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수행, 이젠 ‘부처님 法’ 전해야 합니다”

노구에도 시봉 없이 모든 것 ‘혼자서’
“생활이 수행… 아낀 정재로는 기부”
원로의장 추대 後 “출가자 문제 동참”
“행자교육부터 시대에 맞게 변화돼야”
 
상월결사 인도순례 회향법회서 나온
‘부처님 법 전합시다’는 시대의 화두
불교 전승 위해선 전법포교가 최우선
“부루나 존자처럼 목숨 걸고 포교를”

​​​​​​​역임했던 모든 소임서 ‘화합’ 강조해
“화합하려면 타인의 입장 인정하라”
연기법 상기… 결국엔 ‘우리는 하나’
“서로 포용하며 따뜻하게 살아갑시다”

불영 자광 대종사는… 구례 화엄사에 입산해 경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해인사승가대학을 거쳐 동국대 종비생 1기로 졸업하고 1970년 군승 중위로 임관했다. 월남전에 참가하기도 한 대종사는 귀국 후 3군 선봉사와 육군사관학교 호국선원을 창건했다. 1981년 육해공군 군승단장을 역임했으며, 1987년 대령으로 진급, 3군 군종참모와 국방부 군종실장을 지냈다. 1995년 대령으로 예편하고 다시 종단으로 돌아가서 수행자가 됐다. 이후 조계종 제2대 군종특별교구장과 호계원장, 학교법인 동국대 이사장, 법계위원을 역임했다. 2019년 원로의원으로 선출됐고, 2023년 4월에는 원로의장으로 선출됐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불영 자광 대종사는… 구례 화엄사에 입산해 경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해인사승가대학을 거쳐 동국대 종비생 1기로 졸업하고 1970년 군승 중위로 임관했다. 월남전에 참가하기도 한 대종사는 귀국 후 3군 선봉사와 육군사관학교 호국선원을 창건했다. 1981년 육해공군 군승단장을 역임했으며, 1987년 대령으로 진급, 3군 군종참모와 국방부 군종실장을 지냈다. 1995년 대령으로 예편하고 다시 종단으로 돌아가서 수행자가 됐다. 이후 조계종 제2대 군종특별교구장과 호계원장, 학교법인 동국대 이사장, 법계위원을 역임했다. 2019년 원로의원으로 선출됐고, 2023년 4월에는 원로의장으로 선출됐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조계종 원로회의는 종정 추대, 총무원장 인준, 종헌 개정안 인준 등의 권한을 가진 종단 최고 의결 기구이다. 원로의장은 원로회의를 대표하고 업무를 통할하는 임무를 가진 자리다. 올해 4월 원로회의 새 의장에 불영 자광 대종사가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자광 대종사는 1세대 군승이자 군종특별교구장으로서 한국불교 군포교 역사에 새 장을 열었고, 호계원장·동국대 이사장 등 주요 소임을 역임한 조계종단의 어른이다. 불기2567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한국불교와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자광 대종사에게 들었다.  <편집자 주>

조계종 원로의장 불영 자광 대종사는 매일 아침 서울 충무로에 소재한 동국대 불교학술원으로 출근한다. 대종사는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소임을 맡아 한국불교학 진흥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현역이다. 학술원장실에서 만난 자광 대종사에게 근황을 여쭈니 “별 것 없어요. 내가 밥 해 먹고, 빨래하고, 도량 청소하고, 부처님께 기도합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제 대종사는 세수가 80세를 훨씬 넘었지만, 주석처에 시자도 공양주도 부전스님도 두고 있지 않다. 이유가 궁금했다. “시자나 공양주 둘 형편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이내 수행자의 자세를 강조했다. 

“스님은 편하고 호화롭게 살면 안 됩니다. 내가 혼자서 밥도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목탁치며 염불할 수 있는데 시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이런 일상생활도 수행입니다. 스님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야 돼요. 죽을 때까지 수행해야죠.”

자광 대종사가 공양주, 시자, 부전 등을 두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대학생·청년을 위한 장학금, 종단 주요 정책 불사 기금 등 다양한 곳에 기부를 하기 위해서다. 

“내가 목탁치고 기도하니까 공양주, 시자, 부전으로 나가는 월 보시금이 없어요. 그런 돈을 아끼고, 신도들이 보내주는 보시금을 모아서 어느 정도 모이면 전부 기부하고 있습니다.”

실제 자광 대종사는 지난 5월 11일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부처님을 바로 모시기 위한 ‘천년을 세우다’ 불사에 기금 1000만원을 전달했으며, 동국대에도 장학금을 쾌척하기도 했다. 

현 세대·시대 맞는 승가교육을
지금도 일선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만큼 자광 대종사는 원로의장으로 선출 직후 일성도 “종단 현안 해결에 적극 나서겠다”였다. 특히 “출가자 급감에 대한 문제 해결에 원로들도 힘을 보태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종단 원로들이 나서서 현안 해결에 직접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출가자 급감 문제는 종단의 존폐가 걸린,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로라고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 밥 먹고 살면서 놀면 안 되잖아요. 오랜 시간 수행하고 포교한 원로로서 지혜를 보태야지요.” 

그러면서 대종사는 그간 포교의 부재를 지적했다. “어떻게 보면 창피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출가자 급감 문제는 넓게 보면 저출산 문제와 연결됩니다. 인구가 줄어드니 출가자도 감소하는 것은 당연하죠. 그럼에도 출가 자원이 이 같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은 청년 포교를 등한시했던 한국불교의 고질적 문제도 원인이 있습니다. 청년 포교 부재의 결과가 지금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죠.”

자광 대종사는 출가 증대를 위한 방안으로 ‘시대에 맞는 행자교육’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젊은 세대가 춤을 좋아하면 춤을 추며 부처님을 찬탄하도록 하고, 랩을 좋아하면 <반야심경> 등 불경도 랩으로 독경하도록 하자”는 게 대종사의 주장이다. 그만큼 정형화된 교육이 아니라 차별없고 열려 있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젊은이들은 스님이 되는 것이 엄청난 각오나 결심이 필요하다고 아는 것 같아요. 넓게 보면 스님의 삶은 결혼만 하지 않을 뿐 일반인과 별 차이 없어요. 이제는 청년들에게 부처님의 계율 지키는 생활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삶임을 알게 해줘야 합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중단됐는데, 종단에서 염불대회를 열었습니다. 젊은 학인들이 랩으로 <반야심경>을 봉독하는 등 새로운 염불 방식을 보여줘 인기가 좋았습니다. 재가 청년과 청년 학인이 격의 없이 소통하는 수행풍토를 만들면, 출가자 증가에 조금은 도움 되지 않을까요?”

자광 대종사는 매일 아침 동국대 불교학술원으로 출근 후 부처님께 향과 복전(福錢)을 공양한다. 대종사는 “어디서든 해 온 오래된 습관”이라고 했다.
자광 대종사는 매일 아침 동국대 불교학술원으로 출근 후 부처님께 향과 복전(福錢)을 공양한다. 대종사는 “어디서든 해 온 오래된 습관”이라고 했다.

망하기 싫다면 포교해야 합니다
‘춤으로 랩으로 젊은 세대를 불교로 이끌자’는 격외의 제안은 자광 대종사 자신이 그렇게 중생을 전법포교하고 교화했기에 가능한 제안이다. 실제 자광 대종사는 스승인 경산 스님을 따라 조계사에서부터 어린이 포교를 했다. 

“우리 은사스님을 시봉하면서 ‘포교를 해야 불교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조계사에서 어린이 포교를 시작했어요. 은사스님을 시봉하면 과자나 사탕 같은 것들이 남을 때가 있습니다. 이를 모아서 어린이, 중고등학생 법회에 가져서 나눴죠. 어떻게 보면 운문 스님과 제가 어린이 법회를 처음 시작했죠.”

자광 대종사가 한국불교 포교사에 한 획을 그은 여러 업적은 ‘1세대 군승’으로 활동하며 이룬 것들이다. 종비생 1기로 동국대 인도철학과에 입학한 자광 대종사는 1970년 군승 중위로 임관했다. 군포교 일선에 뛰어든 것은 장병들을 포교하라는 스승의 명을 받든 것이다. 이로 인해 대종사는 졸지에 ‘군대를 두 번 간 남자’가 됐다. 

“대학을 마치고 선방에 들어가려는데, 군승으로 갈 스님이 부족하다며 입대를 요청받았습니다. 사병으로 군대를 갔다 왔는데 또 군대를 가라니 난감했어요. 그래도 나라를 이끌 젊은 장병들을 불교로 이끈다는 생각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복무했습니다. 중생교화가 스님의 근본 사명이잖아요.”

1970년 임관한 자광 대종사는 1995년 국방부 군종실장(대령)을 끝으로 전역하기까지 25년 동안 군포교에 매진했다. 군승으로서 대종사가 남긴 성과는 대단하다. 군종실장 시절 장병들의 종교 현황에 맞춰, 기존 불균형했던 군승과 군목의 비율을 조정했다. 이를 통해 군승법사 정원을 100여명으로 확대했다. 장병 상대로 법회·설법을 4600회했으며, 이를 통해 계를 준 장병만도 4만6000명에 달한다.

전역 후 군인연금을 받으며 세속에서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종사는 승단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종단으로 복귀하며 자광 대종사는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월주 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비구로서 하자 여부를 종단 호법부에서 심의하고 아무 문제가 없다면, 종단을 대표하는 총무원장스님이 직접 삭발해 달라”고 자청했다. 

조사해보니 자광 대종사는 청정비구로 아무 문제가 없었고, 월주 스님은 대종사를 영화사로 초청해 정성을 다해 삭발해줬다. 그렇게 대종사는 비구로서 종단으로 ‘환귀본처(還歸本處)’했다. 

종단에 복귀한 자광 대종사는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제2대 군종특별교구장을 역임했다. 여기서도 군포교사에 한 획을 긋는 대작불사인 논산 육군훈련소 법당 ‘호국 연무사’를 건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지원금 없이 오로지 불자들의 성금으로 130억 원을 모연해 불사를 완성했다. 이 같은 대종사의 노력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조계종 군종특별교구는 지난 2018년 호국 연무사 경내에 공덕비를 세웠다.

자광 대종사의 논산훈련소 법당 호국 연무사 건립 공덕을 기리기 위한 비문 제막식. 2018년 봉행됐다.
자광 대종사의 논산훈련소 법당 호국 연무사 건립 공덕을 기리기 위한 비문 제막식. 2018년 봉행됐다.

“茶한잔에도 온 우주 동원…대자비심으로 살라”

‘부처님 법 전합시다’ 깊이 공감
오랜 시간 일선에서 포교를 해온 자광 대종사는 지난 3월 23일 조계사에서 봉행된 상월결사 인도순례 회향법회에서 자승 스님이 회향사에서 밝힌 “성불하세요 대신 ‘부처님 법을 전합시다’로 인사하자”는 제안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상월결사 회주 자승 스님이 시대 인식을 정확하게 한 것입니다. 신도 급감, 출가자 급감 현상에 돌파구를 찾고자 부처님 전법의 길을 따라 43일 동안 1167km를 도보순례한 것이죠. 그동안 편안하게 살고 있던 것을 반성하고 이제 제대로 포교하고 전법도생하자는 시대적 과제를 제시한 겁니다.”

그러면서 자광 대종사는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전도선언을 상기시키며 “부처님께서도 정각(正覺) 이후 포교하고 전도할 것을 강조했다”면서 “전법포교는 불자들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설법제일 부루나 존자가 수나이 지역으로 가서 전법할 것을 전하자 부처님께서는 염려하며 ‘너를 칼과 창으로 해치려면 어떻게 하려하나’고 물었습니다. 이에 부루나 존자는 ‘수행해 해탈코자 하는데 내 육신이 죽게 된다면 세상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준 것이라 생각하겠다’고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처럼 목숨을 걸고 포교했습니다. 부처님 당시 불타는 전법 원력으로 중생교화에 매진하자는 화두를 상월결사가 던진 것이죠.”

5월 11일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에게 ‘천년을 세우다’ 기금 1000만원을 전달하고 있는 자광 대종사.
5월 11일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에게 ‘천년을 세우다’ 기금 1000만원을 전달하고 있는 자광 대종사.

화합하려면 인정하라
자광 대종사를 상기시키는 다른 키워드는 ‘화합’이다. 학내 혼란스러웠던 동국대를 이사장으로서 3년 동안 이끌면서 ‘화합’으로 나아가게 했다. 대표적 사례가 2018년 청소노동자와의 화합이다. 당시 동국대는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내홍을 겪었다. 청소를 하지 못한 학교는 쓰레기가 넘쳐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갔다. 

파업 시작 후 86일인 4월 24일 동국대와 청소노동자들은 그해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극적으로 합의점을 도출했다. 이런 극적인 타결에는 자광 대종사의 제안이 있었고, 학교와 노조 모두 서로 입장을 배려해 ‘참회·화합·상생’의 합의점을 찾았다. 

결국에는 관련 노동자 97명 전원은 직접 고용됐다. 이후에도 자광 대종사는 부처님오신날과 명절마다 청소미화원·경비·기능직 근무자 대상 오찬을 열어 노고를 치하하고 한아름 선물도 전달했다. 그래서 자광 대종사가 이야기하는 화합의 원칙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다.

“정치인, 기업인, 일반인 모두가 갈등하고 싸우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데 욕심 없이 살 수 있나. 그런 사람은 없어요. 다만 욕심이 지나치니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상대방을 미워하게 되죠. 그런데 상대방도 욕심이 있다는 것을 왜 인정을 못하는 겁니까. 내 욕심이 있으면 상대방도 욕심이 있습니다. 일단 상대방의 욕심부터 이해를 해보세요. 상호 상대방의 욕심을 이해하고 대화를 하면 합의점이 나옵니다. 이런 합의점을 찾기 시작하면 화합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터뷰 말미, 자광 대종사에게 부처님오신날을 맞은 불자와 국민들을 위한 짧은 법문을 청했다. 이내 대종사는 찻잔을 들어 보고 “차 한잔을 위해 온 우주가 동원되고 있다”며 불자들을 위한 소참법문을 시작했다.  

“이 찻잔의 차를 위해서 찻잎이 재배돼야 하죠. 찻잎을 키우기 위해서는 차나무가 뿌리내릴 대지와 이를 키울 물과 햇빛이 필요하고, 이를 키울 농부와 찻잎을 덖을 다인(茶人)의 노고가 필요하죠. 차를 우려낼 물도 그냥 얻어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엄청난 과정이 뒤에 있어요. 우린 혼자서 단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차 한모금도 내가 잘나서 마시는 게 아닙니다. 인연법, 연기법이 어려운 게 아닙니다. 너를 떠나 내가 살 수 없고, 나를 떠나 네가 살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서로 미워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대자비심’을 발휘하며 사세요. 서로 돕고 포용하며 따뜻하게 살아가십시오.”

돌아서 나오는 길, 자광 대종사는 “깨닫고 보니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오더라. 마음을 잘 써라”고 충고했다. 그렇다. 모든 문제는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겠는가. 천국도 지옥도 결국 마음에 있다. 대종사가 오도송에 강조했듯이.  

모양도 색깔도 부피도 무게도 없는 마음.
도무지 한계가 없으니 우주를 싸고도 남았고,
가고 옴이 따로 없으니 항상 존재하고,
무게 또한 없으니 우주를 짊어졌고,
성내고 기뻐함도 없으니 항상 평화롭고,
색깔마저 없으니 각양각색을 한달음에 총섭하였네.
마음에서 허공이 나왔고, 시간과 공간이 나왔고,
중생과 부처가 나왔고, 천당과 지옥이 나왔으니,
과연 삼라만상을 창조하였구나.
항상 나와 함께하는 진법계의 실상이여!
만상이 출몰하도다.

-자광 대종사의 오도송 ‘마음, 마음,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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