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0은 쌀 모양 타원형일까

부처님, 우유죽 먹고 ‘中道’의 깨달음
‘쌀은 하얀 보살’ 〈계림유사〉 기록돼
고려~조선 중기, 쌀은 ‘’이었다
붓다의 득도 계기 ‘쌀’, 0 형성 영향

수학의 ‘0’은 붓다의 공(空)사상을 설명하는 언어이다. BC 6세기 붓다께서 득도하신 공 사상이 인도사회의 상식이 되어 AD 6세기 인도의 수학자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수학 세계에 투사(投射)하여 ‘0’이 발견된 것이다. 0은 (-0.1) 이하의 모든 수보다 큰 Zero가 아닌 없는 듯 있는 수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즉 공과 0은 동위개념으로 오늘날 핸드폰의 기호일 때는 010(공일공), 숫자에서는 0(영)이라고 한다. 인도에서는 1층을 0이라고 한다.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영국에서도 0층으로 사용하면서 다른 나라로 퍼져나갔다. 0은 나눌 수 없으며 곱하면 0이 되는 숫자의 왕이 되었다. 태극(太極)은 크다는 뜻이 아닌 무극(無極)으로 음양의 태극 문양(紋樣)도 (-)와(+)를 내포하고 있는 0과 동위(同位)개념으로 보고 싶다. 

붓다의 시절 몸을 괴롭히는 만큼 비례하여 정신은 고차원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붓다는 과거와 미래의 어느, 수행자도 자신만큼 철저한 수행자는 없다고 하였다. 간다라 미술의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한 수행자 붓다의 조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붓다는 출가 후 5년 6개월 동안의 고행수도가 무익(無益)함을 깨닫고 파계수준의 중도(中途)에서의 수행 중단의 영단(英斷)으로 중도(中道)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때의 상황은 5명의 동행 수행자가 실망한 나머지 붓다의 곁을 떠나는 사건으로 짐작할 수 있다.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선생은 사람의 몸값을 인류사상 최고치로 인정한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몸 사피엔스’라는 신조어가 떠오른다. 몸은 행복을 만드는 화학(化學) 공장이다. 이 무렵 수자타라는 처녀의 쌀 우유 죽 공양으로 몸을 추스르신 후 정상적인 식생활을 하시었다. 붓다의 일생을 그린 〈불소행찬(佛所行讚)〉에 따르면 태자 시절 미식(米食)의 미식가(味食家)였다. 붓다의 득도는 밥맛을 통한 몸의 깨달음이다. 즉 출가 전의 맛있다(좋다, 즐겁다)의 제1세계와 출가 후 고행 시절 맛없다(싫다, 괴롭다)의 제2세계 뿐 아니라 고행 중단으로 새롭게 느끼는 밥맛을 통해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맛있음(좋지도 싫지도,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즐거움)’의 중도라는 제3의 신세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수자타의 공양이 외조(外助)였다면 붓다의 공양은 내조(內助)가 되어 줄탁동시(緖啄同時)가 이뤄진 것이다. 붓다 이전의 많은 출가자는 왜 깨닫지 못했을까. 그들은 귀족이 아닌 평민이었으므로 출가 전 쓴맛의 생활이 출가 후 똑같은 쓴맛의 생활로 이어져 비교우위의 세계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의 출가는 가출이었던 셈이다. 오늘날 무문관(無門關) 수행의 착상은 붓다의 6년 고행 수행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 수행은 폐쇄된 독방에서 문을 잠그고 최소한의 음식을 제공 받고 3년에서 길게는 10년 용맹정진하는 혹독한 수행법이다. 무문관 수행 기간 마음자리는 붓다의 6년 고행 때와 마찬가지로 마이너스(-)에 머물게 될 것이다. 긴 암흑의 터널을 통과하는 괴로운 시간을 끝내고 해제(解制)되는 날 마음자리는 (-)에서 반작용으로 0으로 돌아오면서 중도의 법열(法悅)을 몸으로 느낄 것이다. 따라서 장좌불와(長坐不臥)수행은 오로지 고통의 시간으로 끝날 수도 있다. 

비행기 탑승 중 갑자기 공기 밀도가 낮은 에어포켓(air pocket) 공간을 통과할 때 비행기는 순간 수백 미터 떨어지게 된다. 이 경우 탑승객들은 마음자리가 순간 마이너스(-)로 변하면서 죽음의 맛을 보게 된다. 다시 정상 비행을 할 때 탑승객들이 느끼는 심경(心境)이 바로 중도의 맛이다. 이처럼 중도는 마음자리의 (-)작용과 반작용(0)의 오묘한 조화(造化)이다.

한 여름철에는 보리밥을 물에 말아 보리굴비를 반찬으로 별식으로 먹기도 한다. 보리쌀은 (-)의 찬 성질이 있어 여름이 제격이다. 반면 겨울철에는 더운 성질(+)의 찹쌀로 만든 약식(藥食)이나 찹쌀떡이 입에 당긴다. 그러나 보리와 찹쌀은 일 년 내내 먹을 경우 물려서 먹을 수 없다. 중도(0)의 성질인 멥쌀은 평생 먹을 수 있다. 이러한 일상사(日常事)에서 중도라는 진리를 누구나 깨닫게 될 수 있다. 전통 사찰음식 가운데 일반인은 먹을 수 없는 빈대 냄새나는 ‘고수풀’이 있다. 아마도 스님들에게 중도의 맛을 체험하게 하기 위한 방편의 나물이었던 듯하다. 우리 속담에 “덤덤한 호박 맛을 알 때 인생의 철이 든다”라고 하였다. 나는 식도락가(食道樂家)의 호기심에서 시식(試食)한 인연으로 기호(嗜好)식품이 되었다. 나의 인생길에서 이 냄새보다 참기 힘들었던 고통의 시간이 있었던 듯하다. 

고수풀 나물은 인생의 고수(高手)가 먹는 식품이다. BC 6세기 석가모니 부처님 깨달음의 계기가 된 쌀이 단순한 곡물이 아니라 인격체로 의인화되어 기원후까지 이어지고 있다. 불교의 삼보(三寶)인 불·법·승에서 붓다는 쌀, 법은 보리, 승은 콩으로 비유하여 쌀을 부처님과 동격으로 대접한다는 어느 고승(高僧)의 글을 본 적이 있다. 고려는 농경사회로 “일완지사 함천지인(一碗之食 含天地人, 한 사발의 밥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합작품일세)”(註)(食: 밥 사, 먹다 식) 과거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밥알 한 알도 버리지 않고 사셨다. 밥은 하늘같은 존재였다. ‘民以食爲天’, 백성들은 밥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기며 살았다. 송나라 때 백과사전인 〈계림유사〉(12세기 초)에 의하면 ‘白未曰 漢菩薩  粟曰 田菩薩- 흰쌀은 하얀 보살, 좁쌀은 전 보살 밭에서 나는 보살’이라고 하였다. 

'ᄇᆞᄉᆞᆯ'의 음운 변환과정이다. '한ᄇᆞᄉᆞᆯ한ᄡᆞᆯ(축약)합ᄡᆞᆯ햅ᄡᆞᆯ햅쌀' '전ᄇᆞᄉᆞᆯ접ᄇᆞᄉᆞᆯ접ᄡᆞᆯ좁쌀' 오늘날 'ᄇᆞᄉᆞᆯ''ᄇ과 ᄉ''햅쌀과 햇과일'처럼 종성(終聲)에 살아남아 있다.

〈계림유사(鷄林類事)〉는 고려 숙종 때 중국의 사신을 따라서 우리나라에 기록관리인 서장관(書狀官)으로 온 손목(孫穆)이 11~12세기 고려인들이 사용하던 언어를 설명한 고려 시대 언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부터 조선 중기까지 오늘날의 쌀을 ‘(菩薩)’이라 하였다.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구도자’라는 뜻이다. 사리(흂利)는 성자의 유골을 뜻한다. 석가모니에게 밥이 생전에는 득도의 스승이었다면 사리는 80 평생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면서 살아오신 수도자로서 사후의 성적표인 결정체(結晶體)인 것이다. 즉 쌀·밥과 사리는 동격으로 생전과 사후 최고가치의 기념물이요 표상(表象)이었다.

우리나라 속담에 “동지 다음날부터 해가 노루 꼬리만큼 길어진다”라고 하여 얼마나 해의 존재를 귀히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서양 고대인들에게 태양은 곧 신이었다. 예수의 탄생일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왜 12월 25일로 정했을까. 이는 태양의 빛이 길어지는 평균 시점(時点)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A.D 6세기 인도의 수학자들은 새로운 기호인 영(零)의 모양을 정할 때 둥근 태양 (○)모양과 쌀 모양의 (0) 타원형으로 최종 의견이 양분되지 않았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국은 농경사회인 동시에 석가족(釋迦族)은 태양숭배민족이었다. 그러나 붓다의 득도 계기가 쌀이었으며 왕가의 돌림자가 ‘밥 반(飯)’으로 정반왕(淨飯王), 백반(白飯), 곡반(斛飯), 감로반(甘露飯)으로 쌀 모양이 우세하게 되었다는 추론(推論)은 무리가 아니다. 앞으로 식생활의 혁명이 일어날지라도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떡볶이의 재료인 쌀로 빚은 가래떡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득한 2600년 전 일상의 밥맛에 중도라는 행복이 있음을 일깨워주신 붓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한낱 에너지원으로 섭취하고 있을 뿐이다.

불교는 ‘현재〈미래(종교)’, ‘현재〉미래(철학)’ 부등호에 따라서 종교와 철학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현세에서 어쩔 수 없이 있게 마련인 사회 절반의 실패자들을 위해서 천국이라는 내세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인슈타인은 일찍이 불교가 인간의 욕망을 완벽하게 해결해줄 수 있는 미래종교로서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대과학자의 예언대로 오늘날 서양에서는 마음챙김(meditation) 열풍이 불고 있다. 올바른 불교의 깨달음은 중도(中道)에서 도(道)를 이해해야 한다. 국어학에서 뜻이 있는 말을 실사(實辭), 뜻이 없는 말은 허사(虛辭)라고 한다. 

이해를 쉽게 돕기 위한 부득이한 예로 돼지 ‘족발’에서 족(足)은 뜻이 없는 발음이며 ‘발’이 뜻이다. 이처럼 중도에서 중(中)은 발음이며 도(道)가 0이라는 뜻이다. 도(道)를 파자(破字)하면 ‘首(처음/0)’와 ‘攘 (쉬엄쉬엄 감 착, 일명 책받침)’의 합자(合字)이다. 즉 마음자리가 처음으로 간다는 뜻으로 곧 도(道)는 ‘0’을 뜻한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란 마음자리가 언제나 중도의 자리인 ‘0’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노자(老子)의 명구(名句)인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에서 도(道)를 0으로 해석해야 올바른 뜻이 가능해진다. 사람은 마음이 심란할 때 5만 가지 생각이 난다고 한다. 한 심리학자의 실험에 의하면 인간은 하루 실제로 5만 번 변한다.

Meet yourself!(너의 진면목을 만나라!)

불교, 붓다가 아닌 붓다 말씀을 믿는 종교
‘자등명 법등명’ 유훈 붓다 가르침의 진수

여름 겨울 거쳐야 ‘중도의 봄·가을’ 느껴
중도, 일상생활서 보통의 맛 음미하는 행복
圓에 만족하는 삶이 圓滿한 인생이 아닐까

붓다는 중도를 발견한 사상가이며 동시에 0을 발견한 대수학자이다. 서기 6세기 인도에서 0이 발견될 때 무명인(無名人)으로 밝혀졌다. 이는 기원전 6세기 공(空) 사상이 천년 후 0으로 변신했다는 반증(反證)이라고 대수학자이셨던 김용운(金容雲) 교수께서 2003년 필자에게 서신으로 밝혀주셨다. 따라서 불교의 교의(敎義)는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육바라밀(六波羅蜜), 팔정도(八正道), 108번뇌 등 숫자로 되어있다. 삼법인(三法印)의 인(印)은 믿을 수 있는 3가지의 진리라는 뜻이다. 오늘날 인감(印鑑)도장의 신뢰성 같은 것이다. 

무한대(無限大)인 겁(劫)과 찰나(刹那) 같은 극단적인 불교의 시간 설정의 근거는 무엇일까. 금강경의 교의가 무아(無我)라면 화엄경은 자아(自我)의 발견이다. 무아는 유한한 인생의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자아발견의 충격요법인 셈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속세(色)가 곧 천국(空)이다. 어느 진보적인 불교학자의 해석이다. 인생은 가까운 미래의 일을 모르는 현재완료 형의 삶이다. 인도는 고대에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를 창제한 언어 선진국답게 석가모니 부처님 시절에도 간단하게 소통이 가능한 원시언어는 있었던 듯하다. 어느 날 붓다께서 제자들에게 낙서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있었다는 데서 추론해보았다. 

제자가 질문했다. “사후(死後)의 서방정토를 믿을 수 있습니까?” 
이에 붓다는 답했다. “아궁이에서 나무가 다 탔을 때 연기는 동서남북 어디로 가겠느냐?”
제자의 답은 이렇다. “꺼진 후 아궁이에 재만 남습니다.”

한편, 훗날 같은 질문에 육조혜능은 “극락에 사는 서방정토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겠느냐”라고했다.  

나는 이 글의 스승과 제자와의 대화에서 이런 느낌을 받는다. 오늘날 대학사회에서 교수와 제자가 편안한 사은회(謝恩會) 같은 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상상해보았다. 즉 강의시간에서 듣지 못한 쉬운 내용인데 오히려 더 감명 깊은 말씀으로 평생 간직하게 되는 경우이다. 우리 조상들은 오랜 세월 불교사회의 풍토에서 살았음에도 뜻밖에 내세(來世)에 대한 속담이 단 한 편도 없다. 오히려 “죽은 정승보다 산 개가 낫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처럼 현생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나에게 불교를 눈뜨게 해주신 어른은 현 BTN불교TV 회장이신 석성우 대종사다. 내게 일자관(一字關)인 염(念)자 화두를 내려주셨다. 염(念)을 풀이하면 지금(今)+마음(心), ‘제로 마인드(Zero mind)’이다. 사람들의 괴로움은 이미 지나간 일과 아직 오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생긴다. 지금이 모여 오늘이 되고 오늘이 모여 금생(今生)이 되는 것이다. 날짜의 0인 오늘에서 ‘(-)1’은 ‘어제’요, ‘(+)1’은 ‘내일’ 이다. 오늘은 말기 환자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이다. 오늘은 어제의 열매요 내일의 씨앗이다. ‘오늘’은 ‘오!(감탄사)’와 ‘늘(항상)’로 오늘 속에 영원이 있다. 영원은 특별한 미래가 아닌 ‘오늘’을 닮은 ‘내일’일 뿐이다. 인생은 오늘의 반복으로 오늘은 위대하다. 오늘 하루는 짧은 일생이다.

불교의 정수(精髓)인 중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전법륜(初轉法輪)과 108번뇌의 계산과정을 통해야만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 

인도는 붓다의 공(空)사상이 수학 세계에 0으로 편입되면서 눈부신 과학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한국의 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인도의 과학기술연구원을 모델로 삼았다. 따라서 고대 인도의 전통의학도 과학적이었다. 붓다의 첫 설법인 사성제(四聖諦), 고(苦)·집(集)·멸(滅)·도(道)에서 고(苦)라는 병이 생겼을 때 ‘눈·귀·코·입·몸·마음’에서 일어난 욕망 때문에 집(集)이라는 진단 결과 이는 금강(金剛)몽둥이로 벼락처럼 한방에 내려쳐 소멸(消滅)하라는 지혜의 처방이다. 따라서 <금강경(金剛經)>을 일명 ‘벽력경(霹靂經)’이라고도 했다. 붓다는 득도하신 후 더 이상의 깨달음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수행의 제1막을 마치신 셈이다. 이를 이고(離苦)의 수행단계라고 한다. 붓다께서 득도하신 후 더 이상의 깨달음은 구하지 않는다는 선언(宣言)에 주목해야 한다. 

이제 수행의 제2막부터는 애벌레에서 해탈한 나비같이 갖가지 꽃으로 장엄(莊嚴)된 화엄(華嚴) 세계에서 중도(中道)의 삶을 향음(享音)하는 것을 득락(得樂)이라 한다.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이처럼 현 불가(佛家)의 해석과 달리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관심석(觀心釋)이 필자가 주창(主唱)하고 싶은 견해이다. 화엄(華嚴)은 잡화엄식(雜華嚴飾), 갖가지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됨을 말한다. 화(花)는 육안으로 보이는 꽃이고, 화(華)는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꽃이다. 

108번뇌를 수학적으로 푸는 과정에서 난해한 중도의 정수(精髓)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등산에서 인간은 몸이 느끼는 세 가지의 감정이 있다. 

산등성마루 걷기는 중도의 행복으로 (-)의 시간이 없이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올랐다면 즐길 수 없는 시간임을 강조하고 싶다. 일상의 힘들고 괴로운 시간은 중도를 잉태하는 시간이다. 한자로 ‘산등성마루’를 강(岡)이라고 한다. 일본의 지명 후쿠오카(福岡)는 ‘일상의 평지 보행의 행복’, 시즈오카(靜岡)는 ‘고요한 산등성마루 걷기의 행복’ 필자의 관심석(觀心釋)이다. 손에 쥐고 흔들어서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식혀주는 부채는 쓰임을 아는 데 있지 않고 실제로 사용해야 뜻이 있다. 

중도 역시 일상생활에서 발견하고 즐겨야 한다. 그리고 중도는 중간의 개념이 아니다. 우선 야구경기에서 10할의 절반인 5할은 미국의 메이저리그에서도 달성하지 못한 꿈의 타율이다. 보통사람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중간이 아닌 좋은 사람이다. 무더운 (+)의 여름을 거쳐야 중도(0)의 가을을 느낄 수 있으며 (-)의 혹독한 겨울 추위의 맛을 보아야 중도(0)의 봄을 몸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은 중도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축복받은 나라이다. 알려지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명언이 있다. 음미하지 않은 인생은 헛되이 산 삶이라고 하였다. 중도의 영역인 ‘해피 미디엄(Happy medium)’은 절묘하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중도는 평범한 생활에서 발견한 보통의 맛을 음미하는 행복이다. 생활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중도의 예이다. 

시자(侍者)였던 아난(阿難)존자는 80세 고령의 붓다께서 열반에 드시게 될 듯 하자 앞으로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느냐고 여쭙는다. 붓다의 유훈(遺訓)에서 불교의 진수(眞髓)를 발견할 수 있다. 

“너는 그동안 나를 믿고 살았느냐? 앞으로는 나의 설법을 믿고 살아라. 그리고 궁극에는 너의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여라.”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의 가르침. 불교는 의자(依自) 종교이다. 불교는 붓다가 아닌 붓다의 말씀을 믿는 종교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분모(分母)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분자(分子)로 독창적인 세계를 이룬 불자를 작가(作家)라고 한다. 작가는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연설(演說)처럼 불교에서 온 말이다. 나는 인도여행 중 야간열차를 기다리는 켄트역(驛) 구내의 아담한 책방에서 다음의 책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꿈속인 듯 황홀하였다. 어떻게 붓다의 정수(精髓)를 이처럼 번역할 수 있을까. 필자의 의역(意譯)이다. 

‘Meet yourself!(너의 진면목을 만나라!)’

오늘날 자기 몸에 맞지 않는 기성복 같은 행복론은 허다하다. 일상에서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이 곧 행복이라는 항다반사(恒茶飯事), 원(圓, 0)에 만족하는 삶이 원만(圓滿)한 인생 아닐까. 나는 잠시 작가 불자가 되어 다음의 명제(命題, proposition)를 지어 보았다. ‘천상천하(天上天下) your 독(獨) zone!’ 나의 인생 후반기에 발견한 중도. 아! 중도여! 이제는 유레카(Eureka, 발견의 희열)를 노래하고 싶구나.〈끝〉 

이규항 前 KBS아나운서 실장은?
서울 출생. 고려대 2학년 때 학년을 4학년으로 올려 KBS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규정에 어긋나 졸업하던 해 다시 KBS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야구, 씨름, 유도 전문 캐스터로 활동하며 35년 동안 KBS 아나운서로 봉직했다. 퇴직 후에는 일본 프로 야구의 주니치로 이적한 선동렬, 이종범, 이상훈 선수의 활약상을 중계했다. 저서로 〈부처님의 밥맛〉 〈0의 행복〉 〈한국어 발음사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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