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활쏘기와 명상

파울로 코엘료 소설 속 메시지
“행동 없는 기도는 활 없는 화살”
‘지혜 없는 자비’ 가르침과 닮아
온전히 깨어있으려는 노력도 유사

파울로 코엘료의 베스트셀러 소설 〈아처(The Archer)〉는 짧지만 강렬한 교훈이 있는 글이다. 〈아처〉는 저자가 궁도를 배우며 익힌 경험을 세분화해서 상술한 글이다. 화살을 쏜다는 것은 단순히 텅 빈 표적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활을 통해 세상을 보려는 노력이라고 한다. 표적에 다다르느냐 다다르지 못하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활, 화살, 표적 자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활쏘기는 시위를 놓는 순간 극도의 긴장에서 완전한 이완으로 전환된다. 활을 잘 쏘기 위해서는 우아한 자세와 더불어 고도로 정신을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소설은 동료, 활, 화살, 표적, 자세, 화살을 잡는 법, 활을 잡는 법, 활시위를 당기는 법, 표적을 보는 법, 발시의 순간, 반복, 날아가는 화살을 주시하는 법 그리고 활과 화살과 표적이 없는 궁사가 되기까지 등 13개의 주제로 전개된다. 각 주제도 흥미롭지만 이 주제들이 인생의 기본을 배우는 하나의 진리로 연결된다. 마치 구도자가 깨달음의 길을 가듯, 스승이 제자에게 삶의 지혜와 통찰을 가르치는 것처럼 매우 성찰적이며 명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마지막 활과 화살과 표적이 없는 궁사가 된다는 것은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말과 상응하는 것 같았다. 어떤 분야든 궁극의 끝은 서로 통한다. 궁도와 명상도 그런듯해서 필자가 느낀 점을 공유하고자 한다.

이 소설은 한 마을에서 “진을 찾아왔다”는 이방인의 말로 시작된다. 진은 과거 활을 쏘던 사람이었지만 목공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방인은 진이 보는 앞에서 40미터 거리에 있는 체리 열매를 쏴 관통시킨다. 진은 이방인에게 화살을 하나 빌린 다음 아무 말 없이 산을 올랐다. 한 시간 남짓 걸어 그들은 절벽 사이로 커다란 강이 세차게 흐르는 낭떠러지 앞에 도착했다. 진은 심하게 낡아 출렁거리는 다리 한가운데로 걸어가 20미터 떨어진 복숭아를 맞췄다. 이방인도 진을 따라 닳아빠진 다리 가운데로 갔다가 발밑의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방인은 이전과 똑같은 자세와 동작으로 복숭아나무를 향해 화살을 날렸으나 멀리 빗나갔다.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낯빛으로 돌아온 이방인에게 진은 말한다.

“당신은 활쏘기에 능통하고 활을 다룰 줄도 알지만 정신을 다스리는 법을 익히지 못했군요. 모든 상황이 순조로울 때는 잘 쏘지만 곤란한 상황에서는 표적을 맞추지 못합니다. 궁사가 언제나 전장을 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수련을 시작해 곤란한 상황에 대비하십시오. 화살을 잘 쏘는 것과 영혼의 평정심을 유지하고 쏘는 것은 매우 다르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이 소설에서 이방인은 깨달음 또는 명상을 배우려는 수행자, 진은 명상을 지도하는 눈 밝은 스승으로 비유될 수 있다. 진은 이미 영혼에 잠재되어 있는 지식을 제자가 최선을 다해 스스로 발견해나가도록 격려하는 사람이다. 궁도를 가르치는 건 한 시간 안에도 할 수 있지만 충분히 터득할 때까지 연습하는 건 쉽지 않다.

명상도 동일하다. 지금 이 순간 깨어서 알아차림 하는 것이 전부다. 그렇게 매순간 하다 보면 어느 때 자연스럽게 인연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활시위가 길다 하더라도 화살을 거는 부분은 작은 한 점이듯, 아무리 많은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을 챙기는 것은 현재 한 대상일 뿐이다. 소설 〈아처〉에 나온 글 중에서 명상적 맥락으로 살펴본 네 가지 관점을 나누고자 한다.

먼저 책을 열면 엘라 휠러 윌콕스의 어록인 “행동 없는 기도는 활 없는 화살과 같다. 기도 없는 행동은 화살 없는 활과 같다”로 시작한다. 이 문장을 읽자마자 필자는 “자비 없는 지혜는 활 없는 화살과 같고, 지혜 없는 자비는 화살 없는 활과 같다”고 메모를 했다. 활과 화살은 어느 하나가 없으면 그 기능을 할 수 없다. 아무리 날카롭고 잘 만들어진 화살이 많더라도 활이 없다면 어떨까?

명상도 마찬가지다. 깊은 지혜는 자연스럽게 자비심이 동반되어야 한다. 명상에서 지혜와 자비는 새의 양 날개와 같아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지혜는 자비를 근거로 더욱 더 청명하게 드러나며 자비는 지혜를 바탕으로 따스하고 훈훈하게 작용한다. 지혜와 자비가 균등하게 이뤄되면 결국 무상정각을 성취하게 되어 대자대비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부처님 법이 아닐까 한다.

필자는 하트스마일러로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트스마일명상을 안내하고 있는데, 자비행법을 기반으로 한 하트스마일명상 프로그램도 우리가 본래 붓다와 같이 지혜로 충만하고 자비로 무궁한 성품을 가지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지비행법을 실천하면 자비와 지혜가 상하 혹은 선후 차제로 진전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다음으로 ‘화살’에 관한 이야기다. 파울로 코엘류는 ‘화살은 의도’라고 표현했다. 화살은 활의 힘을 표적의 정중앙에 전달한다. 의도는 명료하고 올곧고 균형 잡혀있어야 한다. 화살 하나하나가 마음에 기억을 남기고, 그 기억들이 합쳐지면서 점점 더 활을 잘 쏠 수 있게 된다. 명상도 매순간 어떤 의도를 가지고 대상을 알아차림 하느냐가 중요하다. 대상에 끌려다니는 수동적 주의가 아니라 대상을 의도적이면서도 비판단적으로 알아차리는 능동적 주의력이 활성화되면 온전함의 자리에 깨어있게 된다.

하지만 명상 초보자들이 대상에 주의를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필자의 경험상 온화한 주의력은 명상 과정에서 쉽고 자연스럽게 주의 집중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준다. 명상을 처음 시작할 때 호기심과 열린 마음 그리고 친철함이 중요하다. 이런 태도를 설정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스마일, 미소를 활용하는 것이다. 눈을 살며시 감고,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려 미소 지으면서 눈꼬리와 입꼬리가 연결된다고 상상을 한다. 얼굴 가득 둥근 햇님 같은 환한 미소를 상상하면서 따스하고 훈훈한 느낌이 온몸에 스며들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온화한 주의력이다. 미소와 함께하는 온화한 주의력은 몸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림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집중하려고 억지로 애쓰기보다는 미소의 느낌과 호흡하면서 명상을 즐기는 것이다. 집중하다가 딴 생각에 빠져서 방황하더라도 이를 알아차리고 미소 지으면서 현재로 돌아오면 된다. 화살의 의도와 같이 온화한 주의력은 명상의 핵심 의도로 설정하는 것이다.

세 번째, 궁수는 결과가 좋든 좋지 않든 그날 아침의 활쏘기 결과에 너무 휘둘려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수많은 날이 남아 있고, 각각의 화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이라고 표현했다. 잘하지 못한 날들을 교훈삼아 흔들린 이유를 알아내고, 잘한 날들을 거울삼아 내면의 평온으로 이르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든 정진을 멈춰서는 안 된다. 궁도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상도 그렇다. 어떤 날은 수행이 잘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어떤 날은 잘 안된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명상은 잘 안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가장 명상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졸음이 오면 몸이 피곤한 것인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졸음이 오는 것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다면 충분히 피로를 푼 다음에 명상을 하는 것이 좋다. 명상은 가장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태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습관적으로 졸음이 온다면 명상하는 의도를 단호히 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신심과 분심을 내어서 조금은 치열한 마음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명상하는 동안 마음의 존재 모드(being mode)와 행위 모드(doing mode)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네 번째, 활과 화살과 표적이 없는 궁사로서 궁도의 규칙을 모두 잊고 전적으로 직관에 따라 행동할 때 궁사는 진정한 깨우침을 얻는다고 했다. 하지만 규칙을 잊을 수 있으려면 먼저 그 규칙을 인지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단계에 이르면 배움의 과정에서 필요했던 도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 길에 이르게 한 수단보다는 길 자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명상으로 비유하자면 온전함에 깨어있는 상태가 아닐까 한다. 온전함은 완전한 것은 아니다. 현상에 대한 비판단적 알아차림이 강화되면서 집착심이나 성냄이 없어지면서 자애와 연민심이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행복하고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자애의 마음, 고통 받는 사람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고 행동하는 연민의 마음,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하는 마음 그리고 어떤 상황이든지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평정심, 즉 사무량심이 그러한 상태가 아닐까 한다.

진은 이방인과의 대결을 통해 그에게 기술보다 중요한 가르침을 이야기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어린 소년은 궁도를 가르쳐달라 청하며, 진에게 최고의 자리에서 활을 내려놓고 목수가 된 이유를 묻는다. 진은 소년의 인생에 빛이 되어줄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에 “무엇보다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이 감명 깊었더라도 스스로 직접 경험해야만 진정한 의미가 된다는 걸 잊지 말거라”라고 당부한다.

이 말은 앙굿따라 니까야의 깔라마경에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소문으로 들었다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 해서,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 말라. 그대들은 참으로 스스로가 ‘이러한 법들은 해로운 것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이러한 법들은 지자(智者)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많이 받들어 행하면 손해와 괴로움이 있게 된다’고 알게 되면, 그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라.”

이처럼 우리가 할 일은 스스로 생각하고 공부하고 수행하면서 깨닫는 것이다. 필자에게 소설 〈아처〉는 부처님 말씀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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