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계묘년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지구촌 곳곳서 아픔과 비탄이 넘쳐나
작금의 참상들 인간의 시간을 파괴해

삶은 시간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다
항해의 나침판은 지혜, 견인력은 자비

올해 한국불교의 긍정적인 면은 ‘전법’
불교는 붓다의 ‘전도선언’서 비롯됐다
전도선언, 중생에 대한 자비를 기반해

또 한 해가 지나간다. 해를 넘기면서 지구촌 곳곳에서 아픔과 비탄의 한숨 소리가 가득하다. 탐욕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의 절규다. 해를 보낼 때면 새삼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학책, 철학책 등 다양한 자료를 보면서 정리해 보나 항상 오리무중의 늪에 빠진다.

지구별의 생명체 중에서 시간을 삶의 틀로 삼아 사는 존재는 인간이 유일한 것 같다. 태양계에 사는 인간은 지구별이 태양을 한 바퀴 돌면 일 년이라 하고, 스스로 한 번 돌면 하루라고 하면서 일생을 살아간다. 물에 사는 또는 땅속에 사는 생명체의 시간 단위가 있다면 무엇일까. 시간은 원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진 것인가. 결국 시간의 비밀은 모든 존재의 비밀인 것 같다. <금강경>의 흉내를 내보면 “시간은 시간이 아니다. 이름이 시간일 뿐”인가.

시간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대승불교에서 제기된 진속이제(眞俗二諦)가 새삼 다가온다. 진제는 궁극적 진리이고, 반면 세속제는 상대적 진리로써, 인간들의 합의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속제는 하화중생과 중생의 깨달음을 위한 방편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 시간은 인간 삶의 속제이고 진제의 방편이고 결국 그 둘은 하나로 융합될 것이다. 시간은 결코 오리무중의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항해해야 할 바다이다. 인간이 시간이라는 방편을 만든 것은 ‘저 언덕’에 가겠다는 지혜와 의지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런데 이를 어쩌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바다에서 난파당하여 허우적거리고 있는가? 올해는 유난히 지구별에 재난이 많았다. 종족과 이념의 우상에 빠져 서로를 죽이고 싸우는 모습이 처처에 일어나고 있다. 중동의 ‘가자’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상은 인간이 얼마나 바보같은 존재인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어리석은 인간이 탐욕으로 인해 자기가 사는 삶의 터전인 지구별 자체 자체까지 파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 자체를 파괴하는 일이다. 우리 한국사회에도 갈등과 미움이 넘쳐 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시간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다. 시간의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저 언덕’까지 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나침판이 있어야 하고, 배에 탄 구성원이 함께 힘을 모아 배를 모는 견인력을 기르는 것이다. 여기에 붓다의 가르침이 여실하게 나타난다. 항해의 나침판은 붓다가 제시한 지혜이고, 배를 모는 견인력이 바로 자비이다. 

한국불교의 올해를 뒤집어 보면 긍정적인 면이 바로 ‘전법’의 강조이고 실천이다. 한국불교의 생명줄로 전법을 제일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불교는 ‘깨달음’이라는 화두로 자신을 키워 왔다고 볼 수 있다. 

전법 없는 불교는 존재할 수 없다. 오늘날 불교가 존재하는 것은 붓다의 깨달음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붓다의 ‘전도선언’에서 출발한 것이다. 붓다의 전도선언은 바로 중생에 대한 자비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자비 없는 불교는 없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시간의 소중함이 새롭게 다가온다. 날숨과 들숨의 사이가 바로 시간이고, 시간은 그만큼 절박하다. 산다는 것은 백척간두에서 바로 서는 것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전법의 씨앗이 잘 자라기를 바라며 자비의 숲이 울창하기를 염원한다. ‘저 언덕’은 지고의 행복 터이다. <자비경>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건
또 멀리 살건, 가까이 살건
태어났건, 태어나려고 하고 있건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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