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햇살에 등을 기대는 계절이다. 그 햇살이 신비로워 광령(光靈)’이라 불리던 곳이 있으니 바로 제주시 광령(光令)’이다. 지금은 산이 아름답고 물이 맑다해 광()이요, ‘주민이 밝고 선량하다해 령()이라고 하지만, 이원진의 <탐라지>에서는 광령(光靈)’으로 기록돼 있다. 이 마을의 절동산에 자리한 향림사 경내에는 예로부터 절물이라 불리는 샘이 있는데 이곳에 있었다는 고대사찰 영천사(靈泉寺)’의 샘에서 유래한 것이다.

길을 걸어보니 이 물 맑은 옛 영천사지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제주목관아에서 서쪽으로 25리에 있다.”라고 한 묘련사지가 아닌가 싶다. 물론 묘련사지의 위치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증보탐라지>에는 애월읍 곽지리 서쪽이라 했으나 거리가 40리가 넘는다. 그리고 <북제주군의 문화유적>에서는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 774번지(대각사) 주변 일대를 묘련사지로 보고 있다. 그 근거로 고려사찰 수정사와 제주목관아를 보수할 때 묘련사에서 기와를 가져왔다는 기록에 따라, 이 일대에서 동원차처관이원촌(同願此處官李員村)’. ‘만호이(萬戶李)’ 등의 명문기와가 동일하게 출토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 기와들은 오등동사지에서도 발굴돼 그 근거를 뒷받침하기에 부족하다.

고려 말 강진 백련사 혜일선사는 이 같이 묘련사를 노래했다.

황량한 남쪽 이곳 날씨는 맑다가도 자주 흐려지는데
오늘 저녁은 맑게 개어 나그네 마음을 맑혀주네
한 조각 꿈인 인생이야 피고 지겠지만
한가위 달빛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
멀리 내다보니 아득한 안개 속 물가는 확 트였고
비낀 달그림자 침침한 죽실에 드리워
밤이 깊어갈수록 생각은 오히려 맑아지니
저절로 시가 솟아나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네

이러한 정취를 담고 있고, 기록된 거리상으로 보아 지금의 향림사 주변이 묘련사지로 추정된다. 그리고 동원(東院)인 보문사지에 보문촌이 있었듯이 서원(西院)인 묘련사에도 광령마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론된다.

이 묘련사에서 제주 최초의 목판 판각이 이루어졌다. 순천 송광사의 <조계산송광사사고>와 조선고적연구회의 <순천송광사장고려판천순판불전>에 의하면 이곳 묘련사에서 금광명경문구판각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된다. 이 판본 끝에는 원정 2(1296) 고려국제주묘련사(高麗國濟州妙蓮社)에서 폭포사주지 안립이 주도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려국제주(高麗國濟州)'라는 문구인데, ‘고려국(高麗國)’이라는 문구는 묘련사 판본이 국간(國刊)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제주라는 지명이 이 판본을 통해 처음 나타난다는 것이다. ‘탐라는 독립적 성격을 띠지만 제주[]’는 고려에 속한 지방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1300년부터 다시 원의 간섭이 강화되면서 탐라총관부에 이어 탐라군민만호부라는 명칭이 나타나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이 경판 제작 시기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을 쓰는 등, 고려가 원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때이다. 1294년 원세조가 죽고 성종이 즉위하면서 충렬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잠시지만 탐라를 고려에 돌려준다.

이와 함께 충렬왕은 원찰로 개성에 묘련사를 창건해 신행결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이 절은 천태사상을 선양하는 중심사찰로 천태종의 결사도량인 백련사(白蓮社)의 분원 역할을 맡아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자 했다. 이를 위해 호국삼부경의 하나로, 참회하는 법, 업장 소멸, 사천왕에 의한 국가 보호, 불법을 보호하는 국왕의 공덕, 이 경을 설하고 독송하는 이의 공덕에 대해 설하는 금광명경을 판각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인지 제주묘련사도 절[]이 아닌 결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백련사의 혜일선사가 탐라국을 돌아보았고, 제주 묘련사에서도 금광명경을 판각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서 <탐라지>에 의하면 제주목관아의 종을 주조할 때 묘련사의 종을 가져다가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 묘련사는 목판 판각뿐만 아니라 철 주조 기술까지 갖추고 있던 탐라의 대표사찰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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