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누군가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것”

가족·반려동물 죽음 속서
2인칭으로 ‘죽음’ 간접체험

부처님의 겨자씨 대기설법
‘모든 생명, 반드시 죽는다’

반려동물 안락사 경우처럼
가족의 죽음서 ‘정념’ 필요

▶한줄요약

사랑하는 이들을 보내고 감당해야 할 슬픔은 인간이 살면서 겪어내야 할 당연한 감정 중 하나, 받아들이는 순간 극복의 길이 열린다.

 

우리는 수많은 죽음을 기사를 통해 하루에도 몇 번씩 목격한다. 자연재해, 전쟁, 테러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사망한 경우도 있고 사고, 범죄, 자살 등으로 개인이 사망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타인의 죽음관련 기사를 보고 오열하지는 않는다. 죽음에 관한 기사들이 스마트폰이나 TV에 나오면 무심히 화면을 넘길 뿐이다.

그러나 죽음이 내가 사랑하는 이의 일이 되면 다른 문제가 된다. 기사에 보이는 남의 죽음은 손가락으로 넘겨져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지금 가족이 위급한 상태라는 전화를 받는다면 우리는 무심히 지나칠 수 있을까. 죽음이 사랑하는 이것이 되면 어떨까. 사실 매일의 기사에 등장하는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가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츠’ (Vladimir Jankl-vitch, 1903-1985)는 그의 저서 <죽음에 대하여-La mort>에서 죽음을 1인칭, 2인칭, 3인칭의 세 가지 관점에서 보았다. 1인칭은 ‘나’, 2인칭은 ‘너, 당신’, 3인칭은 ‘그, 그녀, 그것’을 뜻하며 장켈레비츠의 관점에서 보면 1인칭 죽음은 ‘나의 죽음’이며, 2인칭 죽음은 ‘너의 죽음’, 3인칭 죽음은 ‘익명적인 타인의 죽음’이다.

1인칭, 즉 ‘나의 죽음’은 말 그대로 죽음이 나의 것이 된 것을 뜻하며 2인칭, ‘너의 죽음’은 ‘너, 당신, 그대’로 지칭 될 수 있는 가까운 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3인칭 죽음은 나와는 별다른 관계없는 매일의 기사로 보여지는 타인의 죽음, 즉 ‘남의 죽음’을 뜻한다.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하이데거, 야스퍼스, 레비나스, 들뢰즈 같은 실존주의 철학가들이 언급했는데 장켈레비츠 또한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죽음을 타인의 것만이 아니라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나’의 죽음은 내가 죽기 전까지는 경험할 수 없고 알려 줄 수 없다. 그것을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의 죽음’은 내가 죽기 전까지 여러 번 경험할 수 있다. 장켈레비치는 특히 2인칭 죽음을 강조했다. 2인칭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며 또한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타인의 죽음도 아니다. 죽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므로 나는 계속 살아있다.

하지만 그가 죽어가는 것, 그가 죽은 것을 보게 된다. ‘너’ 즉, 사랑하는 이들, 부모, 형제, 자매, 자식, 친구, 반려동물 등의 죽음을 통해 내가 죽음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에게도 언젠가 다가올 사건으로 깨닫기 시작한다.

사실 죽음에 관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그렇다. 전공이 죽음이긴 하지만 죽음이 나와 가깝다고 확실하게 말하기 힘들다. 혹한기 날씨처럼 죽음을 ‘체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한부 환자 혹은 그들의 가족들처럼 죽음이 거의 정해진 경우에는 죽음에 대해 ‘실감’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죽음은 남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다.

경전에서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례를 종종 다룬다. 여러 사례들 중 잘 알려진 것으로는 <법구경>(Dhammapada)의 끼사고따미(Kisagotami)에 관한 일화가 있다. 부처님께서 사왓띠(Svatthi)의 제따(Jeta) 숲에 계실 때였다. 이곳에는 어떤 부호와 결혼한 끼싸고따미라는 여성이 아들 하나를 낳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겨우 걸음마를 하기 시작한 아들이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녀는 큰 충격과 슬픔에 빠져 죽은 아들을 안고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 아이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약을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를 외면했다. 어느 날 문득 한 사람이 당신이 찾아보아야 할 사람은 붓다인 것 같다고 말하자 고따미는 제따와나 선원(Jetavana vihara)에 머물고 계시는 붓다를 찾아가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약을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붓다는 “여인이여. 그대는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을 찾아 겨자 씨 한 줌을 얻어오시오”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고따미는 겨자씨를 얻기 위해 수 많은 집들을 방문해 가족 중 죽은 사람이 없냐고 묻고 다녔으나 결국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은 없었다. 고따미는 다시 붓다를 찾아갔고, 붓다께서는 “고따미여, 그대는 당신만이 아들을 잃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붓다의 설법을 통해 그녀는 인간 죽음의 필연성을 깨달았고 이후 수행자가 되어 수다원(須陀洹, sotpanna)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고따미는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죽음의 필연성을 자각했지만 이미 겨자씨를 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이들도 자신과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되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을 것이며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은 세상에 자기 혼자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명보다도 귀한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진정시키는 특정한 마음의 태도가 있을까? 그것은 바로 ‘수용(acceptance)’ 즉, 받아들임의 태도로 볼 수 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 삶의 가장 큰 시련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 사회에서는 동물, 다시 말해 반려동물의 죽음에 대한 경험도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여러 매체나 자료를 보면 반려동물을 기르는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길에서 반려동물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과거보다 현저하게 많아진 것만 봐도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아울러 이전보다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 수준도 높아졌고 개나 고양이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가족과도 같은 생명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문제는 이에 따 따른 상실의 고통도 증가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평균 수명은 70세지만 반려동물의 수명은 평균 12년이다. 따라서 반려인의 대부분은 반려동물의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가족의 일원이었던 반려동물이 죽거나 실종되면 한동안 충격과 슬픔 탓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 수도 있다. 심한 경우 그러한 상실감은 우울증 같은 정신적 장애를 동반하기도 한다.

반려동물과 애착 관계가 강했던 사람일수록 그에 따른 고통도 클 것이다. 어떤 면에서 반려동물은 사람과는 달리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받아주고 깊은 애정을 준다. 반려동물의 상실은 사실상 가족을 잃은 슬픔과 유사한 정서적 고통을 남길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사별과 유사하게 반려동물의 실종이나 죽음 이후의 고통을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 필자 또한 여러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했고 또한 무지개 다리를 건네 준 경험이 있다. 동물이 죽고 난 뒤 한동안 그들이 없는 빈집, 밥그릇, 물그릇이 유난히 또렷하게 보인 적이 있었다.

반려동물이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더욱 괴로울 수 있다. 때로는 안락사를 선택할 순간에 놓일 수도 있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한 생명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지만 동물 호스피스 전문가 리타 레이놀즈는 <펫로스: 반려동물의 죽음>에서 말기 암 혹은 사고로 인한 치명적인 부상에는 안락사가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다고 권유한다.

많은 반려인들이 자연사를 원하지만 큰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동물에게 자연사는 오히려 잔인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안락사를 택하게 된다면 레이놀즈는 반려인이 “제발 날 두고 가지마. 너 없이는 못 살아”란 말보다는 “괜찮아. 이제 가도 돼. 널 지켜보고, 덜 힘들게 떠날 수 있도록 도와줄게”라는 태도를 가지라고 권한다. 이러한 태도는 동물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도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근대기 정토불교의 고승인 인광(印光)은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 곁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경계할 점은 임종자의 마음에 한(恨)이나 애착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환자 곁에서 흐느끼지 말라고 강조했다. 또한 당(唐)의 승려인 선도(善導)는 <임종정념결(臨終正念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목숨이 끝나려 할 때 가족이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거나 비탄, 한탄하는 소리로 병자의 심신을 어지럽게 하여 정념(正念)을 잃지 않게 하라. 오직 아미타불을 염하도록 가르치고 일시에 고성으로 자기를 위해 염불하도록 계속하고 기가 끊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가 소진되면 울도록 하라.”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이 임종시 정념(正念)의 유지는 극락왕생의 요건이다. 왜냐하면 일심불란(一心不亂)한 마음으로 염불해야 왕생이 가능하다. 만약 목숨이 끊어지려는 찰나에 정신이 혼미하여 생각이 어그러지면 정념을 잃게 될 것이다. 너무나도 힘든 일이지만 임종자 주변의 사람들은 슬픔으로 임종자의 마음을 흔들지 말고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죽음으로 떠나 보내지는 않지만, 자식을 군대를 보내거나 혹은 다른 나라로 유학을 보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만약 자식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보내기 싫다고 하는 태도와 웃으면서 조심히 잘 다녀오라고, 곧 다시 만날 것이라고 하는 태도 중 어떤 것이 집을 떠나는 사람의 발걸음을 가볍게 할 것인가?

누군가가 떠나고 난 뒤 느끼는 슬픔은 오로지 남은 자의 몫이다. 그러나 슬픔을 느끼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세상에는 상실의 고통을 겪고 슬퍼하는 수억 명의 사람이 있다. 사랑하는 이들을 보내고 감당해야 할 슬픔은 인간이 살면서 겪어내야 할 당연한 감정 중 하나일 것이다.

사랑하던 존재들이 떠난 뒤 그들의 유품을 정리하지 않거나 오랫동안 슬픔에만 갇혀 있는 태도는 내가 사랑하던 이들의 죽음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을 보여준다. 또한 죽음에 대한 비수용적 태도는 유족들에게 정신적 질환 혹은 비극적 선택을 할 가능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인연이 되어 만나 사랑했고 때가 되어서 떠나갈 때 그들을 잘 보내주는 것도 사랑했던 이들에 대한 예의이자 바른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놓아줄 수 있는 힘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오롯이 ‘수용’ 즉, 받아들이는 순간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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