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 이후 복수 그린 드라마 〈더 글로리〉
공개된 파트 1, 2 모두 세계서 ‘인기몰이’
핏빛 복수 아닌 業의 결 들춰 죄인 벌해
짓밟히던 사람들끼리 연대, 단죄의 동력

드라마 〈더 글로리〉 한 장면. 넷플릭스서 시청이 가능하다.
드라마 〈더 글로리〉 한 장면. 넷플릭스서 시청이 가능하다.

학교폭력, 그리고 그 이후를 다루는 드라마 〈더 글로리〉는 먼저 파트1이 공개 되자마자 세계적 관심을 받았고 파트2까지 공개되는 내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지뢰밭에 인물들을 끌어들여 언제 터질지, 어떻게 터질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도록 만드는 김은숙 작가의 촘촘한 대본이 긴장감 넘치는 연출과 만나 폭발적으로 터뜨린 관심작이다. 이번의 지뢰밭은 학교다. 타이틀 롤인 송혜교(문동은 역) 뿐 아니라 매 장면 장면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주·조연 가릴 것 없이 저마다 개성은 개성대로, 합은 합대로 불꽃 튀는 연기가 빚어내는 화학반응은 ‘밈’이 되어 플랫폼마다 흘러넘치고 있다.

문동은의 팔뚝에는 처참한 화상 흉터를 영혼에는 참혹한 트라우마를 새기게 된 지뢰밭은 학교다. 그 학교에 스스로 다시 돌아온다는 건 여전히 묻혀있는 지뢰를 밟고 자폭하겠다는 것은 아닐 터이니 지뢰를 제거하거나, 지뢰를 심은 이들을 벌하거나, 아니면 지뢰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근원 자체를 찾아 책임을 묻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 행위를 대개는 ‘복수’라고 한다. 그래서 드라마가 처음 시작했을 때 〈더 글로리〉에 대한 초점은 동은이 복수에 어떻게 성공할까에 몰려있었다.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학생 시절에도 약자였고, 평교사가 되어 돌아온 상황에서도 동은은 권력자는커녕 그 언저리에도 있는 존재가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동은에게 상처를 새기고, 동급생 소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해자 5인방은 예나 지금이나 집안, 학벌, 직장, 교육 시스템까지 든든하게 서로서로 뒷배가 되어주며 나쁠수록 더 잘 나가는 어른이 되어 있는데. 그들이 나쁜 짓 한다고 바로 잡으려는 어른 따위 필요 없이 나쁜 짓을 없던 일로 만들어주려는 가해자들의 가족과 재력은 흠집하나 없이 탄탄하기만 한데.

그런 지뢰밭에서 웃음기 없이 가해자들을 만나 피해자였던 자신을 기억해 내라고,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라고, 그 잘못에 대해 반성하라고 아무리 따져도 돌아오는 건 비웃음인 상황에서 복수라고? 죽이기라도 할 건가? 가해자와 같은 방식으로 복수하면 그게 어떻게 ‘영광’이 될 수 있을까? 이 드라마, 유혈낭자한 하드고어 슬래셔 장르인 건가?

처음의 이런 짐작과는 다르게 동은은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가해자들을 무너뜨린다. 가해자 5인방 뿐 아니라, 있었던 폭력을 지워버린 조력자들까지 모두. 그들끼리 서로서로 아귀다툼하게 만들어서.

복수라는 건 자비를 바탕으로 하는 불교에서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과 연의 갈래에서 지은 죄는 저마다 업으로 감당해야 한다지만, 남한테 당한 억울하고 사무치는 상처와 피해는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이 몸에는 흉터로 남고, 영혼에는 트라우마로 새겨졌는데.

〈더 글로리〉에서 동은은 그 방법을 찾느라 오래오래 공을 들여야 했다. 스스로를 세워 교사가 되고, 바둑 잘 두는 사람이 되고, 생판 남인 학교 5인방과는 달리 가족이라는 인연에 매인 엄마와의 악연도 피해야하고, 가해자 무리들이 가진 것과 숨긴 것도 다 조사해야 하고. 그래서 고데기로 친구 팔뚝 지지는 것 정도는 웃으며 저지르는 연진이 “너 바빴더라”라고 조롱하며 그렇게 바빠 놓고도 여태 발바닥 아래 계급에 있다고 비웃을 때 “응, 바빴어”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그 바쁜 동안 모은 증거들을 내밀며 고작 동은이 요구하는 건 잘못에 대한 ‘인정’과 그 잘못에 대한 ‘자수’다. 살인도 하고 은폐도 한 흉악범에게 얼마나 자비로운 속죄인가? 그리고 가해자는 그 자비 앞에 얼마나 모질고 어리석은가?

그래도 동은은 칼을 잡지도 총을 들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동은은 모든 단죄를 이뤄낸다.

동은이 단죄하는 방법은 정말 별 것 아니다.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에게 맺혀진 업의 결을 들추고, 악업을 지은 자들은 자신의 업을 잊지 말라고 일깨우고, 그 악업을 가리는 자들은 그것이 죄라는 것을 가르치고, 새로운 악업을 더하려는 자들은 저들끼리 서로 대적하게 한다. 그러는 동안 피해자들끼리 새로 인연을 맺고, 각자 짓눌린 악연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주자고 손을 잡는다. 피해자끼리의 연대가, 권력에 짓눌리고 법에 외면당하고, 날마다 날마다 폭력 앞에 벌벌 떨며 짓밟히던 사람들끼리의 연대가 죄를 벌하는 힘이 되다니!

그렇게 해서 〈더 글로리〉는 핏빛 복수극을 넘어 죄에 대한 업보를 저마다 받게 하면서 스스로는 악연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원의 드라마가 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죄업은 더하지 않고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와 믿음은 보태게 되는 과정은 소중하고 신선하다.

동은은 소아성애자 관음증 교사로부터 가해자들끼리 불륜으로 낳은 딸인 예솔을 지켜주고, 현남을 두고 유학 가기를 머뭇대는 수인에게 ‘외면’의 가치를 당부하고, 억울하게 가려진 친구의 죽음도 일깨운다. 그리고 박연진의 남편이었던 하도영은 예솔을 진짜 아빠의 품으로 안아든다.

죄는 드러나고, 죄인은 벌을 받는다. 그 정도로 ‘영광’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은이 학교에 있는 모습, 예전의 학교에 교사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학교 강의실에 학생으로 있는 모습, 화상 흉터를 가리느라 꽁꽁 가렸던 팔을 스스럼없이 드러낸 옷을 입고, 그 흉터 위에는 근사하게 타투를 하고 환하게 웃는다. 동은에게 흉터가 남아있듯 과거는 없어질 수는 없지만, 거기 매이지 않게 된 그 웃음은 한 경계를 넘은 뿌듯함을 담고 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업을 끊어낸 ‘영광’의 웃음이다.

근대 이후 학교는 세계적으로 비슷비슷한 교육기관이 된 지 오래니 동시대 전방위적 공동 경험을 일으키는 설정이라 그럴 수 있다지만, 하필 ‘학폭’이라 더 높은 공감과 몰입도를 자아낸다는 건 씁쓸한 일이다. 학폭이 인류 전체의 어두운 공업이라는 뜻이기도 한 거니까.

딱 10년 전인 이맘때, 불교계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2013년 3월 16일 17일 이틀 동안, 공주 전통불교문화원에서 ‘불교어린이청소년지도사 연수’에 참가한 불자 100여 명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앞장설 것을 서원하는 행사였다. 학교폭력이 오죽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으면 불교계에서 따로 서원을 세우는 행사를 가지기까지 했을까.

또래끼리 다투는 일은 숨 쉬듯, 밥 먹듯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으로 여겨지곤 하는 문화였다.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다투고,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각자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하고, 마침내 화해해서 벗으로 오래오래 남는 것이라면야, 하면서. 그 다툼이 학교에서 벌어진 거라면 교육과정의 하나로 학교가 알아서 하겠거니 뒷짐 지는 문화도 있고. 애들 싸움으로 교사 번거롭게 했다가 괜히 자기 아이 밉보일까도 걱정되고.

그런데 다툼이 아니라 일방적, 집단적, 가학적 행태가 되는 것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 것은 폭력이고 범죄다. 학교폭력, 사실 그 못된 악행은 학교라는 기관이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가족에게서도, 아는 어른들에게서도, 지나가다 눈여겨볼지도 모를 남인 사람들에게서도 동떨어진 장소, 학교. 가는 것이 의무인 사회라면 더욱더.

제한된 공간, 규율화된 권력, 일방적 통제를 전제로 하는 감시 시스템, 사회가 요구하는 내용을 익혀 순응적 구성원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 내용. 이런 것이 근대적 학교의 본질이라고 본 미셸 푸코는 일찍이 학교가 감옥과도 같은 권력기관이라고 통찰했다. 근현대 이전 계급사회에서는 특권이던 교육이 학교교육은 모든 국민에게 헌법에 명시된 의무이자 권리다.

국민된 의무이기에 거기서 생겨나는 모든 사고에 대해서는 사회가, 국가가 책임져야 하고, 그러니 학교폭력은 사회구성원 모두의 공업인 것이다. 나만 아니면, 내 자식만 아니면, 저런 애들과 어울려서, 오죽 못났으면 같은 핑계를 세울 일이 아닌 것이다.

〈더 글로리〉 전에도 학폭은 늘 문제였다. 해맑게 웃으며 애교로 유혹하는 아이돌들, 태극기를 달고 국민적 응원을 받으며 경기장을 누비는 운동선수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스타가 되겠다고 사랑과 정열을 담아 트로트를 열창하는 가수 지망생들, 정치인이나 관료 부모가 승승장구하려는 길목에서 발목을 잡는 잘 나가지만 망나니인 자식들, 이런 셀러브리티 관련이 아니면 사건사고 뉴스에서 이제는 어지간히 처참하지 않으면 다뤄지지도 않게 된 지 오래다.

10년 전의 서원식에서 당시 한혜원 월정사 문수청소년회 사무차장은 학교폭력에 대해 피해자와 가해자 말고도 방어자, 소극적 방어자, 방관자, 소극적 조력자, 조력자, 동조자까지 여러 층위의 인연이 관련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가해자’에 대한 교화 못지않게 괴롭힘을 막아줄 ‘방어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직 동은은 젊고, 최선을 다해 외면하지 않고도 행복해 질 수 있도록 오래오래 바빴다. 동은은 피해자로서 복수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다른 폭력 앞에서 조력자가 되고 방어자가 되었다. 동은의 웃음은 우리에게 요청한다. 방관자가 될 것인지, 방어자가 될 것인지를. 〈더 글로리〉가 누리는 인기와 영광을 같이 기꺼워하면서 앞으로 새로운 시즌을 기다리게 되는 것은 복수라는 악업에 짓눌리지 않고도 단죄할 수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줄요약

〈더 글로리〉는 핏빛 복수극을 넘어 죄에 대한 업보를 저마다 받게 하면서 스스로는 악연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원의 드라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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