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인들 평생 소원, 갠지즈강서 火葬
부자, 빈자 모두 죽을 땐 같아 보이나
존엄한 죽음은 자본의 유무로 나뉘어
계급 낮은 빈자는 강가에도 못 간다 

한국 역시 빈곤 고독사 사회문제 대두
가난과 질병 인한 가족 동반자살 발생
내 안락은 누군가의 노동으로 얻는 것
안타까운 죽음에 겸손을, 자비를 품자

인도인들은 평생 소원이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에 들어가 목욕하고, 강물을 마시는 일이다. 또 하나는 죽음에 임박해 갠지스강변에서 죽어 그곳 화장터에서 화장된 뒤에 재가 갠지스강에 뿌려지는 것을 소원한다. 이렇게 하면, 모든 죄업이 씻기어 다시는 고통의 사바세계에 오지 않는다고 여긴다. 인도인들에게 갠지스강은 ‘어머니의 강(Ganga mata ji)’이라고 하여 갠지스강 자체를 신격화하고 있다. 인도인들의 영혼이 숨 쉬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도 법을 설하면서 다수(多數)를 표현할 때, ‘갠지스강 모래’에 비유하셨다.  

10년 전, 갠지스강가에서 수많은 시체들이 갠지스강변으로 들어와 화장하는 것을 보았다. 생사(生死)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무엇이 소중한 것이고, 인생의 가치 개념을 사유했었다. 그런데 며칠 전 한 방송에서 인도의 갠지스강변의 화장터를 보여주었는데, 방송의 패널(panel)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  

“결국에는 부자였던 사람이든, 가난했던 사람이든 갈 때는 다 똑같다.”

인간이 생전에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죽음 앞에서는 공평하다는 것인데, 필자는 그 말에 공감되지 않는다. 부처님도 생로병사의 고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했듯 인간의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똑같다. 그런데 물리적인 인생 4고는 누구에게나 똑같을지 모르지만, 존엄한 죽음은 공평하지 않다는 점이다. 

최대인구를 자랑하며, IT업계 인재를 배출하는 인도! 그러나 카스트(caste)계급으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아웃카스트(out-caste)의 인권 문제는 세계에서 최하위다. 이들 중 대다수는 가난과 불평등으로 인간답지 못하게 살다가 죽는다. 이들은 죽을 때가 되어 갠지스강까지 와서 화장할 만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다. 유가족이 돈이 부족해 시체를 완전하게 화장할 만큼 나무를 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은 법적으로 안 된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계급이 낮은 이들이나 가난한 이들은 갠지스강에 와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인도인들의 사고로, 어머니의 강에 와보지 못하고 죽었으니 끝없는 번뇌 속에서 윤회한다. 

인류 역사에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평등이 이뤄진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다. ‘모두가 공평히 부를 누리자’던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도 빈부격차가 심각하다. 우리나라 역시 갠지스강가의 죽음과 같은 불평등이 자리 잡고 있다. 근자 젊은 청년이 고시원에서 고독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수일이 지나서 발견되고, 그가 남긴 글귀에는 온통 취업에 대한 걱정이다. 노년 고독사는 더더욱 안타깝다. 기초생활수급자로 겨우 연명하다 죽음을 지켜주는 사람 없이 홀로 쓸쓸이 이생을 떠난다. 가장 슬픈 일은 가난과 질병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가족들이 동반 자살하는 경우이다. 

생로병사는 모든 중생에게 똑같지만, 경제적인 부에 따라 죽어서도 차별 받는다. 잘 죽는 죽음(well-dying),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죽음이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다. 필자 입장에서 볼 때, 개인을 탓할 수는 없다고 본다. 죽어가면서 얼마나 한을 품고 이생을 떠났겠는가? 그렇다고 사회 약자를 위한 시스템에 문제 있다고 오롯이 국가만 탓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따뜻한 밥에 따뜻한 잠자리가 주어졌다면, 그것은 어느 누군가의 차디찬 잠자리에 눈물 젖은 빵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면, 그 어느 누군가는 길바닥에서 동사하는 이들이 있다. 내가 경험하는 편리함과 안락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세상을 돌게 하는 노동력과 눈물이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죽음 앞에 겸손하자. 그리고 욕심내지 말고, 좀 나눠주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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