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치애와 허공

〈원문〉 부처님이 아난과 여러 대중에게 고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유루세계의 12류 중생의 본각묘명(本覺妙明)과 각원심체(覺圓心體)는 시방 부처님으로 더불어 둘도 없고 다름도 없건만 너희들 망상으로 진리에 미혹한 것이 허물이 되었기 때문에 어리석은 애욕(痴愛)이 발생하고 그리고는 두루 미혹해졌기 때문에 허공이 생겼으며, 변화되면서 미혹이 쉬지 아니하여 세계가 생겨남이 있게 되었으니 이 시방의 미진국토는 무루(無漏)가 아니라, 모두 미혹과 완고한 망상으로 안립된 것이니라. 마땅히 알라. 허공이 너의 마음 안에서 생긴 것이 마치 구름 한 조각이 맑은 하늘에서 생긴 것과 같으니 하물며 허공에 있는 모든 세계야 더 말할 게 있겠느냐? 너희들 한 사람이 진(眞)을 발하여 근원(根元)에 돌아가면 이 시방의 허공이 다 모두 소멸해 없어질 것이니 어떻게 허공 가운데 있는 국토가 남아 있겠느냐?”

〈강해〉 이 장(章)에서 부처님 하신 말씀은 파격적으로 특별하다. 먼저 유루세계의 12류 중생의 각원심체(覺圓心體)가 부처님과 똑같다 하였다. 유루세계(有漏世界)란 번뇌가 있는 세계라는 말이지만 동시에 생사가 있고 생멸이 있는 세계라는 말이다. 각원심체란 깨달음의 결핍이 없는 마음 그 자체를 말한다. 12류 중생이 똑같다는 것은 〈열반경〉에 설한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 본질적으로 보면 각(覺)이란 말이다.

그런데 중생은 이 각에 미혹하여 치애(痴愛)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치애란 망상을 말미암아 진리를 미혹한 허물을 일컫는 말인데 구상차제(九相次第)에서 업상(業相), 전상(轉相)이 나오는 단계다. 각(覺)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을 모르는 것도 미혹으로 인한 치애 탓이다. 이 치애(痴愛)의 발생으로 허공이 생기게 되었다는 매우 비약적인 설명이 덧붙여진다. 이는 회매위공(晦昧爲空)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미혹이 꽉 찬 공간적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다. 쉬지 않고 미혹(迷惑)이 확대되어 생긴 허공에 세계가 있게 되었다고 이어 말하고 있다. 결국 허공을 의지하여 생긴 세계가 미진수 국토로 확장되어 번뇌로 꽉 차게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예토(穢土)가 되었다는 것이다. 극락세계와 같은 정토는 유루세계(有漏世界)가 아닌 무루세계(無漏世界)다. 유루세계는 완고한 망상으로 안립된 세계인데 망상은 유정세계이고 완고함은 무정세계이다, 곧 정보(正報)와 의보(依報)를 합하여 한 말이다.

부처님은 다시 아난에게 허공이 너의 마음 안에서 생긴 것이 조각구름이 맑은 하늘에서 생긴 것과 같다고 일러준다. 이 역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에 해당되는 말이다. 〈화엄경〉의 대의와 〈능엄경〉의 대의가 같다. 그래서 〈능엄경〉을 소화엄(小華嚴)이라 불렀다. 허공을 의지해 세계가 생겼으나 허공 자체가 조각구름과 같은 것이므로 보잘것없는 것이니 허공 안에서 생긴 미진국토야 더 말할 게 있느냐고 하였다. “한 사람이 진(眞)을 발해 근원(根元)에 돌아가면 이 시방의 허공이 다 없어진다(.一人發眞歸元 此十方空皆悉銷殞)”는 이 말씀이 엄청난 말씀이다. 진여의 성을 발해서 본래의 여래장묘진여성 자리로 돌아가면 시방세계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이는 미혹이 없어지면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중생의 쪽에서 볼 때 모든 존재의 차별상이 나타나 보이는 것은 미혹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생이 성불하면 부처의 세계가 되고 그 부처의 세계에서는 일체의 차별 경계가 송두리째 없어진다는 말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경지가 현현(顯現)하여 모든 세계를 벗어난다는 말이다. 허공 가운데 있던 모든 세계가 무너져버린다는 이 말은 중생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부처의 경지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불교를 복귀사상(復歸思想)을 가지고 있는 종교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깨달음을 이루면 본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본래로 돌아간다는 것은 각(覺), 곧 깨달음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수행에서는 깨달은 이들을 본래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다. 한 번 본래 마음 등져버리고(一從違背本心王) 몇 번이나 삼악도 들어가고 태(胎), 난(卵), 습(濕), 화(化) 사생을 겪었던가?(幾入三途歷四生), 오늘 번뇌의 때 깨끗이 씻어내고(今日滌除煩惱染), 인연 따라 옛 그대로 제 고향에 돌아가누나(隨緣依舊自還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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