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태 선사 열반 전날 장작 쌓아놓고
열반일 유게 남긴 뒤 불에 뛰어들어
근대 고승 허운 스님의 제자 ‘구행’
수행 매진하던 중 ‘좌화’ 뜻 밝히고
불 붙여 化去… 법구서 향기 풍겨나

입적한 스님을 미화하자는 게 아니다
불교사서 ‘좌화’ 승려 있음을 밝힐 뿐
세간 관점서 스님 입적을 가십화 말라

올해 내 나이 65세,
지·수·화·풍 4대는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지려 한다. 
도는 그윽하고 현묘하나니  
거기에는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으며,  
머리 깎는 귀찮은 일도 없고, 
목욕하는 수고로움도 없네. 
이제는 한 덩어리 사나운 불길만이 남아 있을 뿐,
나는 이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네. -<경덕전등록>

위의 게송은 당말 10세기 무렵, 선사인 남악 현태(南嶽玄泰, 석상경저의 제자)의 열반게송이다. 현태 선사는 숲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수행하다가 열반하셨다. 열반에 들기 전날, 그가 머무는 토굴 앞에 장작을 산더미처럼 쌓은 뒤 다음 날 앞 유게(遺偈)를 남긴 뒤 불 속에 뛰어들어 스스로 입적했다. 이렇게 현태 스님처럼 불속에 화(化)한 승려들의 내용이 <고승전> ‘망신편(亡身篇)’과 <보림전>에 전한다. 

근대 중국에서도 이런 스님이 있었다. 허운(虛雲, 1840~1959) 스님의 제자인 구행(?~1924)이다. 허운이 운남성 계족산 축성사에 머물 때, 구행은 지주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가족과 함께 사찰로 들어왔다. 구행은 사찰에서 부목으로 일한 몇 년 후 출가하면서 ‘구행(具行)’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하루종일 밭에서 일하면서도 염불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밤에는 부처님과 경전 앞에 예배하며 잠을 줄여 수행했다. 그의 행주좌와 어묵동정 삶의 곳곳에서 면밀하게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을 지송했다. 구행은 사찰의 어떤 어려운 일에도 앞장섰으며, 몸 사리지 않는 보살 정신에 대중이 모두 좋아했다. 이렇게 일자무식이던 구행은 <금강경> <약사경> <정토경> <관음보살보문품> 등을 전부 암송했다. 허운은 대중법문에서 구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비록 ‘아미타불’ 한마디만이라도 열심히 염송하면, 반드시 도를 이룬다. 그런데 자신의 총명함만 믿고 염불하지 않으면서 설령 만권의 경전을 외울지라도 해탈하지 못한다. 구행이 저렇게 빨리 깨달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네.”  

어느 날, 구행은 허운에게 좌화(坐化)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구행은 목숨을 마치려 할 때쯤 자신의 모든 것을 돈으로 바꿔 대중에 공양했다. 1924년 4월, 그는 운남성 화정사 말사인 승인사 공양간 뒤편에서 스스로 불을 붙여 화거(化去)했다. 구행은 가부좌한 채로 움직이지 않고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며, 왼손에는 경소리를, 오른손에는 목어를 잡고 있었다. 허운 스님이 살펴보니, 구행의 손에 있는 목어는 손잡이가 재로 변해있었고, 경쇠의 손잡이도 불에 탔으나 구행의 몸과 가사만은 그대로 있었다. 

허운 스님이 구행의 법구에 합장해 마치자, 그의 법구에서 향기가 풍겨 나와 마치 난향과 같았다고 한다. 다음날 구행의 법력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구행의 좌화한 이야기는 <곤명일보(昆明日報)>에 기사화됐다. 부처님 재세 시에도 제자들 중, 종종 이런 경우가 있어 부처님도 염려했지만, 인도는 무엇보다도 윤회 개념에 입각한 사상이 지배됐기 때문이라고 본다. 

필자는 입적한 자승 스님을 미화할 생각은 없다. 다만 학자로서 고대~현대까지 ‘불교사적인 관점에서 좌화한 승려들’에 대해 밝힐 뿐이다. 물론 좌화하거나 소신공양할 경우, 미리 대중에 공포해야 한다. 그런데 현 시대 관점에서 이렇게 할 수 있지 않다. 법적으로 보면 자살방조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여튼 불교적 관점이 아닌 세상의 관점에서 한 승려의 입적을 부정적으로 가십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열반(nirvana)이란 ‘모든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한 쿠시나가라의 말라족들은 ‘성자가 자신의 나라에 와서 열반했다’고 악기를 연주하며 기뻐했다. 현재도 남방의 불교국 어느 마을에서는 이렇게 한다고 들었다. 슬퍼말자!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