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평론’ 게재된 L신부의 에세이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스님에게
‘반야심경’ 봉독해준 이야기를 담아
“도반 함께 한 추억으로 남아” 감동

근자 타인의 종교 무시 사례들 많아
평생 품어온 스님의 종교 존중하고자
‘반야심경’ 읽어준 신부는 좋은 선례
진정한 종교인 자세가 무언지 성찰을

불자라면, 누구나 아는 〈불교평론〉이라는 책자가 있다. 학술지와 일반 잡지 중간 정도인데, 불교학에 비중을 두고 있어 내용에 무게감이 있다. 계간지인 이 책은 중간 즈음 수십 페이지를 각계각층의 에세이를 담아내고 있다. 올해 여름에 발행된 〈불교평론〉에 의미 깊은 내용이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L신부가 쓴 ‘내가 만난 반야심경’이다.    

“2021년, 코로나가 심각하던 무렵이다. 내(L신부)가 머물고 있는 호스피스 병동에 한 노스님이 들어왔다. 스님은 암으로 투병하며 요양병원에 계셨던 분인데, 임종 시기가 되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 온 것이다. (환자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병동을 다니는 중에 간호 수녀님이 ‘저 병실에 스님이 들어오셨다’고 귀뜸을 해주었다. 내가 그 병동으로 들어가니, 스님께서는 의식이 없이 호흡기를 착용하고 누워 계셨다. 
죽음을 준비하는 병약한 노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보호자도 없이 생의 마지막을 호흡기에 의지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스님께 내가 해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학생 때, 반쯤 외웠던 〈반야심경〉이 기억났다. 스님께 해줄 수 있는 것은 〈반야심경〉을 읽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 ’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그였지만, 평온한 침묵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가 수행자답게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며칠 동안 매일 방문해 의식도 없는 스님께 〈반야심경〉을 읽어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병동에 들어가니, 스님이 안 계셨다. 지난밤에 돌아가셔서 보호자가 모시고 갔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몇 차례 스님께 〈반야심경〉을 읽어드려야 했는데…’ 후회스러웠다. 나는 스님의 법명도 모르고 어찌해서 이 병동에 오셨는지 모르지만, 스님께서 수행자로서의 모습만이 각인되어 있다. 스님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도반과 함께 했던 것과 같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1인칭(L신부)으로 원고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동안 만감이 교차했다. 어쩌다 죽음을 앞둔 스님께서 천주교 암병동에 머물렀고, 이어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가야했는지…. 그 스님의 입적이 미래 곧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스님이 입적하신 뒤에 모시고 간 그 보호자가 누군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솔직히 눈치 채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평생을 살아온 절집인데, 상좌나 문중의 권속들이 모시고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승려는 병원에서의 죽음이 ‘평생을 수행자’로서가 아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법적 제재를 받는다. 곧 승려의 속가 가족이나 일가친척이 보증하지 않으면, 승려들은 죽어서도 장례 치르는 일이 쉽지 않다. 솔직히 필자는 출가한지 강산이 4번이나 변했고, 형제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는데 죽어서야 연락할 상황이다. 
 

필자는 감성팔이하려고 이 글을 작성하는 것만은 아니다. 근자에 자기 종교에 빠져 타인의 종교를 무시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인간의 심각한 오류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마음이 무거운데도 L신부의 갸륵함이 따스하게 다가왔다. 병동의 환자가 스님이어서 신부가 ‘환자의 평생 품어온 인생관과 가치관을 존중’코자 〈반야심경〉을 읽어주었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똑같은 상황이라면, L신부처럼 할 수 있을까? 아마 필자는 ‘이번 기회에 부처님 제자되어 극락 가십시오’라며, 환자에게 실컷 법문할지도 모르는 소인배다. 

하여튼 L신부에게 좋은 것을 배웠다. 그의 모습이 어찌보면 진정한 종교인의 표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신부님!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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