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에 영화로 ‘해방의 영감’을 주다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 상징 ‘나운규’
아리랑 등 민족 애환 담긴 영화 제작
구속받지 않는 인간상 위해 광인 연기
당시 관객들에게 영감과 해방감 선사

한국영상자료원이 10월 20, 21일 이틀에 걸쳐 개최한 ‘나운규의 〈나의 러시아 방랑기〉와 시나리오 〈황무지〉 입체낭독 공연’의 모습.
한국영상자료원이 10월 20, 21일 이틀에 걸쳐 개최한 ‘나운규의 〈나의 러시아 방랑기〉와 시나리오 〈황무지〉 입체낭독 공연’의 모습.

불교를 두고 어려워하는 오랜 물음 가운데 하나로 ‘무아’와 ‘윤회’의 문제가 있다. 무아(無我)란 모든 존재는 인연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질 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윤회(輪廻)는 중생이 삶을 다하면 사는 동안 지은 업에 따라서 다른 세상에 태어난다는 믿음이다. 

아니, 무아라면 나 자신이 없다는 건데 지은 모든 업을 지고 다시 태어난다는 건 나라는 것이 여전히 집요하고 굳건히 있다는 것이니 가르침끼리 서로 모순이 아닐까? 이 물음은 불심이 부족하거나 공부가 얕아서 생기는 의심만도 아니고, 불교의 가르침을 트집 잡아보려는 어깃장만도 아니다.

기원전 150년 경 인도 서북부를 점령한 그리스의 왕 메난드로스도 이런 의문을 품었더랬다. 메난드로스 왕이 당대 인도의 비구승 나가세나와 나눈 문답을 모은 〈밀린다팡하〉라는 경전이 있다. ‘밀린다의 질문’이라는 뜻의 이 경전은 〈밀린다왕문경〉이라고도 하고 〈나선비구경〉이라고도 한다. 서양 사상의 뿌리인 그리스 사람으로서 메난드로스 왕은 불교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그리스적으로 질문하고, 나가세나 스님은 다른 문명권에서 온 이방의 왕이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어 답을 하는데 이 문답이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때 메난드로스 왕은 어떻게 ‘무아’와 ‘윤회’가 양립할 수 있는가도 있는가를 따져 물었던 것이다.

나가세나 스님은 이 질문에 대해 촛불을 비유로 들어 답했다. 촛불은 금방 꺼뜨릴 수도 있지만 다른 촛불로 옮겨 붙을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촛불이라는 ‘존재’는 실체가 없다고도 할 수 있으나 촛불이라는 ‘현상’은 영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그러니 하나하나의 일시적 관점에서 보자면 무아라고 할 수 있지만, 전체를 아울러 보자면 그것이 바로 윤회라고.한국영화사에도 이런 촛불이 있다. ‘나운규’라는 촛불.

춘사 나운규는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조선 영화의 상징이었던 감독이자 배우였다. 여러 영화를 제작하고 직접 출연했을 뿐 아니라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글도 많이 남겼다. 영화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나운규의 〈아리랑〉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운규에 대해 관심이 정말 많은 영화학자나 자료수집가들 조차 아무도 〈아리랑〉은 물론이고 나운규가 출연한 어떤 영화도 볼 수가 없다. 한 편도 ‘필름’이라는 물리적 실체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안다. 나운규라는 빛나는 영화인이 있었고, 식민지 조선의 대중들은 나운규가 만든 영화에 열광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 정부는 나운규를 기리는 춘사영화예술상을 제정하고, 독립에 대한 영화 청년의 공로에 건국훈장을 추서해 국가적으로 감사의 뜻을 죽은 후에라도 전하고 있다는 것을.

마침 10월 20일, 21일 이틀에 걸쳐 ‘나운규의 〈나의 러시아 방랑기〉와 시나리오 〈황무지〉 입체낭독 공연’이 펼쳐졌다. 이 행사는 시청각 유산의 중요성과 보존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시청각유산의날인 10월 27일 즈음에 한국영상자료원이 매년 의미있는 영화 관련 시청각 문화유산을 되살리는 특별한 기획이니 영화와 영화인에게는 그야말로 새로운 삶으로의 윤회와도 같다고 할까. 더구나 1902년생인 나운규가 태어난 날이 바로 세계시청각유산의 날이 된 날짜인 10월 27일이니 전설이 된 인물을 되살리는 듯 한 공연이었다.

나운규는 열악한 제작 환경과 일제 검열 속에서도 활발한 영화 창작활동을 통해 영화계를 이끈 중심적 인물이었는데도 이번 행사가 상영회가 되지 못하고 입체낭독 공연이 된 까닭은 영화라는 실체를 지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볼 수 없어도 나운규가 남긴 글은 남아 있다. 이번 공연 무대에 오른 〈나의 러시아 방랑기〉는 1928년 문예영화 창간호에 수록된 자전적 수필을 극으로 옮긴 것이고, 〈황무지〉는 1937년 폐결핵으로 죽기 전에 써놓고 미처 영화로 완성되지 못한 유고 시나리오다. 

이번 입체낭독 공연은 글로 남아 있던 나운규의 두 작품을 한국어에 대한 감각을 중심으로 문학과 연극 사이의 수사학을 탐구하는 공연단체인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배우들의 목소리와 몸짓을 빌어 숨결을 불어넣고, 음악과 음향 사운드와 배경 영상효과를 더해 재탄생시킨 특별한 무대였다. 그러니까 작품에도 존재의 격이 있고, 윤회의 기회가 있으며,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영화에 담긴 나운규의 발원이 간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식민지 조선에서 나운규의 발원에 공감한 영화 대중의 염원과 그 뜻을 어떻게든 복원해보려는 영화연구자들의 뜻 또한 지극했고.

〈나의 러시아 방랑기〉는 1928년 〈문예영화〉 창간호에 실린 나운규 자전적 수필 첫 회였다. 이 글에서 나운규는 청소년 시기에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운동 조직에 가담했다가 일제에 쫓겨 조선 땅을 떠나 러시아 백군에 입영했을 때의 상황을 전한다. 당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있던 러시아에서 인종차별이라는 수모를 겪으며 조선인 동료 둘과 함께 탈영해서 30리 거리에 있다는 조선인 부락을 찾아가는 어린 탈영병들의 여정과 심정이 배우들의 목소리로 안타깝고 조마조마하게 전해진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 글이 실린 〈문예영화〉가 창간호만 발간되고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아 그 뒷이야기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를 업으로 삼아 생활고와 과로에 시달리다 폐결핵이 심해져 서른여섯의 나이로 죽기 전 쓰고 있었던 시나리오 〈황무지〉는 함경북도 외진 산골 마을 장백촌을 배경이다. 금맥을 찾으러 왔다는 청년 ‘박’이 학교도 없고, 소금도 귀한 첩첩산중에 터를 잡고 살던 장노인 집에서 신세를 지고 떠났다가 산중에서 사고를 당해 다시 장노인 집으로 오게 된다. 

대학까지 나오고도 황무지로 찾아든 청년 ‘박’이나, 고향 떠나 가족 모두를 이끌고 황무지 일구고 사는 장씨 노인이나, 겨울에 강이 얼어 빙판 위로 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외부로 오갈 길도 없는 황무지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구구절절한 내력 소개하지 않아도 다들 고단했을 사정이 있으리라.

박은 팍팍한 살림에도 사람 귀하게 여기는 장씨 노인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금맥 대신 공동체를 귀하게 여기게 된다. 장씨 노인 딸과의 두근거리는 만남도 좋고, 자기 손자 뿐 아니라 마을 아이들 모두에게 어떻게든 공부를 가르치려는 장씨 노인의 인품도 존경스러운 청년 박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학교를 짓고 더불어 살고자 한다. 그러나 산중에는 아편을 몰래 재배해 파는 밀경꾼 집단이 있고, 그들은 학교가 생겨 마을이 커지면 불법적인 아편 재배가 발각될까봐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방해를 일삼는다. 그런 척박한 황무지에서도 새 생명은 태어나고, 아이들은 자라나며, 사랑도 움트고, 사람도 변해간다. 

나운규는 〈황무지〉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로케이션도 마쳤다고 한다. 아마도 이 작품에는 〈나의 러시아 방랑기〉에서 어린 나운규와 동료들이 탈영해서 찾아간 조선인 마을에서 겪었던 경험이 녹아들어 있을 것이다. 영화로 옮겨지지 못한 시나리오 안에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장면과 동선에 대한 지시까지 남겨 둔 원고는 나운규의 사진들, 영화 출연 장면들, 유품들과 함께 한국영상자료원 1층 한국영화박물관 안에 전시돼 있다.

이 공연을 보면서 영화라는 실체로 볼 수는 없지만 기록으로 남겨진 〈아리랑〉이 얼마나 대단했었을까 새삼 울컥했다. 1926년 〈아리랑〉이 상영되던 당시 상황을 전하는 일화들만 해도 극적인데 영화는 오죽했을까?

나운규가 시나리오, 감독, 주연까지 맡은 〈아리랑〉의 내용은 이렇다. 실성한 청년 영진(나운규)에게는 영희(신일선)라는 어여쁜 여동생이 있다. 실성한 영진을 각별히 여겨 찾아오곤 하는 오빠 친구 현구와 사랑하는 사이인 영희를 악덕 지주집 머슴이자 친일파인 오기호가 겁탈하려 하자 영희를 구하려는 현구와 난투극이 벌어진다. 그러자 실성한 영진이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이면서 정신이 돌아오지만 일본 경찰에게 살인 혐의로 끌려가게 되고, 그 뒤로 ‘풍년이 온다/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날 넘겨 주오’라는 가사의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끝난다고 전해진다. 

나운규는 생전 인터뷰에서 ‘아리랑’을 주제가로 지은 까닭은 어린 시절 고향인 국경 지방 회령에서 당시 한참 철도를 놓던 남쪽 출신 노동자들이 부르던 노동요가 아리랑이었는데 그 안에 담긴 애환을 살리고자 기억을 되살려 직접 지었다고 밝혔으니 아리랑에 담긴 발원이 얼마나 깊고 절절하게 영화와 음악에서 살아났으랴.

세상의 권위도, 무서운 것도, 머리 숙일 곳도 없는 구속받지 않는 인간을 그리기 위해 미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나운규의 발원이 식민지 조선의 관객들에게 어떤 영감과 해방감을 주었을지는 영희 역을 연기한 신일선 배우의 회고로 짐작할 수 있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목 놓아 울기도 했고, ‘아리랑’을 따라 부르기도 했으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까지 했다고 한다. 평양 상영관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 극장의 들보가 부러질 정도였다니 영화 속 미치광이 청년에 담긴 나운규의 발원이 촛불이라면 식민지 조선의 관객들은 그 촛불에서 옮겨 붙어 꺼지지 않는 촛불들이었으리라. 

모쪼록 새롭게 살아난 이 공연이 한국영상자료원이 무성시대 영화를 발굴해서 되살려낸 〈청춘의 십자로〉나 〈이국정원〉과 같은 작품들처럼 여러 곳에서 오래오래 관객들을 만나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뜻을 밝히게 되리라 기대해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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