 구성하는 바탕에 바람과 물을 뒀다. 바람과 물의 본성은 변화무쌍과 순환으로 압축된다. 순환과 대류, 회전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두 물리적 힘이 가진 변화무쌍, 순환, 대류, 나선형 회전, 생명에너지에 의해 만유는 생명력을 획득한다. 물과 바람은 모든 국토와 생명에 활력을 불어넣는 근원적인 생명에너지이다.

용과 봉황은 그 두 에너지의 구상화 또는 의인화로 이해된다. 용(龍)은 물 에너지, 봉황(鳳凰)은 바람 에너지의 상징으로 적극 해석할 수 있다. 용과 봉황을 에너지 개념으로 해석한 특별한 벽화는 대구 동화사 영산전 박공 천정에 있다. 표현주의 기법으로 두 조형에 깃든 정신적 에너지를 그린 수작이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 중에 ‘화재를 막는 부적’이라는 독특한 종이가 있다. 2001년 경복궁 근정전 중수공사 때 발견 된 것이다. ‘수(水)’자 한 자를 크게 적은 붉은색 장지였다. 용을 그린 부적 1장, 모서리마다 ‘水’를 새긴 화재 막는 육각형 은판 5점 등과 함께 발견됐다. 붉은색 장지의 ‘水’자는 놀랍게도 ‘용(龍)’ 1000여 자로 채웠다. 이 놀라운 부적은 용의 본질을 확인시켜 준다. 하나의 부적 세트로 발견된 이 유물들은 용이 곧 물의 상징임을 실증한다. 육각형과 용은 하나의 본질을 가진 조형언어의 변상일 따름이다.

용의 본질이 만유 생명력의 근원인 물의 상징이라면 봉황(鳳凰)의 본질은 무엇인가? 봉황의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이다. 중국 신화에서 바람은 봉새, 즉 봉황 ‘봉’의 날갯짓으로 생긴다고 여겼다. 갑골문에서 ‘봉(鳳)’은 바람 ‘풍(風)’과 같은 의미였다. ‘봉(鳳)’과 ‘풍(風)’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수()’는 원래 맞바람을 잔뜩 받은 돛의 형상에서 만든 상형문자다. 획에 벌써 바람 에너지가 뱄다. 활짝 편 조류의 날개 이미지는 바람과 잘 상통한다. 봉황 조형의 본질은 바람이다.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불단의 용면.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불단의 용면.
순천 정혜사 대웅전 불단의 용면.
순천 정혜사 대웅전 불단의 용면.
왼쪽부터 보은 법주사 팔상전 화반의 용면,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충량의 용, 경주 불국사 대웅전 추녀의 용. 모두 입에 물고기를 물고 있다.
왼쪽부터 보은 법주사 팔상전 화반의 용면,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충량의 용, 경주 불국사 대웅전 추녀의 용. 모두 입에 물고기를 물고 있다.
무주 안국사 극락전 어간 주심포. 용-연꽃-봉황의 중층적 구성을 보여준다.
무주 안국사 극락전 어간 주심포. 용-연꽃-봉황의 중층적 구성을 보여준다.

 

법당, 용-연꽃-봉황의 중층적 입체구성
다시 <화엄경>의 ‘화장세계’를 떠올리자. 불국토는 바람과 물과 연꽃의 중중무진 속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불국토 장엄에서 바람과 물과 연꽃은 특별한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바람의 구상화가 봉황이다. 물은 용으로 의인화했다. 연꽃은 현실의 것과 다르게 넝쿨을 갖춘 형식으로 재해석했다. 우연히 피는 꽃은 없기 때문이다. 숱한 서원과 공덕으로 꽃이 핀다. 넝쿨 조형엔 꽃이 피기까지의 과정, 곧 수행과 실천이 담겨 있다. 봉황과 용과 넝쿨 갖춘 연꽃, 이 셋은 한국산사 불국토 장엄에서 핵심적인 소재로서 모든 법당 장엄에 빠짐없이 활용된다. 법당의 지붕 하중을 받치고 있는 공포(뽱包)를 보면 온통 넝쿨 갖춘 연꽃과 용, 봉황의 조합이다. 특히 어간의 주심포는 대부분이 용-연꽃-봉황의 중중(重重)으로 구성하는 일관된 조형문법 구조를 보여준다. 무주 안국사 극락전 어간 기둥의 주심포는 그런 구성의 하나의 정형으로 손꼽을 수 있다. 중중의 구조에는 물(용)-땅(연꽃)-하늘(봉황)에 대응하는 위상학적 조형 질서가 구현돼 있다. 용-연꽃-봉황의 중층적 입체구성은 백제 예술의 극치로 평가되는 ‘백제금동대향로’에서도 실현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용과 연꽃은 특별히 한국산사 불전건물 장엄에서 시작과 끝이라 하여도 지나침이 없다. 둘은 같은 속성을 지녔다. 두 조형 모두 물과 불가분이다. 용과 연꽃은 유기적 일체로 조영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보편적인 조형원리가 용이 연꽃 가지를 입에 물고 있는 형식이다. 이때 용은 용의 정면 얼굴만을 조각한 ‘용면(龍面)’으로 표현한다.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순천 정혜사 대웅전, 경산 환성사 대웅전, 구례 화엄사 원통전, 순천 동화사 대웅전의 불단 등에서 두루 살필 수 있다. 그중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과 순천 정혜사 대웅전 불단의 용면 목조각이 구성과 조형미가 뛰어난 으뜸 조형으로 손꼽힌다. 전등사 불단의 용면 조형은 불단 정면에 12개체, 좌우에 5개체씩, 모두 22개체다. 순천 정혜사 대웅전 불단에선 정면 9칸에만 용면을 조각했다. 두 곳의 용면 조형은 형태나 구성, 표정 등 여러 측면에서 닮은 분위기다. 용들은 입에 꽃가지와 식물 넝쿨을 물고 있다. 몇몇의 용 이마에는 먹으로 쓴 ‘왕(王)’ 글자가 선연하다. 용의 표정은 천차만별이다. 근엄한 표정도 있고,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용, 가면처럼 보이는 용, 심지어는 혀를 내밀어 ‘메롱’하며 놀리는 듯한 용도 있다. 정혜사 조형에선 혀를 자신의 콧구멍에 밀어 넣는 못 말리는 용도 있다. 더욱이 정혜사 불단 가운데의 세 용면은 파격적이다. 머리 양쪽에 꽃을 꽂고 활짝 웃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유쾌한 익살에 법당에서의 긴장을 무장해제 당하기 십상이다. 용들의 졸업 앨범 사진을 보듯 표정에 저마다의 개성이 살아있다. 두 곳 불단의 용 조형은 힘과 위엄, 익살, 낭만성까지 두루 갖춘 한국산사 용면 조형의 명작으로 손색이 없다.

용면과 꽃가지의 결합 형식은 용 전신 조각과는 사뭇 다르다. 용면은 한 곳을 응시하는 방위 주시 성향이 강하다. 그에 비해 용의 전신 조형에는 용틀임하며 차원을 뛰어넘으려는 의지가 강력하다. 용틀임하는 용은 꽃가지를 입에 물지 않는다. 꽃가지 대신 여의보주를 배치하기 마련이다. 붉은 여의보주는 궁극적 깨달음과 상통한다. 보주를 획득하는 순간 용은 자유자재의 변화무쌍한 능력을 갖추고 청정 불국토를 수호하는 강력한 위신력으로 마장을 압도한다.

반면에 꽃가지를 입에 물고 있는 용면 조형은 역신을 막는 처용의 얼굴처럼 벽사적 성격이 강하다. 용면과 연꽃은 하나가 주어 위치에 놓이면 다른 하나는 서술어 역할을 한다. 만약 용이 연꽃이나 연꽃 봉오리를 물고 있다면 ‘용은 물이다’라는 명제를 조형으로 표현한 것과 같다. 이때는 용이 주어 개념이고, 연꽃이 보조관념이다. 그런데 용이 연꽃을 물고 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보다 적절한 표현은 용의 입에서 연꽃이 나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때때로 보은 법주사 팔상전 포벽의 화반처럼 용의 입에 수생식물 연꽃 대신 넝쿨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용의 입에서 나와 좌우로 칭칭 감겨 뻗어나가는 넝쿨 이미지는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워 그로테스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용의 입에서 연꽃이나 넝쿨이 나오는 것은 생명력의 근원인 물에서 생명이 나오는 원리를 구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입에 물고기 문 용, 화마에 대한 벽사
어떤 곳엔 용의 본질을 환기시켜 주는 보조관념을 파격적인 소재로 대체하기도 한다. 연꽃 대신 물고기가 나타난다. 그래서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거나 용의 입에 물고기가 드나드는 대단히 인상적인 조형을 보게 되는 것이다. 물고기 조형은 용의 본질이 물임을 일깨워주는 데 있어 보다 직관적이다. 그만큼 물의 기운이 증폭된다.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충량의 용, 나주 불회사 대웅전 충량의 용, 문경 대승사 대웅전 추녀와 경주 불국사 대웅전 추녀의 용, 양산 통도사 만세루 어간 기둥의 용, 괴산 각연사 대웅전 내부 화반, 안성 청룡사 관음전이나 영광 불갑사 만세루 포벽 화반 등의 용면은 입에 물고기를 물고 있다. 목조건축에서 왜 처처마다 용면을 조각하여 물의 기운을 분수처럼 내뿜는 것일까? 그 같은 조형에는 강력한 물의 기운으로 목조건축과 상극인 불의 정신을 살(殺)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다양한 용면 조형은 화마로부터 법당을 수호하는 벽사의 물리력 그 자체다.

다가오는 2024년 새해는 용의 해다. 지면에 용의 기운을 채우며 연재의 붓을 삼가 거둔다.〈끝〉

▶ 한줄 요약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과 순천 정혜사 대웅전 불단의 용면 목조각이 구성과 조형미가 뛰어난 으뜸 조형으로 손꼽힌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