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면…

“모든 색깔, 뇌가 인식한 것에 불과
그리 생각하면 색은 본래 없는 것
색깔을 볼 수 없는 노을 씨야 말로
세상의 빛 그대로 보고 있지 않을까”

그림- 최주현
그림- 최주현

노을 씨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노을 씨는 낯선 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침대 옆에 등받이가 둥근 의자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텔레비전이 걸려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언젠가 노을 씨가 본 적 있는 드라마가 나왔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습니다. 천장의 에어컨에서 나오는 서늘한 바람과 옅은 소독약 냄새, 가슴 위까지 덮여 있는 이불의 사각거리는 촉감까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이 흑백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현실과 같았습니다. 노을 씨는 텔레비전 속 배우의 회색빛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노을 씨는 여전히 꿈속의 방에 있었습니다. 회색 의자, 회색 커튼, 회색 벽, 회색 에어컨. 천장의 둥근 조명마저 희미한 회색이었습니다.

당신 깨어났군요.” 노을 씨의 아내가 말했습니다. 노을 씨의 아내는 회색 손을 뻗어 노을 씨의 이마를 어루만졌습니다. 순간 노을 씨의 온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맙소사!” 노을 씨는 소리쳤습니다. “이건 꿈이 아니야!”

의사 선생님은 노을 씨의 뇌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우스 포인터로 뇌의 뒷부분을 가리키

며 이곳이 손상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노을 씨의 눈에는 벌레가 파먹은 작은 콩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았습니다. 단지 색깔만이 노을 씨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림은 노을 씨의 전부였습니다.

노을 씨는 해 질 무렵의 풍경을 사랑했습니다. 해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남은 빛이 하늘을, 땅 위의 모든 생명을 물들일 때, 저마다 자신의 빛깔이 짙어지고 깊어지는 그때의 고요한 울림이 좋았습니다. 노을 씨는 그 풍경을 가슴에 담아두곤 했습니다. 노을 씨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마음에 스며든 빛깔을 판화처럼 화폭에 찍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릴 수 있다고, 노을 씨는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눈이 잊고, 머리가 잊은 빛깔들을 손끝이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을 씨는 노을빛을 표현하기 위해 빨강검정노랑을 어떻게 섞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어둠이 스며든 물빛을 그리기 위해코발트블루의 농담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노을 씨는 자신감에 가득 차서 화실 문을 열었습니다.

화실에 있는 그림을 본 순간 노을 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그것은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렇게나 뭉개놓은 검은 얼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몹시 추하고 혐오스러 웠습니다. 노을 씨는 자신이 그렸던 그림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노을 씨는 칼을 들었습니다. 그림이 찢겨나가는 동안 노을 씨의 마음도 갈가리 찢겼습니다.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노을 씨는 아무것도할 수 없었습니다. 웃지도 말하지도 않고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노을 씨는 자꾸만 작아졌습니다. 노을 씨의 아내는 노을 씨의 손을 잡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노을 씨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미술치료를 하는 교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주제와 상관없이 항상 꽃을 그립니다. 할머니는 꽃을 좋아합니다. 머리에도 가슴에도 꽃을 달고 있습니다. 허공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다리를 달달 떠는 청년도 있고, 입만 열면 욕을 하는, 눈매가 화살촉처럼 날카로운 여학생도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입니다. 노을 씨는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스케치북만 바라봤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는 거침없이 그림을 그립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오버롤을 입은 여자아이를 스케치북 중앙에 그려넣습니다.

내 이름은 김 선. 열 살이야. 사람들은 나를 써니라고 불러. 써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별명이야. 아저씨는?”

노을 씨라고 부르렴.”

그런데 노을 씨는 어째서 그림을 그리지 않아? 노을 씨 스케치북은 언제나 텅 비어 있잖아. 지난번에도 지지난번에도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지?”

노을 씨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습니다. 열살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키가 작아서 도저히 그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어림으로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 되었으려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른에게 대뜸 반말을 하며 야무지게 말하는 폼을 보니 열 살도 더 넘어 보였습니다. 나를 우습게 보면 가만히 있지 않겠어, 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아서 노을 씨는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자꾸만 웃음이 나왔습니다.

써니의 그림 속 여자아이는 한 쪽 다리를 높이 쳐들고 있습니다. 허리쯤 오는 높이에 집과 나무가 있고, 무릎 아래의 높이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자아이에게 밟힐까 봐 아이를 올려다보며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써니는 눈을 그려 넣는 중입니다.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습니다.

난 이 교실이 싫어. 그림으로 마음을 읽는다니 정말 웃겨.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거야. 선이는 작은 키 콤플렉스 때문에 화가 많이 나있어. 후후, 웃기지?”

심술궂네.”

나도 알아. 난 심술궂어. 까칠하지. 모난 아이. 엄마가 그랬어. 나는 화를 내는 병에 걸렸대. 화가 나서 화를 내는 건데 그게 왜 병일까?”

써니는 지금도 화가 많이 나 있구나. 꽉 움켜쥔 주먹이랑 거칠게 표현한 선을 보면 알 수 있지.”

사실 나를 써니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아. 엄마, 아빠, 담임선생님, 유치원 때부터내 친구였던 율이. 다른 애들은 나를 꼬마라고 불러. 꼬마라는 말을 들으면 몸속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아. 어른들은 말하지. 꼬마라는 말 안에는 귀엽다는 뜻이 숨어 있다고. 하지만 내 별명은 접힌 말이야. 꼬마라고 적힌 종이를 펼치면 꼬마 악마라는 말이 나온다고.”

써니는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합니다. 꼬마라고 놀리는 친구들과 모난 아이라고 자기를 탓하는엄마에 대해서.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줄 알았던 선생님의 거짓 마음에 대해서.

선생님의 마음이 진심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노력은 했다고 생각해. 노력하는 마음속에는 그래도 진심이 한 조각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

아니! 선생님은 책에서 읽은 말을 그대로 흉내냈을 뿐이야. 이런 말을 해주면 어떻게 반응할까. 저렇게 대해주면 어떻게 변할까. 실험실의 쥐처럼 나에게 실험을 한 거야. 난 정말 화가 났어. 내가 진짜라고 믿었던 마음이 거짓이어서. 그 거짓말에 속은 내가 바보 같아서.”

써니는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여자에게 덧칠을 합니다. 써니의 손이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여자의 모습이 검게 지워져 갑니다.

나는 선생님에게 소리를 질렀어. 욕을 하고 침을 뱉었어. 마구 날뛰는 내 손목을 선생님이 잡았어.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선생님 팔을 깨물었지. 팔에서 피가바닥에 후드득 떨어졌어. 그 모습을 보고 나에게 진짜 악마 같다고, 그렇게 말한 건 내 유일한 단짝 친구 율이였어. 선생님에게 정말 조금이라도 진심이 있었을까? 내 마음속에 정말 악마가 살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진심 같은 건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

마음속에 악마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악마가 살고, 천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천사가 살지.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있는 건 악마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야.”

노을 씨는 연필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작은 물방울 하나를 그렸습니다.

나는 점점 작아져서 이렇게 작은 물방울이 되었단다. 작고 무겁고 축축해졌어. 내 마음속의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지. 그래서 내 스케치북은 이렇게 텅 비어 있단다.”

써니는 연필을 쥐고 물방울 위에 나뭇잎 하나를 그립니다. 나뭇잎은 작은 우산처럼 물방울 위에 놓여 있습니다. 노을 씨는 연필을 쥐고 그림을 이어 그립니다. 나뭇잎을 쥐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 화난 척하고 있지만 마음이 따뜻한 아이를.

마음속의 내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을 거야. 화를 내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겠지. 어떤 말로 꼭 집어 표현해야한다면 그건 그냥 그 자체로 아름다운 존재가 아닐까.”

써니는 말끄러미 노을 씨의 눈을 봅니다. 커다랗고 검은 눈동자를 보다가 노을 씨는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검고 반들거리는 것들은 모두 싫었는데, 써니의 눈동자는 참 맑게 느껴집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물처럼 맑고 고요합니다. 고요하고 쓸쓸합니다. 어쩌면 써니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슬픈 게 아닐까, 노을 씨의 마음에 작은 물결이 일렁입니다. 노을 씨는 슬픈 게 아니라 화가 난 게 아닐까.

노을 씨와 써니는 바통처럼 연필을 주고받으며 스케치북을 채워갑니다. 써니가 구름을 그리면 노을 씨가 태양을 그립니다. 노을 씨는 색을 잃어버려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는 화가에 대해서 말합니다. 노을 씨가 나무를 그리자 써니가 그 위에 앉아 있는 새를 그립니다.

그런데 노을 씨 그거 알아?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이 세상에는 원래 색이 없대. 사물에 반사되는 빛이 우리 눈 속에 들어오면 뇌가 그 빛을 노랑이라고 파랑이라고 생각하는 거래. 색은 사물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머릿속에 있는 거지. 노을 씨는 어쩌면 이 세상의 빛 그대로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노을 씨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쿵, 하고 울립니다. 노을 씨는 대답 대신 가만히 미소를 짓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텅 빈 교실에는 사각사각 연필 소리만이 정적 속을 흐릅니다.

우승미 작가는

197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2005서울신문신춘문예에 단편 빛이 스며든 자리가 당선됐고, 장편소설 날아라, 잡상인으로 제33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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