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기원하고 품기까지…불교적 産神 ‘제석신’

민간에 출산을 관장하는 신으로 좌정한 제석신 / 여수 흥국사 제석도. 사진제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간에 출산을 관장하는 신으로 좌정한 제석신 / 여수 흥국사 제석도. 사진제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체적ㆍ능동적 존재로서 태아

생명의 잉태만큼 신비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태 속에 한 생명이 잉태되는 일을 단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물학적 인자가 결합하는 것으로만 보지 않는다. 윤회 속의 한 생명 에너지가 부모와 인연이 되어 만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독자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을 거치는 동안 서로 연기(緣起)의 관계로 얽혀 있으며, 그 가운데 가장 각별한 인연이 부모와 자식의 만남이라 보고 있다. 

그렇다면 윤회하는 생명 에너지란 무엇일까.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은 업은 잠재적 에너지 상태로 축적되어 있다가, 죽으면 그 힘이 작용하여 다음 존재를 만든다. 이처럼 축적된 업을 간직하고 있는 식(識)이 윤회의 동력이 되며, 이를 ‘아뢰야식’이라 부른다. 아뢰야식은 사후 중음(中陰)에 머물다가, 업력에 따라 모태에 의탁하여 다음 생을 받는 것이다. 

이때 중음의 존재는 7일을 기준으로 생연(生緣) 찾기를 거듭하여 7·7일에 이르면 반드시 연을 얻게 된다. 중음의 존재와 부모는 연기의 원리로 맺어지니, 서로의 업이 합일하여 마치 자석이 당기듯 인연을 맺는 모습으로 경전에 묘사되곤 한다. 업이 서로 맞지 않을 때, 둘 중 어느 한쪽만 존귀하거나 미천할 때 등의 경우는 태에 들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새 생명이 잉태되기 위해서는 어머니ㆍ아버지ㆍ중음의 업연(業緣)이 서로 화합해야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태아는 새로운 삶에 뜻을 두고 태어날 곳을 찾아다니는 주체적 존재로, 태 속에서 부모와 상호교류하며 영향력을 주고받는다고 여긴다. 따라서 모태 속의 아기는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부모 또한 아기로 인해 선한 영향을 받는다. 

이와 관련해 〈현우경(賢愚經)〉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한 관상가가 빼어난 외모의 아들을 낳은 재상에게 물었다. “이 아기를 잉태한 뒤로 특별한 일이 없었습니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 있었다오. 아내의 성품이 본래 선량하지 않았는데, 아기를 가진 뒤부터 남의 불행을 가엾이 여기고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며 도우려 했답니다.” 재상의 답을 들은 관상가는 크게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아기의 뜻이라오.”

‘아기의 뜻’이라 표현한 데서, 태아는 모체의 자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만이 아니라 부모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적극적 생명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태아를 어머니와 정신적으로 상호교류하는 인격체로 보는 것은 불교의 중요한 사상이다. 
무엇보다 불교적으로 보는 ‘생명의 탄생’이란, 내세의 모습을 좌우할 현세의 씨앗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삶의 출발선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생전의 업으로 부모 인연을 만난 한 생명이, 장차 새로운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또 다른 업보를 지어갈 주체적 미래가 열려있는 것이다.

‘불교적 출생’ 이야기  

성춘향과 이몽룡은 둘 다 사월 초파일에 태어났다. 물론 ‘판소리 춘향전’ 속의 설정이다. 이처럼 설화와 판소리 등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탄생은 대부분 불교와 밀접하게 괸련되어 있다. 지극한 불공을 올리고 태어나는 것은 물론, 예사롭지 않은 존재의 탄생을 드러내고자 부처님의 탄생과 동일한 요소를 대입하는 출생 모티브도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특히 서민들의 삶과 희로애락을 해학적으로 풀어낸 판소리 사설에는 이러한 내용이 풍부하게 담겨있다. 지금까지 전승되는 판소리에는 ‘심청가ㆍ춘향가ㆍ흥보가ㆍ수궁가ㆍ적벽가’의 다섯 마당이 있는데, 그 사설이 점차 소설로 정착되면서 이를 ‘판소리계 소설’이라 부른다. 

‘심청가’는 불교가 중요한 사상적 배경을 이루는 작품이다. 따라서 자식을 바라는 기자불공, 잉태를 암시하는 태몽, 탄생 이후에 이르기까지 출생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불교적 내용에 주목할 만하다. 심봉사와 곽씨 부인은 늦도록 자식이 없어 대찰(大刹), 도솔천왕, 제석 등에 정성을 다해 불공을 올리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이들 부부가 사월 초파일 밤에 똑같이 태몽을 꾸는데, 그 내용이 지극히 불교적이다. 

서왕모의 양녀인 선녀가 몽은사 부처님의 지시로 찾아왔다고 밝히며, 부인의 품 안에 들어오는 꿈이었다. 심청은 부모가 지극정성으로 올린 불공에 감응한 부처님의 점지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부부가 꾼 꿈은 싯다르타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태몽과 흡사하다. 곽씨 부인이 출산한 지 7일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 또한 마야부인이 싯다르타를 낳고 7일 뒤 운명한 것과 겹쳐지는 대목이다. 

이러한 흐름은 ‘춘향가’에도 동일하다. 이몽룡이 광한루에서 그네 타는 춘향을 보고 방자에게 그녀의 신상을 묻자, 방자의 입을 통해 춘향의 출생 내력이 나열된다. 춘향의 어머니 월매는 사십을 넘긴 나이에 자식을 얻고자 지리산 각 사찰을 찾아다니며 백일불공을 드리고, 초하루ㆍ보름마다 목욕재계하며 갖은 정성을 다해 춘향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후 이몽룡이 춘향의 나이를 물을 때, 춘향과 몽룡이 모두 사월 초파일에 태어났음을 알게 되는 대목 또한 등장한다. 

‘적벽가’에는 전쟁에 내몰려 죽음을 코앞에 둔 병사들이, 저마다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태어나 귀하게 자란 존재인지 상세히 나열하여 듣는이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적벽가’는 중국 삼국시대의 적벽강 싸움을 각색한 작품이다. 평화롭게 살아온 백성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가운데, 지친 병사들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서러움을 풀어내는 ‘군사 설움타령’이 나온다. 

내용을 보면, 부모가 명산대찰과 석불미륵을 찾아다니며 지성으로 불공을 올리고, 사찰에 가사와 인등ㆍ창호를 시주하며 자식 점지를 기원했다는 것이다. 태어난 뒤에도 7일까지 근신한 뒤, 49일째 되는 칠칠일에 큰 굿을 하고, 백일에는 큰잔치를 열었으며, 돌이 되었을 때 큰 불공을 올렸다는 점층적 방식으로 마무리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당시 민중에게 널리 향유되었던 것은, 자식을 바라고 잘 되기를 기원하는 불공이 민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아울러 각종 설화의 구성에서 비범한 존재의 출생을 드러내고자 할 때, 석가모니의 탄생담이 이상적 모델이 되어 신성성과 위대함을 공유했음을 알 수 있다. 

출산 후에 차린 삼신상. 사진제공=국립민속박물관
출산 후에 차린 삼신상. 사진제공=국립민속박물관

삼신할미와 제석의 민속 

민간에서는 출산을 관장하는 산신(産神)이 있다고 믿어, 그 신을 삼신ㆍ삼신할미ㆍ삼신할머니라 불렀다. 생명의 잉태와 관련된 신이기에 여성이라 보았고, 집안의 여성을 대표하는 존재이자 여성 조상을 통칭하는 할머니로 모심으로써 아기를 잘 돌보아주리라 여겼던 셈이다. 

일찍이 이능화가 지적했듯이, 이때의 삼신은 태(胎)의 우리말인 ‘삼’에서 나온 것으로 탯줄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예전에는 탯줄을 삼줄이라 부르고, 탯줄을 자른다는 말을 ‘삼 가른다’고 표현하였다. 따라서 삼신을 삼신(三神)이라 보거나 ‘삼신=산신(産神)’으로 발음하기도 하나 모두 본래의 뜻과는 다르다. 

놀라운 것은 이 삼신의 자리에 제석신이 좌정해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의 호법선신인 제석천(帝釋天)은 민간신앙에 다양한 영역의 신으로 수용되었다. 제석은 고려 때부터 단군신화에 부계천신(父系天神)으로 등장하더니, 무속에서는 무조(巫祖)의 성격까지 부여하기 시작했다. 후대로 오면서 하나이던 제석신이 셋으로 분화되기에 이르는데, 무속신화인 ‘제석본풀이’에서 당금애기와 천신 사이에 태어난 세 아들이 곧 삼불제석(三佛帝釋)이 된 것이다. 

따라서 제석신이 출생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높은 위상과 함께, 민간에서는 ‘三佛’을 ‘三神’이라 즐겨 불렀고 ‘産神’을 ‘三神’으로 여겼기 때문이라 보인다. 삼신할미를 부르는 다른 말도 ‘지앙님ㆍ삼신제왕ㆍ세준할머니ㆍ불도할망’처럼 불교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지앙’은 제왕의 방언으로 제석을 뜻하며, ‘세준’은 세존의 방언으로 세존과 제석이 다르지 않다. 

무당을 청해 아기를 위한 굿을 할 때도 주로 제석을 모시는 제왕맞이나 세존굿을 하게 된다. 제왕맞이에서 무당이 늘어놓는 사설을 보면, 태중 열 달 동안 천지신명과 칠성ㆍ삼신제왕ㆍ제석 등이 월별로 아기 돌보기를 비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삼신제왕과 제석은 하나의 존재이자 같은 역할을 지녔지만, 민간에서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많은 신격이 등장할수록 좋을 뿐, 직능을 구별할 필요는 아예 없는 것이다.

기도처에 모신 삼불제석 상을 비롯해 무속화(巫俗畵)에 표현된 제석은 장삼에 고깔을 쓴 스님의 모습이 많다. 이와 관련해 〈제석본풀이〉에 나오는 ‘중타령’을 보면 “우리 중상이 내리실 때 귀한 애기를 기르실 적에/ 짜른 명을 길게 잇고 기나긴 명을 허리 삼아/ 무쇠목숨에 돌끈 달고 동방삭에 명을 주며…”라는 내용이 있다. ‘중’의 높임말로 쓴 ‘중상’ 또한 제석을 뜻한다. 제석이 아기를 내릴 때 짧은 명을 길게 이어주고, 무쇠같이 질긴 목숨에 돌끈까지 달았으니 질긴 수명을 누리게 될 터이다. 

삼신은 대개 안방에 모시는데, 중부지역에서는 주머니에 쌀을 넣고 한지로 고깔을 씌워 ‘제석 주머니’라 부르며 매달아둔다. 출산 때 그 앞에서 아기와 산모의 무사함을 비는 것은 물론, 명절ㆍ생일ㆍ제사 때도 음식을 차려놓고 축원을 한다. 전남 강진에서도 주머니에 쌀을 넣어 걸어놓고 세존으로 모시는데, ‘세존 공들이기’라 하여 일곱 포기의 벼 알갱이를 훑어 세존 주머니에 갈아 넣고, 묵은 것은 탁발승에게 건네주면 좋다는 풍습이 있다.

아파트로 바뀌면서 집안 곳곳을 지키던 가신(家神)이 사라지고, 병원과 산후조리원에서 출산 문제를 전담하면서 삼신의 의미도 퇴색된 지 오래다. 그러나 삼신할미가 곧 제석이자 세존이었던 우리에게 삼신할미는 자비로운 불보살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법하다. 

▶한줄 요약
불교적으로 보는 ‘생명의 탄생’이란, 내세의 모습을 좌우할 현세의 씨앗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삶의 출발선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생전의 업으로 부모 인연을 만난 한 생명이, 장차 새로운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또 다른 업보를 지어갈 주체적 미래가 열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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