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구제 의미를 되새기다 

1925년 대홍수로 물에 잠긴 강남
배 띠워 700여 명 살린 청호 스님
살아난 사람들 봉은사 공덕비 세워
설화 ‘노아의 방주’ 2014년 영화화
쿤데라, “노아 설화, 저속함의 원천”
부처님의 구제, 산자 망자 모두 해당

강남 봉은사 일주문 옆의 청호 스님 공덕비. 스님은 1925년 대홍수 당시 배를 띠워 7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을 살렸다. 사진제공=봉은사
강남 봉은사 일주문 옆의 청호 스님 공덕비. 스님은 1925년 대홍수 당시 배를 띠워 7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을 살렸다. 사진제공=봉은사

지금은 ‘서울’하면 강남이 노른자라고들 여기지만 한양 도성 사대문 안만 서울이던 시절, 강남은 뽕나무밭이었다. ‘상전벽해’란 말은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는 고사성어다. 고사성어라고 하면 널리 알려진 옛 이야기에 나오는 표현이 아예 특정한 상황을 이르는 관용어로 굳어지게 된 것이니, 상전벽해란 말에도 얽힌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의 신선 이야기를 모은 ‘신선전’에 실린 ‘마고선녀이야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리 전래 문화에서 단군 이전부터 창조신, 거인신으로 받들어지는 마고신, 마고할미는 큰 산이 있는 곳에는 전국 여기저기 돌을 옮기고, 성을 쌓고, 사람을 돕는 존재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중국에서는 도교의 선녀로 여겨지는 마고가 신선인 왕방평에게 “제가 신선님을 모신 세월 동안 어느 새 뽕나무 밭이 세 번이나 푸른 바다로 변하였습니다. 이번에 봉래에 갔더니 바다가 다시 얕아져 이전의 반 정도로 줄어 있었습니다. 또 육지가 되려는 것일까요”라고 물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상전벽해라는 말은 이제는 ‘세상이 몰라볼 정도로 바뀌었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지금 봉은사가 있는 강남 일대도 다 뽕나무밭이었다. 그리고 뽕나무밭이 지금은 백화점이며 호텔, 고급 주택들이 들어서고 서울에서도 부자들 살고 학군 좋은 동네가 된 것은 푸른 바다가 된 것 못지않게 엄청난 변화일 것이다. 

서기 794년, 남북국시대 신라 원성왕 시절에 연회국사가 처음 창건한 견성사가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종의 능인 선릉을 지키는 ‘능침사찰’이 되면서 절 이름이 왕의 은혜를 받든다는 뜻인 봉은(奉恩)으로 바뀌게 되었다. 봉은사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유명한 고승들이 많이 난 절이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임진왜란에서 승병을 일으킨 서산 휴정 대사나 사명 유정 대사는 어지러운 전란 속에서 대중을 이끈 위인전에도 이름이 올라있다.

어지러운 것은 전란만이 아니다. 자연재해는 또 얼마나 무시무시한 위협인가? 특히 강과 가까운 곳은 큰비가 내리면 홍수로 물난리를 겪곤 했다. 온갖 기상예측장비, 홍수를 통제할 수 있다는 크고 작은 댐들, 인공위성과 CCTV로 바로바로 확인되는 위험지역 정보들, 중앙정부부터 지방자치단체까지 스마트폰으로 알리는 실시간 위험 경보 같은 온갖 시스템이 무색하게 홍수로 올해도 많은 목숨들이 희생되었다.

하늘의 일을 사람이 어쩔 수 없다지만, 전 지구적 기후위기는 사람이 지은 업보로 돌아오는 천벌이라고 할 수 있다. 공무원들이 신고를 받고도 무시하지 않고 미리 도로를 통제했더라면, 정치인들이 안전사회를 위한 기반 시설과 제도로 철저히 대비했더라면, 세계가 기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환경파괴적 기술 개발보다 환경친화적 생태주의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했더라면 잃지 않을 수도 있었을 희생이다.

봉은사에는 ‘나청호 대선사 수해구제 공덕비’가 있다. 죽음을 무릅쓴 보살행으로 살아있는 부처로 칭송받은 청호스님 공덕비는 큰 홍수 앞에서 사람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다시금 헤아리게 한다. 그 공과 덕이 얼마나 컸기에 살아있는 부처로 칭송받고 일컬어지고 공덕비가 세워지기까지 했을까? 

일제 강점기였던 1925년 을축년에 큰 홍수가 있었다. 7월 6일 시작해서 7월20일까지 보름 남짓 전국적으로 쏟아진 비로 낙동강, 금강, 만경강, 한강 할 것 없이 다 범람하면서 전국적으로 1만여 채의 가옥이 침수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곳이 한강 일대, 특히 뚝섬 일대의 저지대였다. 용산제방이 무너지면서 오늘날 송파구와 강남구 일대의 마을들이 완전히 물에 잠겨 뚝섬 상부에 있는 신천리 잠실리 두 동리에 살던 1000호 가구 주민 4000명이 전부 물속에 빠져서 절명 상태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당시 그 지역은 무인고도처럼 고립되어 배도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구조할 도리가 전연 없이 살려 달라는 울음과 비명만 들리더라고 신문에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급류를 피해 잠실 큰 느티나무 두 그루에 무려 708명이 올라가 구조해달라고 울부짖고 있었으나 총독부도 관료들도 속수무책으로 상황만 지켜보고 있었을 때 구제에 나선 사람이 바로 봉은사 주지 청호 스님이었다.

주지를 맡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당한 재난 앞에서 청호 스님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거센 물살 앞에 배 띄우기를 주저하는 뱃사공들에게 인명을 구하면 포상까지 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직접 배를 타고 나가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 막 물에 잠기려는 지붕에 올라가 있는 사람, 나무에 매달린 사람 등을 하나하나 구해 봉은사로 옮겨왔다. 지붕과 느티나무 위로 올라간 사람들을 모두 배로 실어 날랐을 때는 사람들이 올라가 있던 느티나무 두 그루 중 하나가 뿌리째 뽑혀 쓰러지더니 곧바로 급류에 휩쓸려갔다고 한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29년, 그렇게 목숨을 구하게 된 708명이 뜻을 모아 공덕비를 세운 것이다.

이렇듯 뽕나무밭이 바다가 될 정도의 대홍수에 대한 기록은 세계 여러 문화에 신화나 전승의 형태로 남아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홍수 이야기는 아마도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일 것이다. 청호 스님이 사람을 구했다면, 노아는 뭇생명을 구했다. 왜냐하면 대홍수는 세상이 속속들이 썩어들어 무법천지가 되도록 망친 사람들을 땅에서 다 쓸어버리려는 신의 뜻이었기에.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노아〉(2014)는 무법천지 세상을 만든 것이 인간이고, 세상을 그렇게 만든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처벌이 대홍수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뭇 생명을 살리는 것만큼이나 인간 자신을 제대로 대대손손 잘 살리는 것이 그 처벌의 교훈이라고 훈계하는 영화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 교훈이 똥과도 같다고 했다. 〈노아〉에서 착란처럼, 환각처럼, 강박처럼, 몇 번이고 돌이켜 일깨우는 세상은 에덴동산이다. 창세기 첫 장에서 세상은 마땅히 딱 그렇게 존재해야만 하는 것처럼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하며 그 때문에 올바르다는 것, 인간은 번식한다는 것이 참이며, 이에 대한 믿음이 신앙이다. 그것이 바로 존재에 대한 정언적 동의라고 할 때, 존재에 대한 정언적 동의의 미학은 키치, 그러니까 저속함이 된다는 것이다.

키치의 원천은 존재에 대한 절대적 동의라고 밀란 쿤데라는 단언한다. 그런데 키치는 인간 존재에서 본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것을 시야에서 제외시키려하고, 그래서 똥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며, 마침내 인간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것, 그것이 노아가 받아들인 창조주의 지침, 계시다.

한국에는 〈프라하의 봄〉(1988, 필립 카우프만 감독)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됐던 영화의 원작인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마지막 장의 소제목은 ‘카레닌의 미소’다. 카레닌은 전쟁과 독재, 저항, 사랑과 죽음이 엇갈리는 시대를 살았던 테레사, 토마스, 사비나, 프란츠, 네 명의 사람 주인공이 아니라 그들이 살던 시대에 나고 죽은 개의 이름이다.

밀란 쿤데라는 여기서 신이 인간에게 다른 생명체에 대한 지배권을 실제로 맡겼다는 확실성은 없건만, 인간이 이 권리를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신을 생각해냈다는 것이 훨씬 있을 법하며, 사슴이나 소를 죽이는 권리야말로 전인류가 이구동성으로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권리라고 한다. 데카르트에 이르러 인간은 소유주이자 주인이며, 짐승은 한낱 생기있는 기계에 불과하기에 인간이 짐승의 울음을 이해해야 할 필요도 없고, 실험실에서 산 채로 해부되는 개를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절대적 지배권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러면서 소련이 체코를 침공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이런 확신이 어떻게 인간을, 국가를,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지를 경고한다. 체코에 러시아가 침입하던 처음 몇 년 동안 사람들을 조종하고 훈련시키기 위해 먼저 짐승들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당시 신문들은 도시에서 비둘기를 제거하자는 캠페인을 펼쳤고, 실제로 비둘기들을 없앴으며, 그다음에는 개들을 겨냥했다고 한다. 러시아군의 침공 앞에서 완전히 절망한 사람들에게 신문들은 공원과 보도에 똥을 싸는 개, 아이들 건강을 위험하게 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개 이야기만 늘어놓았고, 이런 보도 때문에 대중들이 속에 켜켜이 분노를 쌓아놓았을 때, 마침내 사람들을 해직시키고, 잡아들이고, 재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영화 〈노아〉에서 방주와 그 방주에 깃든 짐승들은 사람들을 징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해 구원의 대상으로 선택받았다가 인간이 살기 위한 희생제물의 역할을 떠맡게 된다. 성서의 문헌적 고증이나 기독교적 교리를 따지기 전에 인간이 살아야할 이유를 찾아주려는 영화 〈노아〉는 이번에는 인간이 선할 수도 있을 지를 기대한다.

이번 홍수에서 희생되신 분들과 뭇생명들, 그리고 얼마 전 고인이 된 밀란 쿤데라를 애도하며 큰 재난 앞에서 청호 스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가장 위대하고 안전하고 장구하다고 생각하는 천지 세계에도 기근, 질병, 도병(刀兵)의 작은 삼재와 물, 불, 바람의 큰 삼재를 지니고 있다고 했으니, 작은 삼재로는 그 세계에 의지해 머무르는 유정(有情) 밖에 고통을 주지 못하지만 큰 삼재로는 세계 그 자체까지를 괴멸시키는 것이라. 부처님의 구제는 오직 죽은 자에 한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들도 부처님의 구제를 받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니 그러면 오늘 우리들은 죽은 자를 위해 구제를 구하는 동시에 우리들 스스로도 구제하려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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