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계급 폭력을 비틀다  

​​​​​​​2022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자본주의 계급 비유한 호화 크루즈
무인도에 표류하며 일순 계급 역전 
찡그린 미간 나타나는 ‘슬픈 삼각형’
부처님 ‘백호광명’ 깊은 뜻 되새긴다

불상을 보면 부처님 눈썹 사이에는 구멍이 있다. 어릴 때는 부처님이 마마를 앓으신 건가, 곰보 흉터인 건가 싶었다. 국사 시간에 석굴암 불상처럼 동굴 안에 모신 부처님 미간에 박힌 보석은 아침에 동틀 때 해가 깊숙하게 들면 동굴 바깥까지 환하게 빛을 뿜었다는 선생님 말씀에 그 찬란한 광휘를 이제는 볼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던지. 이제는 부처님 가피를 바라며 귀하게 새겼던 보석들은 죄다 도적들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 보석은 ‘백호광명’을 상징한다. 백호는 흰 터럭이고 훗날 부처님이 된 고타마 싯다르타가 날 때부터 백호가 있었다고 하며, 여러 문화권에서 종교의 경계를 넘어 깨달음에 이른 존재 이야기 전승에 나타난다. 노자는 태어날 때부터 온 몸에 흰털이 나 있었다고 하고, 힌두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존재는 육신의 두 눈 사이에 ‘제3의 눈’이 있다고도 한다. 

흰 터럭 가운데 특히 ‘흰 눈썹’은 백미(白眉)라고 한다. 촉한에 재주와 학문을 겸비한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다른 형제들과 달리 흰 눈썹을 가지고 있었던 마량이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기에 탁월한 작품이나 어떤 물건의 높고 맑은 정수를 가리킬 때 ‘백미’라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처는 몸에서 뿜어 나오는 빛은 ‘진리’를 나타내며, 특히 부처의 미간백호(眉間白毫)에서 발현되는 빛을 ‘백호광명’이라고 한다. 

불경 가운데 부처의 모습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법화경〉은 부처님이 백호에서 빛을 발해 동방 1만8천세계를 비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백호광명은 일체를 받아들이되 차별이 없어 원만 무애하며, 부처의 평등한 큰 지혜를 상징하는 빛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계급 없는 사회, 자비심이 고루 미치는 세상이 참 세상이라고 깨우치고 그 진리를 온몸으로 알리신 것이다. 

2022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은 딱 그 반대에 있다. 사람들이 인상을 쓰고 찌푸릴 때 눈썹 사이에 나타나는 주름이 바로 ‘슬픔의 삼각형’이다.

2017년 〈더 스퀘어〉로 칸영화제 첫 경쟁에 오르자마자 바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전세계 영화계에 젠체하는 사람들이 얽혀 있는 세상의 권력, 계급, 비틀림, 부조리, 비루함을 ‘웃프게’ 드러낸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사람 세상에서 부처의 광명 대신 슬픔을 보는 감독이다. 그리고 그 슬픔 때문에 눈썹 사이에 세모꼴로 잡힌 주름의 결을 아주아주 세세하게 풀어 놓는데 놀라울 정도로 집요하다.

〈슬픔의 삼각형〉이 모아 놓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일상에서는 서로 얽힐 일 없는 사람들이 장편 영화 한 편을 엮어낼 만한 인연으로 모이도록 한 것은 호화 유람선 때문이다.

관광 좀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 최고 로망으로 꼽히는 여행 상품이 바로 크루즈 투어일 것이다. 비행기로 이 땅에서 저 땅으로 목적지에 후딱 가서 깃발 들고 재촉하는 가이드 따라 미친 듯이 좌표 찍고 간신히 인증 사진만 찍고 오는 서민형 단체 여행과는 달리, 크루즈 여행은 육지를 떠나 몇날 며칠 걸리도록 느긋하게 유람선을 타고, 바다 위에서 먹고 자고 파티하고 수영하고 연애하며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을 즐기는 느긋한 부자들의 여행이다. 

이 호화 관광 유람선에는 부자들만 오를 리가 없다. 그들의 시중을 들 승무원들이 있어야하는데, 이 승무원 세계는 워낙 안전과 관련된 전문성이 중요한 운항 수단이다 보니 ‘캡틴’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하는 명령 체계를 따르는 조직이다. 〈슬픔의 삼각형〉의 승무원들은 아주 의욕에 차 있다. 안전한 운항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물 쓰듯 써댈 부자 승객들로부터 더 많은 ‘팁’을 받아내기 위해서.

이들이 기다리는 승객들 가운데 영화는 먼저 모델 커플인 야야와 칼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데이트 비용을 두고 남자가 내는 게 당연하다는 야야나 모델로 더 잘나가는 사람이 내는 게 맞는 거 아니냐고 따지는 칼은 돈을 물 쓰듯 쓰기는커녕 인플루언서라서 무료로 탑승하는 승객이니 승무원들에게 봉 노릇하기는 글렀다.

페미니즘과 여혐 사이에서 여성의 육체와 웃음은 갖고 싶지만 돈은 쓰기 싫으면서도 또 인플루언서로서 누릴 것 많은 여자 친구 야야의 치마꼬리를 놓을 생각도 없는 칼은 훤칠하고 잘 생겨서 더 비루해 보인다.

이들이 크루즈에 오르면서 진짜 부자들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인간 군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이 된다. 모든 승객 가운데 가장 돈을 뿌려대는 사람들 돈은 다 구리다. 비료 사업을 하는 러시아 부자는 그러니까 똥을 팔아서 떼돈을 번 것이고, 무기를 팔아서 부자가 된 부부는 피와 분쟁을 일으켜 돈을 불린 것이고, 인플루언서여서 무료로 탑승을 하게 된 야야와 칼은 타인의 시선과 욕망에 무임승차한 것이다, 

이들이 쓰는 돈 앞에서 승무원들은 웃음으로 엎드린다. 그 승무원들은 돌아서서 궂은 일 담당인 청소부들을 몰아쳐댄다. 그러니까 이 배는 자본주의 사회의 표상과도 같다. 술에 취해 의무도 팽개친 선장이 나타나든 말든, 배의 안전이 지켜지든 말든 승무원들은 부자 승객들만 만족하면, 그래서 그들이 뿌려대는 돈만 뽑아낼 수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 자기 앞에 음식을 게워내든 말든.

그런데 돈이 있으면 도적이 드는 법! 뉴스에도 종종 나오던 그 해적이 들이닥치는데, 인재보다 무서운 건 천재지변까지 덮치면서 스크린은 사람들 토사물과 비명과 풍랑에 휩쓸려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다. 크루즈라는 환상은 순식간에 악몽으로 바뀌어 버리는데 이게 끝이 아니다.

몇몇 생존자들이 깨어나 보니 하필 무인도. 지금껏 크루즈를 지배해 온 질서는 돈으로 이뤄진 계급이 바탕이었는데, 아뿔싸! 돈이 아무 소용없는 무인도라니!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먹어야 하는데, 먹을 것을 구하려면 수렵이든 채취든 몸과 기술이 있어야 한다. 기껏 먹을 것을 구해도 요리를 해야 입에 넣을 수 있는데 남이나 부리던 부자들은 불 하나도 붙일 주변머리가 없다.

몸 쓰는 일로 살아 온 중년 여성 이주노동자 애비게일이 억척스런 생명력으로 생선을 잡고 불을 붙여 음식을 만들어 냈을 때, 늘 그 청소부의 시중을 받는 것이 당연했던 사람들이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바라보게 되면서 모든 것이 뒤집힌다. 

남자가 힘으로 뺏으면 될까? 힘이 있으면 뭘 하나. 요리를 할 줄 모르는데. 윽박지르는 것보다 효과적인 건 조아리는 것. 돈으로 안 되면 미모로 해결하고, 욕망을 감추느니 채우고 채워주는 관계가 과자 한 봉지라도 더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새로운 계급 사회에 적응해 간다.

이 우스꽝스러운 새 계급 질서에 가장 적응을 잘하는 등장인물이 바로 처음 ‘슬픔의 삼각형’을 만들었던 사람, 칼이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칼은 모델 오디션을 보고 있었다. 유명 패션 브랜드 오디션에서 제 딴에는 멋져 보일 심각한 표정과 몸짓을 잡아 보이는데 브랜드 관계자가 칼에게 “슬픔의 삼각형을 만들지 말라”고 지적한다. 그 짧고 무심한 지적 하나로 칼의 눈썹 사이에 떠올랐던 ‘슬픔의 삼각형’은 미소에 밀려 사라졌었다. 

야야의 연인이었던 칼은, 돈도 더 많이 버는 야야와의 데이트 비용을 남자라서 자기가 내는 게 부당하다고 분개했던 칼은, 그러면서도 야야의 명성에 기대 공짜 크루즈 여행을 즐겼던 칼은 새로운 권력자 애비게일의 손짓 앞에 고분고분하기만 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석가모니의 고향인 인도, 한 때는 불교의 본산이었던 인도가 계급 없는 평등 사회를 가르치는 불교 대신 왜 아직까지도 철저한 카스트에 얽매인 계급 사회가 되었을까를 생각했다. 

기원전 3세기에 전륜성왕으로 일컬어지는 아쇼카 왕이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통일 국가를 이루었던 인도는 7세기까지도 당나라 승려 현장이 대당서역기에 기록하기를 불교 사원이 천 개가 넘고 출가 수행자가 5만이 넘는 불교 국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철저한 계급을 기반으로 하는 힌두교 국가가 되어 있다.

이슬람의 침공이든, 제국주의 서양의 지배든 외세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먹고 살기 팍팍한 사회였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먹고 사는 생존의 치열함 앞에서 자존감보다 쉽게 저버려지는 것이 평등이라는 진리였을 것이다. 인도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계급의 틀에 묶여있다. 법으로는 평등할 지라도 아이들도 다 아는 ‘금수저 흙수저’ 계급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성의 상징인 ‘슬픔의 삼각형’을 먹고 사는 일 앞에 지워버리도록 하는 것이 계급의 폭력이라는 이 서늘한 영화를 보면서 불상 눈썹 사이 사라진 보석들을, 백호광명의 깊은 뜻을, 평등을 향한 자비심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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