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공화(空華)

〈원문〉
“아난아, 이와 같이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신선, 천취, 아수라에 이르기까지 칠취(七趣)를 정밀하게 연구해 보면 모두가 혼침한 유위상이라, 망상으로 생을 받아 망상으로 업을 따르거니와 미묘하고 원만하며 밝은 지음이 없는 본래의 마음에서는 다 허공의 꽃과 같아서 본래 붙을 데가 없느니라. 다만 하나같이 허망한 것이라 더 이상 근거가 되는 실마리가 없느니라.

아난아, 이들 중생이 본래의 마음을 알지 못하여, 이 윤회를 받아서 무량겁을 지나도록 참되고 청정함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두 살생, 투도, 음욕을 따르기 때문이니라. 이 세 가지를 반대로 하면 곧 살생, 투도, 음욕이 없는 데 태어나니 이름이 있는 것은 귀신의 무리요, 이름이 없는 것은 천취(天趣)니라. 있고 없음이 서로 기울어서 윤회의 성품을 일으키느니라.

만약에 묘하게 삼마제를 발하는 자는 곧 묘하고 항상하고 고요하여, 있고 없음이 없으며, 둘이 없음도 또한 소멸되어 오히려 살생하지 않고, 투도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음도 없으리니 어떻게 다시 살생하고 투도하고 음행하는 일을 따르리요.”

〈강해〉
일곱 갈래로 나눠지는 중생의 세계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모두가 어둡고 침침한 유위의 모습이라 하였다. ‘유위의 모습(有爲相)’이란 인연에 의해 생성되어 변화하는 상태라는 말이다. 이 유위의 세계가 망상에서 시작되어 업을 따라 이루어진다고 하였고, 본래의 마음에서 볼 때는 허공의 꽃(空華)과 같은 허망한 것이라 하였다. 본래의 마음이란 망상이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이다.

부처의 세계에서는 중생의 세계가 허공의 꽃이라는 것이다. 허공의 꽃은 눈병 난 눈에 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중생이 윤회를 하지만 윤회를 하는 그 상태 역시 공화(空華)라고 밝혀 놓았다. 다만 업(業)을 가지고 볼 때는 근본 원인이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업인 살생, 투도, 음행이라 하였다. 업이 지어지면 과보가 있는 것이고 그 업과 과보의 관계가 인과응보(因果應報)라 시간의 선후가 결정되며, 삼세로 이어지게 된다. 십이인연설에도 삼세양중인과가 적용되기도 하였다. 과거와 현재가 한 겹의 인과관계를 맺으며 또 현재와 미래가 한 겹의 인과관계를 맺게 되어 두 겹의 인과관계를 맺고 삼세가 연속된다는 것이다.

윤회라는 말은 시간의 연속성과 공간의 이동성이 종합된 말이다. 흔히 말하는 인연(因緣)이라는 말은 옛날에는 베틀에 올라가 베를 짜는 것에 비유해 설명하기도 하였다. 베를 짜는 것은 씨줄과 날줄을 교직시켜 천을 만드는 것이다. 씨줄은 시간을 의미하고 날줄은 공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이 베가 짜이듯이 짜이는 것이 인연이라 했다. 또 중생(衆生)이라는 말의 뜻을 세 가지로 설명하기도 한다. 원래 이 말은 범어 사트바(sattva)를 번역한 말로 현장은 유정(有情)이라 번역하고 구마라습은 중생(衆生)이라 번역하였는데 아직도 중생이라는 말이 일반화되어 있다. ‘중(衆)’ 자는 많다는 뜻이고, ‘생(生)’ 자는 태어나 살고 생활한다는 뜻을 가진 글자다.

중생의 세 가지 뜻은 첫째, 태어날 때 수많은 인연에 의해서 태어난다는 뜻이다. 천지만물의 모든 존재는 연기적 존재이므로 어느 것도 고립독존(孤立獨存)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상호 의존하여 존재하므로 인연이 모이고 쌓아져야 생겨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세세생생(世世生生)이라는 말처럼 하루하루가 계속 이어지듯이 중생의 한 생 한 생이 다겁다생(多劫多生)으로 계속 이어져 끝이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다생설(多生說)이다. 셋째는 너와 내가 어울려 공동으로 살게끔 되어 있다는 뜻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처럼 혼자서는 못산다는 말이다. ‘중생’이라는 말의 뜻을 살펴보면 중생이 윤회적인 존재라는 것도 알게 된다. 이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며, 해탈의 필수조건이 본래의 마음을 바로 아는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물론 깨달은 부처의 세계에서는 윤회가 없다. 눈이 피로하거나 병이 나지 않은 건강한 눈에는 공화(空華)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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