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안 들리고 끊어지면 ‘사형수’와 같아”

머무르는 바 없는 응무소주
진리의 무아 세계 이생기심
마음으로 양변이 없음 알고
밖으로 자비로운 마음 써라

조계종 원로의장 대원 스님은 말 그대로 현대 한국 선불교의 살아 있는 큰 스승이다. 대원 큰스님은 여든이 넘는 노령에도 요즘도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서 여름과 겨울, 여섯 달의 안거 때마다 방부(房付)를 들인 후학들과 똑같이 용맹정진을 한다. 노구에도 아랑곳 없이 구도역정에 있어서 만큼은 아직도 현역인 대원 스님은 출가 후 제방 선원을 돌며 효봉, 동산, 고암, 경봉, 전강, 향곡, 성철, 구산, 월산 스님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지식을 모시고 수행하며 공부를 점검받았다.

계묘년 새해를 맞아 대원 대종사는 신년인터뷰를 위해 찾은 구랍 23코로나 등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고 있는 요즘일수록 더욱더 선을 통해 참나를 바로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결코 놓치지 말라며 끊임없는 수행 정진을 당부했다. 이어 대원 스님은 현대불교신문 독자들에게 새해를 맞아 우리 모두 나를 바로 보고 나 자신부터 개혁한다면 종국에는 우리 사회 모두가 하나 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겸 법문을 지상중계 한다.

조계종 원로의장 학산 대원 대종사는…1942년 경북 상주 출생. 1956년 만 14세의 나이에 상주 남장사로 출가(은사: 고암 스님, 계사: 동산 스님)하여, 1958년(만 16세)에 사미계를, 1962년(만 20세)에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6년 일대시교를 이수한 뒤 혼해 스님으로부터 전강 받았으며, 21년간 제방선원을 다니며 효봉, 동산, 고암, 경봉, 전강, 향곡, 성철, 구산, 월산 스님 등 여러 선지식들 회상에서 정진했다. 2001년에는 오등시민선원을 개원했으며, 2014년 조계종 대종사 법계를 품서받았다. 이후 2017년 조계종 원로회의 수석부의장에 위촉됐다. 그리고 현재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맡고 있다. 법어집으로 〈철벽을 부수고 벽안을 열다〉와 〈진흙속에서 달이 뜨네〉 등이 있다.
조계종 원로의장 학산 대원 대종사는…1942년 경북 상주 출생. 1956년 만 14세의 나이에 상주 남장사로 출가(은사: 고암 스님, 계사: 동산 스님)하여, 1958년(만 16세)에 사미계를, 1962년(만 20세)에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6년 일대시교를 이수한 뒤 혼해 스님으로부터 전강 받았으며, 21년간 제방선원을 다니며 효봉, 동산, 고암, 경봉, 전강, 향곡, 성철, 구산, 월산 스님 등 여러 선지식들 회상에서 정진했다. 2001년에는 오등시민선원을 개원했으며, 2014년 조계종 대종사 법계를 품서받았다. 이후 2017년 조계종 원로회의 수석부의장에 위촉됐다. 그리고 현재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맡고 있다. 법어집으로 〈철벽을 부수고 벽안을 열다〉와 〈진흙속에서 달이 뜨네〉 등이 있다.

계묘년 새해를 맞아 모든 중생들에게 이 소식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바로 목전에서 이 소식을 확연히 깨달아 아신다면 영원히 대안심입명처(大安心立命處)를 수용할 것이요, 머무름이 없이 머물 것이며, 무심으로 행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장자 머리 위에 해와 달을 걸고 광명을 대천세계에 비추니 천하가 태평하고 즐거움이 가득할 것입니다.

청풍무종적(淸風無蹤跡)하고 (맑은 바람은 지나가도 자취가 없고)
백운자거래(白雲自去來)한데 
(흰 구름은 스스로 오고 가는데)
통신무장애(通身無障碍)하며 
(몸을 통하여 걸림이 없으며)
명주자희롱(明珠自戱弄)이로다 
(밝은 구슬을 스스로 희롱함이로다)

아시겠습니까? 부처가 있는 곳에 가서는 머무르지 말고 지나가고, 부처가 없는 곳을 만나거든 급히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말란 말입니다. 이 두 길을 여의고 대중은 바로 일러보십시오. 우리는 두 양변을 벗어나야 합니다. 양변서 놀아나면 우리 인생은 자유로운 생활을 못합니다.

지식에도 무식에도 머물지 마십시오. 지식은 양변의 시비를 갖고 있어서 불완전한 것입니다. 모든 중생은 나 자신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밖을 향해 해결하려고 하면 도리어 전도몽상을 이룹니다. 나를 바로 보면 모든 것에 걸림 없는 큰 지혜를 발휘하게 됩니다. 지혜 있는 자는 시작도 멋지고 중간도 멋지고, 끝마침도 멋지게 합니다. 또한 과감하게 모든 것을 책임질 줄 압니다. 어떤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는 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유와 무가 융합하는 것을 중도라 이름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식과 정보의 첨단 과학 시대가 오늘날 인류에게 생활의 편리함을 준 것은 사실이나, 한편으로는 인류에게 무한한 불안과 공포를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벗어난 세계야말로 인류에게 영원한 편안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
그러면 지식을 벗어난 세계는 어떻기에 그렇게 영원한 편안함과 즐거움과 복된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부처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요, 신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요, 사람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또한 중생에게 머무르는 것도 아니며, 성품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에 머무르는 것도 아닙니다. 진여자성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응무소주라는 머무르는 바 없는 그 실체를 진리라고 합니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누구나가 다 평등합니다. 그 세계를 우리가 어떻다고 말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불가사의하다고 합니다. 불가사의한 세계를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 하고 그 세계를 밖으로 드러내서 마음으로 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드러내서 쓰는 사람은 내가 없는 무아의 차원이라 하기도 하고, 그것을 무아라고도 하며 무주라고 하기도 하고, 머무르는 바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무아와 무주의 마음 쓰는 것을, 무한대한 마음을 밖으로 쓰는 것을 곧 대자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아와 대자비의 그 마음을 밖으로 쓰는 사람은 이 세상이 그야말로 천국이고, 극락세계를 정착시키고 살아가는 그런 차원의 세계로 발돋움하는 것이며, 여기에서는 3차원, 4차원, 5차원 어떤 차원도 벗어난 시공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무애자재합니다. 이것을 서로가 걸림이 없는 세계라고 합니다.

걸림이 없는 세계
그러면 걸림이 없는 세계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서로 눈만 마주쳐도 척 알아차리고 다 압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압니다. 통해버리죠. 그래서 융합이 됩니다. 그 세계의 마음을 쓰는 사람은 오늘날 정말 어려운 이 시대에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잘못한 게 없어도 직장에서 어떤 일이 생기면 다 내 책임이요 합니다. 만약 모든 직장인이 다 스스로가 똑같이 내 책임이라고 같이 들고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든 게 해결됩니다. 양변의 마음을 벗어나려면 우리는 응무소주이생기심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뭔지, 나란 존재가 뭔지를 바로 알면 그 사람은 응무소주를 알게 되고, 그 때 자기의 무한대한 무아·자비의 마음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본래 응무소주라는 무아의 세계에서는 귀천이 없고 고하도 없지만, 오늘날 이 세계에는 귀천도 있고 고하도 있습니다.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못 사는 사람도 있다 이겁니다.

왜일까요? 응무소주라는 이 무아의, 자비의 마음을 널리 밖으로 옮겨 쓴 사람은 쓴 것만큼 무한대하게 밖으로 창조하게 되지만, 그마음을 도외시하고 버리고 중생의 양변을 가지고 있으면서 좋고 나쁜 것을 가리고 따지고 좋은 것은 내가 차지하고 나쁜 것은 내가 안 하려고 하는 그 마음 자체로는 밖으로 크게 창조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은 창조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응무소주이생기심의 마음을 쓰지 않고 살아가는 오늘날 이 지식정보 사회, 첨단 과학시대에 우리는 이 땅에 정말 영원한 행복과 편안함을 정착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의 지식이 다시 새로운 어떤 패러다임에 의해서 잠식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럼 또 새로운 지식을 개발해서 드러내면 오늘날 쓰는 이 지식은 다시 잠식돼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보다는 우리들이 응무소주의 이 마음을 바로 알아야 되는데, 이것을 알자면 우리는 각자 자신의 마음이 확실히 어떤 것인지 알아봐야 됩니다. 자기 마음을 바로 보고 아는 사람, 그 사람을 바로 자기를 깨달아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깨달아 아는 그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완벽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단박 인터뷰

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내 앞에 앉기 전에 선에 대한 것을 남김없이 전했습니다. 이를 아시겠습니까. 선이란 것은 문자를 떠난 차원의 세계라서 오늘 산승이 이 자리에서 선이 어떻다 말로 하고 이야기 하게 되면 바로 저 자신도, 그리고 큰 허물을 짊어지고 똥바가지를 뒤짚어쓰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하는 궁극적인 목적은요?
열반, 즉 영원히 편안하고 행복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러려면 항시 번뇌 망상이란 이름의 도적을 경계해야 합니다. 화두가 일념으로 이어지면 살고 화두가 끊기면 죽은 물건이니 산 사람이 아니지요. 마음이라 함은 그 어떠한 물건도 아니니 여러분이 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망상이 탁 일어날 때 이를 알아차리는 놈이 무엇인고 참구하다보면 대자유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화두에 집중하는 과정인 참구에 있어, 사부대중 모두를 목에 줄을 매단 사형수라고 일컬으셨던 이유는 무엇이신지요.
망상과 번뇌라는 도적에 덜컥 사로잡히는 순간이 바로 사형대 스위치가 작동하는 때이니 화두를 일념으로 이어지게 붙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화두가 일념삼매에 들면 생명이 살아 있는 것이고 망상으로 인해 화두가 안 들리고 딱 끊어지면 그것은 사형을 받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즉 화두가 안 되고 일념이 안 되는 사람은 깨닫지도 못했고, 죽은 시체나 다름없습니다.

이태원 참사의 책임 공방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 탓보다 내 탓을 할 줄 아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아무런 관계와 잘못이 없어도 이건 내 잘못입니다. 내가 잘못했어요. 내 책임입니다. 내가 책임지지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로 군자입니다. 훗날 그런 성향의 사람들은 좋은 리더로 성장합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대형 참사는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런 측면에서 흔들림 없는 사태 수습은 오로지 지도자의 덕목입니다.

불심이야말로 사회 혼란 해결의 실마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는데요.
잘못된 일이 닥쳤을 때, 그게 잘못됐는 데 그 문제에 급급하고 거기서 골몰할 게 아니라, 그럴 때일수록 나의 불심으로 잠시라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방안과 방법이 거기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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