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독, 고(苦)를 회피한 결과

현실 도피를 위해 향락 즐겼던 야사
공허함 느끼고 현실 마주하며 이겨내

무더운 여름이었다. 상담실로 찾아온 영이 씨(가명)의 눈가는 땀인지 눈물인지 구분이 안되는 물기로 가득했고, 멍한 표정으로 한동안 의자에 앉아있었다. 시원한 물을 담아 건네자 컵을 들고선 울기 시작했다. 영이 씨는 흐느끼며 “오늘은 죽어버리라고 소리를 질렀어요”라고 했다. 영이 씨가 “나가 죽어! 제발 나가죽어버려!”라는 모진 말을 쏟아낸 대상은 바로 영이 씨의 아버지였다.

영이 씨의 아버지는 익명의 알코올중독자회 (Alcoholics Anonymous, AA)에서 단주를 실천하고 있었다. 6개월 동안 단주하다 영이 씨가 상담실을 방문하는 그날 다시 술을 마신 것이다. 비틀거리며 술에 취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의 모습에 절망을 느끼고 “더 이상은 못살겠다”며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영이 씨는 그대로 집을 뛰쳐나와 한참을 걸어 상담실에 도착했다. 영이 씨의 아버지는 10여 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술을 반복해서 찾기 시작했다. 사별 후 어렵게 딸을 보살피고 키우고 있었지만 동시에 깊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6개월 전에는 낮에 소주 다섯병을 들이키고 길을 걸어가다 도로에 넘어졌다. 넘어진 아버지를 피하려던 자동차는 옆차선에서 달리던 차와 부딪혀 사고가 났고 운전자들은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이 사건 이후 아버지는 단주를 결심했다. 하지만 결국 술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영이 씨는 26살이었고 작은 키에 동그란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매번 똑같은 옷을 입고서 상담실을 찾곤 했다. 심각한 우울감과 자살 시도로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어 보였다. 아버지의 단주 결심에 기대를 하면서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좌절로 영이 씨의 마음은 절망이 가득했고, 결코 자신의 삶은 이 고통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가족이 이렇게 힘들어하는데도 중독 당사자는 술의 유혹을 끊어내기가 정말 어렵다. 알코올 중독자가 있는 가정은 중독자와 함께 치료가 동시에 필요하다. 가족들은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버림받은 상태처럼 피폐해진다.

중독자가 있는 가정의 가족들은 중독자의 치료가 우선시 되기에 자신의 어려움은 외면당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자신이 문제 원인이 아니기에 치료 대상이 아니라고 여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양한 중독은 대물림 현상이 있다. 어릴 때 부모가 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회피하는 모습을 본 자녀들은 힘겨운 문제가 생기면 그 모습을 되풀이 할 가능성이 많아진다. 가족은 중독자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동기부여자가 되지만 동시에 희생자인 것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본 알코올의 효과는 잠시나마 정신적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이다. 억압했던 마음도 쉽게 풀어지고 홀가분해진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직면하기에 너무나 힘든 현실을 잠시나마 벗어나는 ‘회피’의 안위이다. 이런 욕구는 강박적으로 음주를 부추기고 점차 술에 대한 갈망은 조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알코올 중독 12단계 치료법에서 제시하는 첫 번째 단계는 ‘밑바닥 체험’이다. 바닥을 체험한다는 것은 바로 ‘회심’을 위한 동기를 위해서이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굳게 결심하게 되는 계기이며 그 밑바닥은 각기 다르다. 마주하기 힘들어 피했고 알코올 중독으로 자신을 밀어낸 ‘괴로운 현실’을 직면하는 것. 이것이 첫 출발이다.

‘바닥치기’라는 첫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집요하게 따라 붙은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유혹은 안이비설신 오감의 모든 감각을 통해 촉발된다. 즉 매일 24시간 365일 깨어있는 마음자세가 아니면 쉽게 넘어가버린다. 그리고 마음의 갈망을 부추기는 생각들이 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 ‘즐기고 싶다’,‘ 될 대로 되라’ 등 갈망을 부추기는 생각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치료에서 명상 과정이 포함된다.

책 <고타마 붓다의 생애>를 보면 현실을 도피하고 매일 밤을 향락으로 보낸 사람이 나온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베나레스(현, 바라나시)에 야사(Yasa)라는 젊은이가 살았다. 야사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는 삶을 보냈다. 현대 시점으로 설명하자면 재벌가의 외동아들 이라고 할 수 있다. 야사는 부호의 아들이었고 겨울과 여름 그리고 우기를 보내기 위한 세 채의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야사는 별장을 돌아가며 지냈고 애욕을 즐기고 누렸으며, 매일 밤 각 처소에는 여자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유흥을 제공했다. 마치 뉴스에서 보는 재벌 2세의 마약파티 같은 장면이 떠오른다.

이런 삶을 살던 야사가 마음을 돌이키는 통찰을 마주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야사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고 시녀들이 뒤엉켜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추악함과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이 무슨 재앙인가! 이 무슨 재난인가!”라며 탄식하고 녹야원에 계신 부처님을 찾아간다. 부처님은 야사에게 “여러 애욕에는 환난과 공허가 있다. 애욕에서 벗어나면 큰 공덕이 있다”고 설법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현실이 주는 고통을 직면하지 못하고 환난과 공허를 피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 술은 손쉬운 회피 도구이다. 하지만 술은 현실을 더욱 암담하게 만들고 더욱 깊은 좌절로 이끈다. 눈덩이처럼 괴로움을 크게 하고 결국에는 희망마저 꿈꿀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린다. 부처님은 애욕에는 환난과 공허가 있다고 했다.

부처님은 아들을 찾아 온 야사의 아버지에게 “발생한 것은 모두 소멸한다”며 ‘고집멸도’ 사성제를 설한다. 부처님이 설법한 네 가지 고귀한 진리, 사성제의 첫 번째가 고(苦)이다. 괴로움의 존재이다. 삶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접촉해야 한다. 고통에 대한 자각과 일깨움이 시작점이 되어야 중독자들은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참된 노력을 시작할 수 있다.

야사는 알아차림 수행을 하며 애욕에서 벗어났고 번뇌에서 해탈했다. 사성제와 알아차림, 이것은 모든 중독의 유혹을 이겨내는 기본 중에 기본이다.

*사례는 내담자 보호를 위해 취지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재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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