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부터 취업까지 경쟁 만연한
‘학력 만능주의’ 빠진 한국사회
자녀를 키우고 학생 가르쳐보니
“공부 못해도 똑똑해요” 실감해
꼴찌라도 현명한 학생들이 많아

‘학력 만능주의’ 이제 걷어내고
韓불교부터 꼴찌들을 품어보자
학력서 벗어나고픈 청년들 모아
본인 가능성 확인 기회 제공을

세상은 다양하다. 다양하다 못해 극과 극을 달리는 이들이 서로 태연하게 부딪히며 살아가는 곳이 세상인 듯도 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렇게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한 줄에 세우는 버릇이 있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그리고 취업까지 모두 한 줄로만 세운다.

늘어세운 한 줄에서 일등을 하는 사람이 있고, 꼴찌를 하는 사람이 있다. 당연히 일등을 하는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남기에 좀 더 유리하다. 그래서 내 자식이 그 줄에서 앞 등수를 차지하는 장한 인재이기를 응원한다.

그런데 일등이 있는데 꼴찌가 없겠는가? 일등이 있으려면 반드시 꼴찌가 필요한 법이다. 고백하건데, 나는 수학도 잘 못하고 영어도 잘 못한다. 수학도 못하고 영어도 못하니 굶어죽어도 백번은 굶어 죽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여곡절 헤매다가 보니, 중간보다 조금 등수가 나은 곳도 있어서 겨우 밥은 먹고 살아간다.

이제 자식을 키우다 보니, 어렸을 때는 절대 안 믿었던 말을 믿게 됐다. “우리 아들이 공부는 못해도 똑똑해요.”

예전에는 이 말을 못 믿었다. 그런데 자식을 키우다 보니,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 믿게 되었다. 공부는 못해도 똑똑한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가 없어서 믿게 되었다. 똑똑한 데가 다를 뿐이라는 것을 한참이나 후에 깨닫게 되었다. 이 말에 수긍하는 사람이 아마도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우리 젊은이들을 학력이라는 하나의 줄에서 앞머리에 세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똑똑한 젊은이들을 데려다 꼴찌를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셈이다. 묻고 싶다. 왜 똑똑한 자식을 잘하는데서 일등 만들지 않고 굳이 꼴찌가 되는 줄에 세우는지?

학력 만능의 사회는 이제 그만 두자. 부모들도 자식들도, 학력 일등이 사회 일등이 되는 것이 아닌 줄을 뻔히 안다. 그러면서도 그 줄의 앞에 세우고 싶은 것은 내 자식이 좀더 쉽게, 고생하지 않고 안정된 삶을 누렸으면 해서일 것이다. 마음은 알지만, 부모도 자식도 더욱 힘들어질 뿐이다.

그래서 제안하고 싶다. 불교라도, 우리 불교라도 꼴찌들을 위한 불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꼴찌를 모으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학력이라는 한 줄에서 벗어나고 싶은 젊은이들을 위한 대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이다.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고 자기 이름조차 잊어버리곤 했던 주리반타카도 부처님의 일깨움에 따라서 청소만 하다 아라한과를 성취하지 않았던가?

단 하나의 줄만 세우는 학력사회에서 학력으로 일등 못하는 젊은이를 탓하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 그들이 학력으로는 일등이 아니더라도 정말 좋아서 일등인 곳을 찾아줄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하다. 2600년 동안 불교는 일등이 아닌 꼴찌들을 위해 정말 많은 콘텐츠를 생산해왔다. 줄탁동시(啐啄同時)가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이 제자들을 일깨워왔고, 조사스님들이 제자를 일깨웠던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불교 전등(傳燈)의 역사가 오롯하게 줄탁동시의 역사이기도 하다. 또 꼴찌를 일등으로 만들어낸 콘텐츠를 재생산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혹시 우리는 그 경험을 역사 속에 묻어버리고 한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그 경험들을 끄집어내어서 수많은 꼴찌들을 위해 제공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꼭 하고 싶은 제안이 있다. 꼴찌라고 착각하고 한숨 내쉬기 바쁜 젊은이들에게 멍 때릴 수 있는 공간부터 제공해보자. 멍 때리기 좋은 공간이 우리 불교에는 정말 많다. 공부는 꼴찌라도 똑똑한 젊은이들이 찾아와서 멍 때리기 좋은 곳, 그런 쉼터를 제공하는 데서 부터, 우리 불교가 변화를 시작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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