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
공산주의 행적 이유…이념론 대두
劍 같은 이데올로기, 두 얼굴 지녀
정치적 수사 매몰시 이념 노예 전락

韓정치 지성 취약성 극명히 보여줘
연기론, 중도 철학이 필요한 시대
‘연기적 시민의식’ 함양, 불교 책무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에 관한 논쟁을 보면서 처연한 기분이 가슴에 저린다. 처연함은 아픔이 서린 슬픔이다. 홍범도 장군의 생애를 보면 ‘시대와 나라를 잘못 만나서 큰 고생하셨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린 시절부터 머슴 생활로 시작해 의병과 독립운동으로 ‘고려 독립’의 서원을 세우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강제로 이주당한 동토의 땅 ‘카자흐스탄’에서 정미소 노동자로 1943년 사망했다. 한때 금강산 신계사로 피신하여 승려 생활을 하기도 했다. 홍범도 장군은 2021년 8월 유해로 조국 땅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고 한다. 그 이전의 원인은 홍범도 장군의 과거 독립운동 시절 공산주의 행적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육사 교육의 정체성 혼란을 막기 위해 흉상 이전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념의 문제가 흉상 이전의 원인이다. 

이념(이데올로기)은 어떤 집단에 의해 사실이나 진리로서 받아들여진 ‘통합된 정치적 신념 체계’로 정의할 수 있다. 정치적 집단행위의 밑바탕에는 항상 이념이 작용한다. 그런데 이념은 ‘칼’과 같다. 강도의 손에 쥐어지면 무서운 흉기로 변하고, 주부의 손에 쥐어지면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이념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통치자는 이념의 유혹에 빠질 위험성이 크다. 이념은 현란한 정치적 수사와 각종 신화의 옷을 입혀 대중을 설득하고 최면에 빠지게 만든다. 이리하여 많은 사람이 이념의 노예가 된다. 이로 인한 비극은 세계 정치사에 수없이 많다. 

한국사회의 이념 논의는 일종의 사회병리학적이라 할 만큼 우리의 사고 지평을 위축시켜 왔다. 이러한 원인은 세계 냉전 구조에 한반도가 편입되면서, 이념으로 남북이 분단되고, 이념으로 6.25전쟁이라는 참혹한 동족 간의 전쟁을 치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분단이라는 역사적 상황은 흑백논리와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정치 행위 판단의 기준과 척도로 삼게 했다. 한국 사회의 이념적 논쟁은 아직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낡은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미로를 헤매고 있다. 이를 어쩌랴.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이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기본이념이 된 ‘삼균주의(三均主義)’는 서구 이념으로 인한 분단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념은 결코 ‘무상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장소와 시절 등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일본과 대척점에 있었고 한국 독립을 지원한 레닌 공산당은 당시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일 것이다. 

정치적 이념은 수많은 변수와 역동성을 가진 지니고 있어 하나의 용어로 대변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아직도 용어의 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의 논쟁은 결국 이념의 함정에 빠진 한국 정치 지성의 취약성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 논란을 보면서, 붓다의 연기론과 중도의 가치가 새롭게 다가온다. 현대사회의 정치 이념들은 서구 정치사회의 투쟁의 산물이다. 이러한 투쟁의 산물인 이념들을 붓다 지혜의 틀에서 융해시켜야 할 것이다. 삶의 존엄성을 구현할 수 있는 이념적 좌표는 바로 연기론에 바탕을 둔 ‘중도의 철학’이다. 

중도는 어느 한 편에 기울지 않고 양자를 포용하며 한 단계 올라설 때 가능하다. 중도는 다양한 요소를 조화로운 전체에 융합함으로써 모든 요소의 긍정적 기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념을 민주적인 정의 공동체를 구현하는 방편으로 쓰기 위해서 공동체 구성원의 ‘연기적 시민의식’을 함양시키는 것이리라. 한국불교의 책무가 산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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