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합일된 모습, 불상으로 화현하다

무상정등각을 위한 수행을 통해
12연기와 무아를 깨달으신 붓다
근본 무명을 통찰한 그 곳에는
붓다가 이루신 ‘大正覺’이 있다

도판① 항마촉지인의 수인. 오른 손으로 땅을 가르켜, 마왕과 마군을 제압하는 손 모양.
도판① 항마촉지인의 수인. 오른 손으로 땅을 가르켜, 마왕과 마군을 제압하는 손 모양.

석굴암의 본존불인 ‘석가모니대각상’(또는 석가모니성도상)은 석가모니 붓다께서 대정각(大正覺,큰 깨달음 또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신 모습이다.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득도하기까지 총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무수한 전생에서부터 붓다는 정진해 왔다. 특히 가까운 전생에서는, 아라한이 아니라, 부처가 되기 위해 6바라밀의 공덕까지 갖추는 데 여념에 없었다. 

내게는 믿음과 노력과 지혜가 있다. 어찌 삶의 ‘집착’을 말하는가. 몸과 피는 말라도 지혜와 하나 된 마음은 더욱 편안할 것이다. 보라, 이 마음과 몸의 깨끗함을! 너의 첫째 마군은 욕망이요, 둘째는 혐오이며, 셋째는 굶주림이며, 넷째는 집착이다. 다섯째는 권태와 수면이고, 여섯째는 공포이고, 일곱째는 의심이며, 여덟째는 겉치레와 고집이다. 잘못된 방법으로 얻은 이득과 명성과 존경과 명예와 또한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이것들이 바로 너의 마군이다. 나는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다. 굴욕적으로 사느니 싸우다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 
-<숫타니파타> 중에서

‘에고’의 일어남이 허공 가린다
“나는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다. 굴욕적으로 사느니 싸우다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라며 이번 생에는 목숨마저 버릴 각오로 석가모니 붓다는 출사표를 던진다. 수십 수만 수억 년의 생을 윤회하면서 붓다께서 찾아낸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완전한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 분의 깨달음의 단계를 따라가 보자. 

먼저, 완전한 깨달음 또는 완전한 열반(빠리닙바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미 붓다께서 위에 인용한 문구에서 언급하셨듯이 이들은 욕망, 혐오, 굶주림, 집착, 권태, 수면, 공포, 의심, 겉치레, 고집이다. 나에게 들러붙는 이득과 명성, 존경과 명예, 칭찬과 경멸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마군이다. 이러한 무수한 마군들의 밑바탕에는 마왕이 있는데, 마왕은 ‘나’라는 아상(我相) 또는 에고(ego)이다. 깨달음의 청정한 바탕자리는 일순 에고에 가려져 버린다. 에고라는 마왕은 무수한 마군들을 불러들인다.

에고는 참으로 집요하고 끈질겨서, 우리가 체험한 가장 숭고한 깨달음의 순간마저 ‘대상화’해버린다. ‘하나’가 된 합일의 상태마저, ‘내’가 체험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에고의 일어남으로 인해 다시 ‘나와 대상’이라는 주체와 객체로 나뉘어 버리고, 우리는 다시 에고의 감옥으로 떨어진다.  

위빠사나 ‘혜(慧)’의 위대함
붓다는 당시 유행했던 기존 수행법인 사마타(선정) 수행을 통해 (선정 수행의 최고 경지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까지 체험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존재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알아차린다. 그렇다면, 기존에는 없는 붓다가 깨달은 방법은 무엇일까?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이것은 무엇일까? 바로 ‘혜’라는 통찰지의 발견이다. 붓다의 실참 수행법의 핵심은 ‘정(定)+혜(慧)’이다. ‘정’을 바탕으로 ‘혜’를 쏜다. 즉, ‘정’이라는 밀도 높은 고요한 경지를 바탕으로, ‘혜’라는 통찰지를 내 존재에 쏘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흔들리는 총을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고, 대상(덩어리)를 향해 총알을 발사하는 것. 총을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는 것이 ‘정(사마타 수행)’의 훈련이라면, 과녁을 향해 발사하는 총알은 ‘혜(위빠사나 수행)’이다. 날카롭고도 밀도 높게 연마된 ‘혜’의 총알은 덩어리인 대상을 분해하려 박살낸다. 그러면 바탕자리에서나, 이 존재의 안팎으로나 공(空)이 드러난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위대한 실참법의 요지인 ‘아나빠나 삿띠’는 ‘정과 혜’를 동시에 계발하는 수행법이다. 정이라는 바탕에 혜를 장착하니, 존재는 하릴없이 12연기로 분해되어 해체되어 버렸다. 이것이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석가모니 붓다를 위대하게 하는 실참법이다. 이것을 ‘정혜쌍수(定慧雙修)’ 또는 ‘지관겸수(止觀兼修)’라고 한다.  붓다 직설(直說)의 실참법을 언급한 초기 경전으로 <디가 니까야>의 ‘대념처경’(D22) ‘대인연경’(D15), <맛지마 니까야>의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경’(M118), ‘몸에 마음챙기는 경’(M119) ‘마음챙김의 확립경’(M10) ‘바른견해경’(M19) 등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도판② “묘한 이치를 끝까지 보고 ‘커다란 깨달음의 방’으로 들어가셨다.” 깨달음의 방은 둥근 여의주의 건축(석굴암)으로 조형된다. 
도판② “묘한 이치를 끝까지 보고 ‘커다란 깨달음의 방’으로 들어가셨다.” 깨달음의 방은 둥근 여의주의 건축(석굴암)으로 조형된다. 

붓다 깨달음의 생생한 과정
그러면 보리수 아래에서 일어난 붓다의 생생한 깨달음의 체험과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며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는 정념(正念)”의 상태가 계속 유지되자, 붓다는 그 상태에서 먼저 자신의 전생을 돌아본다.

한 번·두 번· 세 번·네 번, 수백 수천수만 번의 삶. 끝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삶들을 여실하게 본다. 그러는 동안 무명은 사라지고 빛이 나타났으나, 그러한 기쁨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계속 정진해 나아갔다. 이것이 첫 번째 지혜이다. 

두 번째 지혜를 증득했을 때는 그러한 부동의 마음으로 뭇 중생들의 삶을 통찰한다. 우리들이 천하고 고상하고 아름답고 추하고 행복하고 더러운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윤회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업(業)의 인과(因果)라는 사실을 통찰하여 알게 된다. 세 번째 지혜는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사성제(四聖諦)를 보게 된 것이다. 일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고’(일체개고·一切皆苦)임을 보고, 그것의 원인과 소멸에 이르는 길을 훤히 보게 되니, “내 마음은 관능적인 삶을 동경하는 망상에서 벗어났다.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에서 풀려났으며, 무명에서 비롯된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제 윤회는 끝났다. 더 높은 삶이 성취되었다.(<중부경전 36>중에서)라고 전한다.

첫 번째 지혜는 초경(初更)에 일어났으며 이를 숙명통(宿命通)이라 하고, 두 번째 지혜는 이경(二更)에 일어났고 천안통(天眼通)이라 하며, 세 번째는 삼경(三更)에 일어났고 누진통(漏盡通)이라고 한다. 또는 첫 번째 지혜와 두 번째 지혜의 경지를 합해 숙명지(宿命智)라고 하고, 세 번째를 누진지(漏盡智)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최종적 대大 지혜로 스스로 깨어나는 과정이 새벽 동틀 무렵으로 이어진다. 초저녁에서 한밤중 그리고 새벽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깨달음의 여정이다. 붓다는 누진지를 체득할 때 ‘12연기’를 본다. 존재의 고통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갔다 다시 거슬러 내려오는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하며, 존재의 생멸의 과정을 여실하게 통찰한다. 그리고 궁극의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신다.

이렇게 무상정등각의 대지혜에 이르는 수행은 ‘정념’에서 시작한다. 정념은 팔리어 ‘삿띠(Sati)’에 해당하고 ‘알아차림 또는 마음챙김’으로 번역된다. 경전에는 “정념(正念) 속에서 정사유(正思惟)한다”라고 나온다. 더욱더 깊은 통찰지로 들어갈 때마다 ‘바른 사유’ 즉 정사유(正思惟)의 과정이 동반된다. 정사유의 ‘사유’는 ‘생각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원인이 무엇인가 의문을 갖고 그것을 ‘통찰한다’라는 의미이다. 그 원인을 ‘꿰뚫어 보는 것’이지 사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정념과 정사유의 방법을 통해 존재라는 덩어리의 분해의 분해를 거듭한 끝에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12연기)는 천하에 드러났고 마침내 ‘무아(無我)’라는 진리를 밝혀내셨다. 

“늙고 죽음(老死)은 남(生)에서 생긴다. 남은 무엇을 인(因)으로 하는가? 이는 ‘유(有)의 업(業)’에서부터 왔다. 이제 ‘유(有)의 업(業)’을 관찰하매 이는 ‘취(取)’에서 생겼고, 취는 ‘애(愛)’로써 인을 삼고, 애는 ‘수(受)’에서 생기고, 수는 ‘촉(觸)’을 인으로 삼고, 촉은 ‘육입(六入)’에서 나고, 육입은 ‘명색(名色)’에서 일어나니, 명색은 ‘식(識)’에서 말미암고, 식은 ‘행(行)’에서 나오고, 행은 ‘무명(無明)’을 바탕으로 하네.”  

12연기를 통찰한 그 곳, 즉 근본 무명을 통찰한 그 곳에 ‘대정각(大正覺)’이 있다. “묘한 이치를 끝까지 보고 ‘커다란 깨달음의 방’으로 들어가셨다”라고 전한다. 바로 ‘깨달음과 합일하신 모습’이다. 이 모습은 석굴암의 본존상 ‘석가모니대각상’으로 조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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