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말과 뜻이 하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가 바로 전달하고자 하는 뜻이지, 다른 의도를 숨겨두는 말의 뜻은 없다. 비밀리에 특정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어떤 가르침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그 가르침 그대로 새김하면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헤매지 않고 바로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진실한 숨은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찾다가 어떤 특정한 언어를 배워야만 하는 것처럼 느낀다. 오래전에는 우리말로 된 경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라 언어를 배웠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부처님의 원음을 한글로 쉽게 번역한 〈니까야〉가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은 아주 평범하여 누구나 소통할 수 있는 언어면 충분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당시에 가장 낮은 계급을 가진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팔리어(Pali)를 사용하여 가르침을 펼쳤다. 누구나 듣기만 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니 숨은 뜻이 있을 수가 없다. 있는 그대로 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여러 뜻으로 가르침을 전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려고 한다.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가르침을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리둥절하여 지나쳐 버린다. 그리고 엉뚱한 것을 찾아다닌다. 그러면서 가르침을 어렵다고 말한다. 가르침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어려운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금 내가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만 말씀하실 뿐, 과거에 일어난 일이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나’에 대해 말씀하신다. ‘물질은 내가 아니다. 느낌, 지각, 의도, 의식은 내가 아니다.’ 이 말씀을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지금 자신이 듣고 있는 그대로다. 이 말씀에 얼마나 빠르게 틈 없이 접근하느냐의 문제이지, 이해하거나 못하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여기에 온 힘을 다해 집중한다면 의식이 가지고 있는 ‘나’라는 모양의 이미지는 끊어지게 된다. 그러면 공간이라는 개념도 사라진다. 그때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때 아는 ‘나’라는 것은 어떤 기억된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다. 부처님은 이때의 이름을 불생불멸이라고 하셨다. 이 이름은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이며 방편은 등대와 같다.

“여래는 비록 불생불멸, 자성열반, 삼승, 일승, 심, 자성 등을 말하지만 사람들이 그 언설과 이름 그리고 어의에만 매달려 그 구경의 뜻을 마음속으로 증득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법을 비방하는 지견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네. 이는 여래가 세운 언어의 본뜻과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또 다른 하나의 망상일 따름이네.”

배가 등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가면 배를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있으니 등대를 의지하여 가는 것이다. 배가 항구에 정박하면 등대는 무의미해진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마음으로 증득하는 순간부터 언어는 그에게 아무 뜻이 없어진다. 이름은 언어로서의 기능이지 그것이 지시하고 만들고 규정하는 특정한 모양이 생겨날 수 없다. 이름이 없으면 그것을 전할 방법이 희박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일한 가르침인 침묵만 할 수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참다운 가르침의 묘용을 그들은 알 수 없으므로 등대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사용함에 부작용은 있겠지만, 부작용 때문에 등대를 버리지 못함이니 등대를 그것으로 오인하면 안 된다. 자칫하면 등대를 그것으로 잘못 알아서 언어로 그것을 말하면서 무엇이 잘못인지를 모르고 놓친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들이 방편의 말과 모양에서 만족하는 모습을 보고 도취되기 때문이다. 생겨난 재난은 재난이라 말하지 않고 온다. 거친 재난은 고통이지만 미세한 재난은 달콤하다. 그들이 웃고 박장대소하는 순간 모든 것이 죽어간다. 다만 그 죽어가는 것을 모른다. 죽어있는 것과 살아있는 것이 전도되었다. ‘당신은 살아 있습니까?’ 여기에서 바른 답을 얻어야 한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