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히 벡은 저서 ‘위험사회’에서
“발전되면 위험사회 될 것” 경고
現 위험은 ‘생산된 위험’란 의미
이태원 참사 역시 ‘생산된 참사’

업보, 불공업과 공업으로 구분돼
불공업-개인윤리 공업-사회윤리
불공업과 공업, 상호연기적 관계
붓다 설한 사회윤리적 고민 필요

이태원 참사는 온 국민을 충격과 슬픔의 회오리에 몰아넣었다. 애도 기간은 끝났지만  그 트라우마의 상처는 오래갈 것이다.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지은 〈위험 사회(Risk Society)〉가 생각난다. 울리히 벡은 한국불교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고, 2008년 봉은사를 방문하여 ‘무애’라는 법명을 가지기도 했다.

울리히 벡은 사회가 발전될수록 위험사회가 될 것이며, 그 위험은 지역과 계층과 관계없이 평준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21세기의 위험은 자연재해와 같은 불가항력적 재난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된 위험’이라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는 바로 생산된 참사이다. 지금 지구촌의 문명은 세계화의 틀에서 하나가 되고 있고, 하나의 중심은 서구 문명이다. ‘핼러윈’이라는 서양 무속의 축제가 우리나라의 젊은이에게 이렇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필자는 ‘라떼 시대’의 사람이고 한국 젊은이의 좌절과 외로움에 둔감한 것이 리라.

이태원 참사는 이 시대에 사는 이 땅의 사람들이 함께 짊어질 공업(共業)이라고 생각한다. 윤회와 업 사상은 불교 윤리의 제일 기본적인 토대이다. 윤회와 업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보는 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윤회의 핵심동력이 바로 업이다. 불교 수행의 핵심은 탐욕,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에 의해 형성된 업의 소멸에 있다. 

업은 불공업(不共業)과 공업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불공업이란 자신이 행한 행위의 과보는 그 개인이 받는 것이며, 공업은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받는 업이다. 공업은 아비달마를 집대성한 〈구사론〉과 〈화엄경〉 등에 등장한다. 

불공업은 개인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이것은 개인의 도덕성, 즉 개인 의지와 결단에 바탕을 두고 개인의 가치관 정립과 실천에 관심을 둔다. 

반면, 공업은 사회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여기서는 사회구조와 제도의 도덕성에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사회정의의 문제가 제기된다.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며 어떻게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할 것인가 하는 사회윤리적 과제가 제기된다. 불공업과 공업,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는 서로 연기적 관계에 있다. 그 연기적 양상은 사회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태원 참사의 원인과 책임에 대한 규명이 여러 측면에서 표출되고 있다. 관련 공직자에 대한 과실치사, 업무 태만, 은폐조작 등 다양한 죄목이 거론되고 있다. 언뜻 보면 개인윤리적 차원에서 질책 받을 수 있는 내용도 그 심층을 보면 공업의 성격이 크다. 비도덕적 사회구조가 비도덕적 인간을 만든다고 할 때, 이 사회구조의 개념 속에서는 부도덕하고 불합리한 사회적 관행과 문화를 중요한 요소로 포함한다. 이를 ‘관행적 규율체계’로서 사회윤리에서 중요한 요소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를 통해 우리 사회가 부도덕하고 불합리한 관행 체계와 문화가 얼마나 뿌리박혀 있는가를 체감하게 된다. 
 

지금까지 한국불교는 개인의 선한 업을 강조하는 개인 윤리적 차원에 중점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근래에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수많은 사회적 고통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사회적 무명을 밝히고 극복해 가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선한 공업을 짓느냐의 과제로 연결된다. 

불교는 단순한 신앙체계나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이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지금 여기서’ 살아 숨 쉬는 것이어야 한다.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불교가 지향할 사회윤리적 가치에 대해 진지한 고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탐진치 삼독의 극복은 개인의 수행 과제이면서 동시에 우리 전체 사회의 수행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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