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벗어나야 진정한 수행

공덕 인정받고 싶은 양무제
“절 많이 짓고 경전 유포해”
달마대사 “아무 공덕 없다”
상(相) 내지 않는 게 수행자

이제 8월이 지나면서 제주국제명상센터에서 할 일은 다 하게 됐다. 어느 날 문득 뒤 돌아보고 나는 지난 세월 이런 일을 했어라고 나를 떠올리면 어떤 마음일까? 이 말은 금강경에 나오는 나를 비우는 아공(我空)’과 배치되는 말이다.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나.

나는 제주에 와서 지난 35년간 많은 일을 했다. 그 중에서도 제주국제명상센터를 설립하고 상담과 명상분야를 활성화한 일은 제주사회에서 특별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상()을 갖게 되면서 와 다른 사람간의 경계를 짓게 된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에 왔을 때, 독실한 불자였던 양나라의 무제(武帝)는 달마대사를 초빙하였다. 양무제는 달마대사에게 내가 즉위한 이래 무수히 많은 절을 짓고 여러 경전을 만들어 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출가를 권유하고, 승려와 사찰에 공양하였습니다.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달마대사는 공덕이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달마대사는 양무제의 덕행이 내가 무엇을 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하는 일이므로 깨달음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공덕이 없다고 한 것이다. 같은 의미로 내가 제주에서 행한 상담과 명상 활동들은 비록 복을 지었을지언정, 깨달음을 이루는 공덕에는 어떠한 영향이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의 활동을 달마대사에게 말한다면 영락없이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주를 떠나면서 제주국제명상센터에서 행한 일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마음과 함께 제주를 바라보는 마음도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지난날 내가 한 일에 대해 무엇인가를 했다는 생각이 붙어있으면 지난날에 대해 섭섭해 하고 원망하게 된다. 진실로 제주에서의 한 일이 자랑스럽게 느껴지려면 무엇을 했다는 생각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섭섭하고 원망스럽다는 생각이 붙어있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제주를 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공덕은 무엇을 했다는 마음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제 겨우 수행의 맛을 본 내가 깨달은 분들의 말씀을 인용하기가 부끄럽지만 수행의 지침으로 삼고자 다음 일화를 제시한다.

당나라 승려인 무착 선사가 견성을 위해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남쪽 항주에서 북쪽 오대산까지 오체투지로 절을 하면서 갔다. 마침내 오대산 금강굴부근에 이르러 잠깐 바위에 앉아 쉬고 있는데,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오다가 말을 걸었다.

자네는 어떤 사람인데 무엇을 하러 이 깊은 산중에 왔는가?”

,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왔습니다.”

자네 밥 먹었는가?”

안 먹었습니다.”

순 생짜로군.”

노인은 그리고는 소를 타고 가버렸다. 무착 선사는 노인이 범상하지 않음을 느껴 뒤를 따랐고, 얼마쯤 가다 절에 다다랐다. 잠시 뒤 시자가 보석으로 된 황금 다완을 들고 나왔다. 차를 마시는데 노인이 물었다.

자네 어디서 왔는가?”

남방에서 왔습니다.”

남방에도 이런 물건이 있는가?”

없습니다.”

이런 물건이 없다면 무엇으로 차를 마시는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날이 저물어갔고, 무착 선사는 평온함을 느껴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했다. 노인은 거절하면서 단호하게 말하였다.

()이 있는 사람은 여기서 잘 수 없네.”

저는 출가 사문이기 때문에 상이 없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웃으며 물었다.

스님은 출가한지 몇 년 되었는고?”

“17년 되었습니다.”

자네, ()를 잘 지키는가?”

, 출가한 이래로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잠시 뒤 다시 말했다.

그런 마음이 바로 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네는 여기서 잘 수가 없네.”

노인은 시자를 시켜 무착 선사를 배웅하게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위없는 진리를 얻었다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설한바 법이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으셨다. ‘진리를 얻었다거나 설한 법이 있다는 자체가 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인의 가르침을 받은 스님은 오대산에서 돌아온 후 정진하여 대도를 성취하였다.

()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할 뿐이다. 아무리 잘 갖춘 몸으로 태어나도 죽기 마련이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지기 마련이다. 모였다가 흩어지고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모든 상의 본질인 것이다. 정녕 나의 보시가 성()의 자리로 통하려면 집착이 없는 무주상(無住相)의 보시라야 한다.

무주상의 보시가 되면 성의 자리로 통할 수 있지만 물질의 보시는 물질적인 복덕으로 끝날 뿐 성()의 자리, ()의 세계,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미혹 속에서 고난과 함께하며 살아가는 우리 중생에게 진실로 중요한 것은 변함없는 성의 자리, 언제나 깨어있는 법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봄바람은 저 나무의 꽃을 붉게 만들어야 되겠다. 노랗게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없다. 그냥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나무들에게 따스한 바람을 안겨준다. 그러나 봄이 되어 바람이 불면 벚나무에는 벚꽃이, 살구나무에는 살구꽃이 피어나며, 진달래도 개나리도 꽃을 피운다.

그런데 봄바람은 그냥 따뜻한 바람만을 아낌없이 줄 뿐이다. 벚꽃은 예쁘니까 바람을 많이 주고, 개나리는 미우니까 바람을 적게 주지 않는다. 그냥 차별 없이 바람을 줄 뿐이다. 이처럼 내가 봄바람처럼 아무런 상을 갖지 않는다면 어디를 가든 새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상에 빠져 다른 사람들을 경시하는 인상을 일으키고, 잘잘못을 시비하는 중생상이나 대접을 받고자 하는 수자상을 갖는다면 나는 결코 수행자가 될 수 없다. 단지 범부일 뿐이다. 이처럼 봄바람은 집착이 없다. 봄바람이 지나고 나면 붉은 꽃도 피고 노란 꽃도 피고 푸른 잎도 돋아난다.

그러니 내가 제주국제명상센터를 설립하고 각종 프로그램을 실시했다는 생각은 나를 머무르는바 없이(應無所住), 집착이 없는 마음(無所住心)으로 살아야 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위배하는 셈이 된다. 명상센터를 설립하여 제주를 밝은 사회로 변화시켰다는 마음으로 살아왔다면 단단한 상을 지니고 살아온 셈이다.

부처님께서는 평소에도 베푼다는 생각 없이 복을 지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 깨닫지 못한 필자가 복을 짓지 않는다면 어찌 깨달음에 이르겠는가.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아나율 존자가 있었다. 그는 수행을 게을리 하여 자주 꾸지람을 듣게 되었는데, 이후 크게 뉘우치고 용맹심을 발하여 정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장님이 되었다. 그러나 육체의 눈은 잃었지만 마음의 눈인 천안(天眼)을 얻게 되었다. 그래도 몹시 불편하였다. 어느 날 찢어진 옷을 깁기 위해 더듬거리며 바늘과 실을 찾았다. 이때 부처님이 우연히 그곳을 지나시다가 아나율 존자를 보고 바늘과 실을 받아 쥐었다.

내가 끼워주마.”

아나율 존자는 그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고 몸 둘 바를 몰랐다.

! 부처님께서 어찌 이러한 일까지 하시옵니까?”

그러자 부처님이 말했다.

나도 끝없이 복을 닦아야 하느니라. 너희들만 복을 닦고 향상해야 되겠느냐. 나도 끝없이 복을 닦아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제자의 바늘귀를 꿰어주신 것은 당신이 어떤 복을 짓겠다든가, 복을 받겠다든가 하는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다. 결코 줄어들거나 새어나감이 없는 무루복(無漏福)을 닦으신 부처님께서는, 복이 다하면 다시 불행해지는 유루복(有漏福)에 대해 어떠한 집착도 없으셨다. 어떠한 중생을 위해 어떻게 베푼다는 생각 없이 단지 베풀어주셨다. 마치 추운 날 따뜻한 햇볕을 보내주는 태양처럼 베풀어주시는 것이다.(우룡 스님, 2008)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짓는 밥은 양약이 되지만, 불평불만을 가득 품고 만드는 음식은 생명에 독이 된다. 흔히 의 불평불만이 의 혀끝을 통해 세상에 전달되고 노출되면 그 결과는 비참해진다. 이를테면 간밤에 부부가 싸운 뒤 잠을 잤을 경우, 아침에 일어난 아내가 화가 나있는 상태에서 밥을 짓고 나물을 무친다고 생각해보자. 쌀과 나물에는 아내의 손끝으로 전달되는 화라는 에너지가 흡수되어 밥이 되고 나물이 되어 밥상에 놓인다. 그 음식을 먹은 남편은 화를 먹게 되어 그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된다.

지금 사회나 국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상()을 짓느라 분주하다. 앞으로 나는 제주국제명상센터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 안동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어떠한 복도 짓는다는 생각 없이 복을 지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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