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전란에 심신이 지친 일본 무사
禪師를 찾아 문답 나누며 휴식 청해
“천당과 지옥 어디 있냐” 무사 질문
선사 왈 “당신 마음이 천당과 지옥”

불교는 ‘화합제일’을 근본 두고 중시
상대 대한 이해·배려, 화합의 바탕
자그마한 상대적인 박탈감에 집착해
이곳을 지옥으로 생각하면 지옥일 뿐

어떤 사람들이 천당과 지옥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천당과 지옥이 어떻게 다를 것 같아?” 그저 상식적인 대답이 나왔다.  “천당은 무척 행복하고 즐거운 곳이고, 지옥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곳이겠지.” 

“맞아, 그런데 사실은 천당과 지옥은 같은 곳 이래, 예를 들면 천당과 지옥의 식탁은 하나도 다르지 않고 꼭 같다는 거야. 음식차림도 수저와 제공되는 서비스도 동일한 것이지.”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흔히 표현되는 천당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나 그림들을 보면 천당은 밝고 깨끗하며 아름답고 행복하게 묘사되고, 지옥은 어둡고 더럽고 불과 칼과 각종 고문도구로 극단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로 표현된다. 그런데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동일하단 말인가. 

유사한 소재로 일본 스님과 무사의 이야기도 전한다. 무사가 선사(禪師)를 찾아 전쟁과 전투로 지친 심신을 쉬고자 하였다. 선사는 편안한 마음으로 한 잔의 차를 대접하며 무사를 맞이하였다. 

마음이 편안해진 무사가 물었다. “스님, 천당과 지옥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떻게 다릅니까?”
선사가 말했다. “지옥과 천당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다만 마음에 있을 뿐입니다.” 

무사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고 그 마음은 그대로 선사에게 전해졌다. “지금 당신의 몸과 마음은 편안하고 근심걱정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 있는 곳이 바로 천당입니다.” 

무사가 물었다. “그러면 지옥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선사가 갑자기 무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더해서 그의 가족과 조상들에게 까지 좋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던 무사는 결국 인내심을 잃고 벌떡 일어나 선사를 향해 칼을 빼들고 말았다. 그 순간 선사의 목소리가 비수처럼 무사에게 들려왔다. 

“지금 당신의 마음이 바로 지옥입니다.”

사람들은 지옥과 천당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 지옥과 천당은 분명 별개로 존재할 것이다. 선과 악의 업이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곳, 동일한 환경일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에도 천당과 지옥이 공존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지극한 선행을 행한 이들이 가는 천당과 극락이 있을 것이고 극단적인 악행을 행한 악인들이 가는 지옥이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중간계인 인간 세상에는 지옥과 천당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사람들에게 천당과 지옥이 있을 수 있고, 한 사람의 삶에도 천당과 지옥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천당과 지옥의 식탁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수저가 사람의 팔보다 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의 사람들은 각자 먹으려 하지만 이룰 수 없어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천당의 사람들은 서로 먹여주는 까닭에 배부르고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화합제일’을 근본으로 한다. 교단을 뜻하는 ‘승가(僧伽)’라는 말도 ‘화합하는 대중’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대중이 추구하는 바는 인간 최고의 가치인 열반이며 깨달음이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 공존공생이 화합의 바탕이다. 작은 차이와 차별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마음이 묶이는 순간 자신의 삶에는 서서히 지옥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경제적, 사회적 환경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작은 차별과 차등에 집착해서 이곳을 지옥으로 생각한다면 지옥일 뿐이다. 자기의 마음을 바로 보면 지옥과 천당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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